김영권 장편소설 '형제복지원-회색 구슬 속의 산 18번지 왕국' 제10회

일명 ‘통띠’는 소년·소녀 가리지 않고 무수히 자행되었다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20/08/28 [11:40]

김영권 장편소설 '형제복지원-회색 구슬 속의 산 18번지 왕국' 제10회

일명 ‘통띠’는 소년·소녀 가리지 않고 무수히 자행되었다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20/08/28 [11:40]

국민세금 퍼부어 지원하면서 국가는 왜 형제복지원 감시하지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공무원 대꾸 비슷…진실 향한 길은 돌벽과 가시밭 험로

 

탈출 성공한 피해자가 낚시하던 검사 만나 우여곡절 털어놓으며 수사 시작
그 검사는 반강제 사직하곤 낙향…호언장담 박인근은 법망 슬슬 빠져 나가

 

▲ JTBC 시사교양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서는 2019년 2월7일 형제복지원의 충격적인 의혹들에 관해 다뤄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제3부 <4>원생 장사


의식주는 세상 어느 곳에서나 생활의 기본 조건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식은 생명과 직결된다.
형제복지(지옥)원에서는 모든 게 열악했지만 먹을거리는 최악이었다. 꽁보리밥에 멀건 된장국, 반쯤 썩은 배춧잎이 둥둥 뜬 짜디짠 소금국은 여느 지역 수용소에서나 나오는 단골 메뉴다.


형제복지원에서는 좀 더 심했던 모양이다. 찬물에 된장을 푼 멀국을 배식하기도 했고, 때론 밥 없이 생감자와 소금만, 혹은 곰팡이가 핀 식빵과 고추장만 내놓기도 했다. 그것도 양이 너무 적어 원생들은 지네와 바퀴벌레 따윌 잡아먹기도 했다. 만일 쥐를 한 마리 잡으면 고급 식당에서 특별히 포식하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아직 눈도 안 뜬 발간 생쥐 새끼를 꺼내 보양식이라며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하루 종일 뼈빠지게 노동한 수용자들은 허겁지겁 먹었지만, 간혹 이물질이 걸리거나 위장병으로 인해 토악질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약체 혹은 불순분자(체제 부적응자라고나 할까)들은 점찍어 두었다가 나중에 여러 가지 수단 방법으로 괴롭히고 죽여 뒷산에 몰래 파묻어 버렸다.


단식은 사실 그 시절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 조장이나 소대장에게 잘못 보이면 작은 실수도 침소봉대해 죽을 만큼 두드려 패곤 꽁보리밥조차 아예 주지 않았다. 하루 종일 물 한 방울 못 마신 채 지옥 속을 허덕였다니까. 삶으로 통하는 길은 보이지 않고 온통 사망으로 가는 철가시 비탈길뿐이었다. 그래서 탈출을 감행해 보지만 돌아오는 건 참혹한 폭행과 벌 방속에서의 굶주림과 쥐새끼 같은 죽음이었다.


손가락과 발가락을 펜치 같은 도구로 부러뜨려 버리는 건 약과였다. 한겨울에 물이 가득 찬 드럼통 속에 집어넣곤 꾹꾹 누르기도 했다. 일명 생쥐 죽이기였다.


국민 세금을 그곳에 퍼부어 지원하면서 국가는 왜 상황을 감시하지 않았을까?


그때나 지금이나 담당 공무원의 대꾸는 비슷하단다. 해당 부서에서 꾸준히 관리하고 있는데 별 문제는 없으며,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해 나갈 것이다. 더구나 대통령 표창까지 받은 원장이 운영하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고, 사소한 문제점은 차츰 더 좋게 개선되리라 본다 운운….


특히 그 당시는 박정희·전두환의 무시무시한 군사정권 독재시대였기에, 설령 옳은 언행일지언정 목숨을 걸고 시도하는 판이었는데, 부산시장도 아닌 일개 구청 담당자가 무슨 수로 그 복마전의 참혹상을 까발리겠는가.


오히려 박인근 원장은 높다란 담벽 속의 아방궁에 숨어 자기 나름의 거창스런 욕망 왕국을 꿈꾸며 자선사업가로 행세했건만… 굶주린 원생들의 노동을 강제 착취하고 어린 소녀들을 성 노리개로 부려 먹으며 마치 왕처럼….

 

1986년 겨울, 형제복지원의 지옥 같은 실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건 목숨 걸고 탈출을 감행한 30여 명의 원생들로 인해서였다.


박인근 원장의 비밀 별장을 짓기 위해 200여 명의 원생이 산기슭에 동원되었는데, 작업 도중 한 명이 지쳐 쓰러지자 게으름 피운다며 감시대원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마구 때려 죽여 버린 것이다.


증오심과 공포감을 감춘 몇몇 원생들은 시체를 매장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소롯길을 헤쳐 오르다가 삶을 향해 내달렸다. 스스로 도모하진 못할지언정 자유를 꿈꾸었던 자들도 동료의 용기에 힘입어 따라붙었다.


하지만 경비대와 경비견의 이빨에 물려 대부분 처참히 죽거나 반병신꼴이 되었다.


겨우 탈출에 성공한 단 한 명이 우연히 강가에서 낚시하던 어떤 검사를 만나 우여곡절 어렵사리 털어놓음으로써 비로소 수사가 시작됐던 것이다.


하지만 진실을 향한 길은 돌벽과 가시밭 험로였다.


하긴 민주법치 사회라는 요즘도 강압과 부조리가 판을 치는데, 군부독재가 철권을 휘두르던 당시엔 어떠했겠는가. 온갖 외압과 내압에 이어 살해 협박 전화까지 걸려왔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님으로부터 ‘목숨은 짧되 의로움은 영원’하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란 검사는 사생결단한 후 한 발짝 한 발짝 고군분투 그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정문과 후문뿐 아니라 모든 건물들의 출입문에 견고한 자물쇠가 걸려 있는 마계(魔界) 소왕국으로….

 

▲ 형제복지원 관리자들의 최초증언을 따라 아동소대에서 벌어진 해외 입양과 암매장, 시체소각 의혹들에 관해 추적한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방송 화면 갈무리.  

 

강제수용된 5세~80세 원생들은 신흥 사이비 군대 식으로 편성돼 인간성과 자유를 박탈당했다.


원장 아래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분대장, 조장, 경비부대원 등 층층시하 맨 밑바닥에서 일반 원생들은 땡전 한푼 받지 못한 채 굶주리며 매일 15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렸다.


그들은 비렁뱅이보다 못한 신세였다. 거리를 떠돌 땐 그나마 자유라도 있었건만 이젠 철창 속에 감금된 짐승 취급을 받았다. 기합 및 폭행이 수시로 벌어졌으며, 특히 속칭 인민재판 후 징벌소대인 일명 아오지 탄광으로 끌려가면 그 도수가 살인적일 만큼 높아졌다. 의식주는 최악으로 변하고, 입에 모래나 벽돌을 넣은 주머니를 문 채 등짐까지 져서 날랐다.


작업장에서 죽은 원생들은 대부분 폭행과 굶주림 때문이라는 정황이 나왔는데, 복지원 소속 의사는 사망진단서에 뇌졸중, 폐결핵, 신부전증 등으로 허위기재한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정신질환자의 경우 정규 의사의 진단과 경찰의 입회 아래 수용케 돼 있으나 90% 이상이 변칙 감금된 일반인(박 원장에게 낙인 찍힌 반동분자, 노동력 없는 노인과 불구자들)으로 드러났으며, 정신병동에 갇힌 정상인들에게 하루 세 번씩 지나친 약물을 투입해 모두 중독에 빠진 상태였다.


그중엔 북괴 간첩이라는 혐의를 쓴 채 독방에 처박힌 반독재 민주투사도 있었다.


박인근 원장은 형제복지원 사업을 ‘세상을 맑게 만들고 국가에 충성하는 사명’이라고 강변했지만, 실상은 원생 한 명당 얼마씩 계산돼 지급되는 돈 때문이 아니었을까? 원생을 이리저리 빼돌리거나 빌려와서 보조금을 타 먹는 이른바 ‘원생장사’의 빼꼼이 도사 짓….


(지은이 註: 요즘 민주사회의 병원과 요양소에서는 수많은 지능범 사기꾼들이 법의 사각지대를 찾아 온갖 술수를 부려서는 국민 세금을 훔쳐 먹으며 히득거리고 있다. 정치·경제·언론·종교·문화·예술·교육계 등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다. 박인근 원장의 아들이 국영방송 카메라 앞에서 “우리 아버지는 죄가 없다! 국가도 귀찮아서 못하는 일을 수탁받아 희생정신으로 악전고투해 짐승 버러지들의 천국을 건설한 공로로 대통령 각하의 표창까지 받았는데 무슨 해괴한 개소리야! 이만큼 해맑은 사회가 된 건 대체 누구 덕분이지, 응?”이라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배포가 아니었을까?)

 

여자 소대 옆엔 영유아 소대가 있었다. 그 애들은 대부분 강간의 결과물이었다. 성폭행을 당한 여자가 임신하면 중절시키지 않고 낳게 했는데 그건 어린애를 빌미로 삼아 국가지원금을 이중·삼중 타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은이 註: 형제복지원이 돈벌이를 위해 아동을 해외로 입양 보낸 사실이 확인됐다. AP통신에 따르면, 한국인 아동 해외 입양기록을 종합한 결과 형제복지원이 1979~1986년 20여 명의 아동을 외국으로 입양 보냈다는 증거가 드러났으며 또 당시 50명 이상을 해외에 입양 보낸 것으로 판단되는 간접 증거도 나왔다. AP는 전문가 의견을 인용해 “당시 형제복지원장이 불법 노역시키던 입소자 명수대로 국가 지원을 받고 있었던 만큼 그 이상의 수익이 없다면 해외 입양을 보낼 이유가 없다”라고 전했다. 한편 형제복지원 수용자였던 김상하씨는 “갓 태어난 아기부터 5살 정도까지 아이 80여 명이 있었고, 어느 날 20여 명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됐다”라고 증언했다)


일명 ‘통띠’라고도 불린 성폭행은 소년·소녀를 가리지 않고 무수히 자행되었다.


동서고금을 통해 강제수용소에서는 그런 짓이 늘상 벌어졌는데, 소장·원장 등 최고 권력자들이 장려 혹은 묵인했기 때문이었다. 꼭 본인이 나서지 않더라도 간신 같은 수하들이 가장 예쁘장한 소녀 애를 뽑아 갖다 바쳤다. 그래야만 자기들도 원생들의 영육을 맘껏 유린할 수 있을 테니까. 권력자 자신이 직접 나서서 취향대로 어린 희생양을 골라 자애로운 부모인 척 무소불위의 하느님인 척 행세하며 슬슬 야욕을 채우는 경우도 많았다.


법의 사각지대… 전국 각지의 복지원에 그런 야만의 도가니가 숨어 있었다.


박인근 원장은 과연 어떤 타입이었을까?


한국 땅에서 가장 크고 악랄했던 형제원인데 그건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기존의 언론 보도나 피해 체험 수기에서도 그런 언급은 없었다.


혹시 성불구자였던가? 그렇진 않은 듯싶다. 자기를 닮은 자식들을 낳아 비슷하게 키웠으니까. 그럼 부산의 환락가인 남포동 등지의 요정에서 욕망을 풀었을지언정 자신이 건설한 성스런 메카인 복지원에선 금욕을 실천했던 걸까?


이런 의문에 대해 수용소 체험자들은 입을 열어 말하는 대신 찡그린 표정과 씁쓸한 비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왜 그런가? 다시 조심스레 물어 보았으나 침묵으로 부정적인 의미를 더욱 심화시켰다.


대체 왤까? 무명 작가인 나에 대한 불신감인지 모른다.(요즘 무명 예술인들은 모두 엉터리 멍청이 사기꾼 마술사로 타락해 간다고 오해받는 실정이다. 분명 그런 면도 있지만, 실제로는 무명보다 유명한 인기 작가들이 더 문제다. 그분들은 오직 자기 일신의 영광을 위해 문학 예술판을… 제 트림과 방귀 냄새로 마치 향내인 양 위조해 오염시키는 것이다. 어쨌든 많이 팔리기만 하면 악마의 대필자도 명사(名士)로 변해 크래딧 카드를 받는 세상이니까 뭐.)


아니다. 비닐 천막 속에 갇힌 피해 생존자들이 절박한 나머지, 유명한 작가에게 좀 소설화해 주십사 애소했건만 거절당한 건 사실인 듯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명인 나까지 싸잡아 불신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조금쯤 고마워하는 듯싶기도 했다.


다만, 색다른 현실 지옥에서 겨우 살아 나온 사람들의 눈에 새파란 작가의 치기가 돈키호테처럼 무모해 보였는지 모른다.


혹시 그들은 그곳에서 철저히 세뇌당해 박 원장을 보통 사람 아닌 초인이나 괴인으로 여기는 건 아닐까? 잠재의식 속에서… 의식으로 부정하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일반 사회에서와 달리 그곳에서의 세뇌는 무자비한 폭력과 함께 시시각각 진행된다. 아무리 강한 의지력을 지녔든 학식 높은 지성인이든 산전수전 다 겪은 꼴통이든 뭐든 마침내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 복종하거나 맞아 죽거나 미치거나… 선택지는 좁고 가파르다.


피해 생존자들은 겉으로 대범해 보여도 내심 공포감에 떨고 있는지도 몰랐다. 폭력과 협박은 형제원 출소 후에도 그들의 뇌리에 각인된 채 시시각각 계속 불안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아니, 과거의 기억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악마들은 실제로 위협적인 메시지를 은근슬쩍 흘려 보내 생존자들의 증언을 막으려 했던 것 같다. 박 원장과 그의 수하·심복·충복이었던 자들 그리고 장성한 아들은 위대한 ‘복지 천국 아버지’를 폄훼하는 ‘인간 병균’을 박살내 버리고 싶었으리라.


그런 악조건 속에서 그들은 비닐 천막에 모여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아직 50세도 안 된 나이에 치아가 다 빠져 틀니를 낀 사람의 말이 좀 떨리고 어눌할지언정 그건 공포심 때문이기보다 그걸 극복해 넘어 인간답게 살고 싶기 때문일 터였다. 그들의 고백은 회상적 이야기가 아니라 세뇌의 주술을 풀고 자유로운 정신을 회복하고픈 염원이자 절규였다.

 

박인근 원장은 사이비 신흥종교 교주인 양 행세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는 형제복지옥원 건물 뒤쪽 산 위에 웅장한 교회당을 지어 놓곤 예배 때마다 산상수훈을 녹음된 마이크 소리로 원생들에게 들려 준 후, 사목 부서 직원들을 동원해 잠깐씩 자기 숭배 의식을 시도케 했다. 별 표나지 않게….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크게 벌일 생각은 없었던 듯싶다. 자그마하지만 견고한 왕국에서 차근차근 축재하고 은근슬쩍 욕망을 채우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을까?


그의 미소짓는 얼굴 뒤편에서 얼마나 많은 성인 남녀와 어린 소년·소녀들이 영육을 유린당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정말 모른다.


그런데 박 원장의 마누라는 소년들의 고추 만지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오줌싸개 혹은 머리나 배가 아프다는 어린 아이들을 밀실로 불러 치료한답시곤 사탕 한 알씩 입에 물려 놓고 아랫배를 쓰다듬다가 슬슬 아래로 내려가 주물럭거렸다는 것이다.


도대체 알 수 없는 복마전이다. 혹시 그녀는 남편이 소녀와 처녀들의 몸을 유린하는 걸 알아채곤 복수극을 벌인 건 아닐까.


아무튼 세상과 멀리 떨어진 철벽 성채 속에서 그들이 지옥과 함께 자기들만의 요지경 아방궁을 만들려 했던 건 사실인 듯 보인다. 군부독재가 횡행할수록 그들의 해괴스런 짓거리는 심해졌다.

 

증거를 다각도로 확보한 검사는 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왠지 자꾸 지연되다가 거부당하곤 했다. 박인근이 미국으로 도피하려 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검사는 선후배 동료들에게 애걸 복걸한 끝에 겨우 영장을 발부받아 어렵사리 아슬아슬하게 박 원장을 체포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부산시장으로부터 날선 전화가 걸려왔다.


“당장 그를 석방하시오. 박 원장은 훌륭한 사회사업가로서 국민훈장까지 받은 사람이오. 그런 애국자들 덕분에 거리에 거렁뱅이도 없고 좋잖소… 이건 내 말이 아니라 대통령 각하의 말씀이오.”


단 한 마디로 경천동지하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검사는 악전고투 끝에 결국 박인근 원장을 구속 기소했다. 여기에는 민주화의 점차적인 낌새와 국민들의 성원도 한몫했다.


1987년 초여름에 열린 1심 공판에서 박인근 원장은 징역 10년과 벌금 6억 원을 선고받는다. 얼마 후 검사는 반강제적으로 사직하곤 고향으로 돌아간다. 씁쓸한 낙향.


검사 앞에서 떠벌린 호언장담대로 박 원장은 법망을 슬슬 빠져 나갔다. 그해 겨울의 항소심에서는 벌금형이 무효화되고 징역 형량도 1년으로 줄어들었다. 과연 누구에 의한 누구의 승리일까?


<다음 호에는 ‘물방울’ 편이 이어집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특정 인물과 특정 사실 묘사는 피해 생존자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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