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보다 재미있는 명당야사, 신숭겸 장군 묘 이야기

태조왕건은 왜 ‘만대영화지지’를 부하에게 양보했나?

글/장천규(풍수지리 전문가) | 기사입력 2019/11/11 [09:21]

소설보다 재미있는 명당야사, 신숭겸 장군 묘 이야기

태조왕건은 왜 ‘만대영화지지’를 부하에게 양보했나?

글/장천규(풍수지리 전문가) | 입력 : 2019/11/11 [09:21]

왕건이 후백제 군대에 포위되자 신숭겸이 ‘왕의 갑옷’ 입고 전사
“짐을 살리고 장군이 목숨 잃었다” 도선국사가 잡아준 명당 하사

 

▲ 신숭겸 장군의 묘는 도선국사가 태조 왕건을 위해 잡아준 만대영화지지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춘천시 서면에는 신숭겸 장군 묘가 있다. 이 묘는 북배산에서 시작한 맥이 굽이굽이 흘러가다 혈을 형성했다. 혈 앞에는 넓고 크게 국세가 이루어져 있다.


이곳은 왕건의 신후지지(身後之地)로, 옥룡자(玉龍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왕건에게 잡아준 옥등괘벽혈(玉燈掛壁穴 등잔이 벽에 매달려 있는 형태)로 서기왕성(瑞氣旺盛)하여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로 알려져 있다.


왕건의 묘로 점지해둔 자리가 신숭겸 장군의 묘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이제부터 신숭겸 장군의 야사로 들어가 보자.

 

날아가는 기러기 명중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포악해지고 거칠어져 궁예의 부했던 왕건과 그를 따르는 배현경·홍유·복지겸, 신숭겸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고 고려를 세운다. 신숭겸 장군은 고려 개국공신이 된다.


왕건과 여러 장군들이 어느 날 황해도 평산으로 사냥을 나갔다.


왕건이 하늘을 쳐다보니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고 있었다. 왕건이 기러기를 보고 물었다.


“누가 저 기러기를 활로 쏘아 맞힐 수 있는가?”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신숭겸 장군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대왕! 제가 쏘아 맞히겠습니다.”


“대왕! 세 마리 기러기 중에 어느 기러기를 맞히오리까?”


왕건은 깜짝 놀랐다. 아무리 활을 잘 쏘는 명궁이라도 날아가는 기러기를 골라서 맞히기란 어려웠기 때문이다.


왕건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세 번째 기러기를 맞히게!”


신숭겸 장군은 다시 왕건에게 물었다.


“대왕! 세 번째 기러기의 어디를 맞힐까요?”


왕건은 더더욱 놀라며 날아가는 기러기 세 마리 중 세 번째 기러기를 지정하고 다시 그 기러기의 어느 부위를 맞히면 되냐고 되묻는 신숭겸 장군을 바라보면서 다시 명령을 내렸다.


“왼쪽 날개를 맞히게!”


신숭겸 장군은 왕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활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 올렸다.


세 번째 기러기가 땅으로 떨어졌다. 왕건과 신숭겸 장군 그리고 다른 장수들은 말을 타고 기러기가 떨어져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은 모두 깜짝 놀랐다. 화살이 세 번째 기러기의 왼쪽 날개에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과 여러 장수들은 신숭겸 장군의 활솜씨에 탄복하고 칭찬을 했다.


태조 왕건은 신숭겸 장군에게 황해도 평산을 본관으로 삼게 했다. 그리고 기러기가 떨어진 곳의 주위 땅 300결을 하사하여 자손대대로 세를 받게 했다. 그곳 땅이 궁위전이다. 이리하여 신숭겸 장군은 평산신씨의 시조가 된다.

 

왕건 대신 전사한 신숭겸


태조 왕건은 고려의 땅을 확장하려고 전쟁을 계속 했다. 왕건은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927년 9월 왕건은 신라를 침략하여 승리를 하고 돌아가는 길에 대구 공산 부근에서 후백제 견훤왕의 군대와 마주쳤다. 왕건의 군대와 견훤의 군대는 서로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태조 왕건의 군대는 후백제 견훤왕의 군대에 포위되어 목숨이 위급한 상황이 되었다.


이때 신숭겸 장군 아뢰었다.


“대왕!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대왕께서는 옥체를 보존하시어 대업을 이루셔야 합니다!”


“대왕! 저에게 옷을 벗어주십시오!”


왕건은 깜짝 놀랐다.


“내 옷을 입으면 장군의 목숨도 위험하오!”


그러자 신숭겸 장군이 태조 왕건에게 다시 말했다.


“소신이 대왕의 옷을 입고 전투에 나가 싸울 테니 대왕께서는 이곳을 빠져 나가십시오!”


왕건은 신숭겸 장군에게 옷을 벗어주었다.


신숭겸 장군은 왕의 갑옷을 입고 왕의 말을 타고 전투 현장으로 달려 나갔다. 후백제 견훤왕의 군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를 격렬히 벌임으로써 왕건이 전투현장에서 목숨을 건지고 빠져 나갈 수 있게 시간을 벌어주었다.


왕건과 부하들은 다시 공산전투 현장을 찾았다. 신숭겸 장군의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왕건은 신숭겸 장군의 시신을 찾았다. 왕건은 신숭겸 장군을 보고 깜짝 놀라며 통곡했다.


“신 장군, 나를 살리고 전사하셨소!”


왕건이 더욱더 통곡을 한 것은 신숭겸 장군의 시신 중에 머리가 없어서였다. 후백제 견훤왕의 부하들이 왕건으로 착각하고 신숭겸 장군의 목을 잘라간 것이었다.

 

도선국사의 명당 양보


왕건은 신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들으라! 신숭겸 장군은 짐을 살리고 목숨을 잃었다.”


“짐은 신숭겸 장군의 묘를 도선국사께서 짐의 신후지지로 점지해둔 춘천의 만대영화지지로 정하니 그곳에 모셔라!”


태조 왕건은 또한 “장례식은 성대히 치르고 장군의 머리는 금으로 만들라!”고 명했다.


이후 태조 왕건은 장례식에 친히 납시어 비통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왕건은 신숭겸 장군의 두상을 금으로 만들었다. 그리고는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신숭겸 장군이 어디에 묻혔는지 모르게 봉분을 3개로 만들게 했고, 신숭겸 장군과 김락이 위왕대사(爲王代死) 순절한 자리에 순절단을 세우고 지묘사를 창건하여 명복을 빌게 했다. 또 묘역 주변의 땅을 1만8000보를 하사하고 묘를 지키는 군사 30호를 두어 수 백 년 동안 장군의 묘를 수호하게 했다.


훗날 고려 예종은 태조 왕건과 견훤왕이 공산전투에서 싸우던 중 태조 왕건이 궁지에 몰렸을 때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과 김락을 기리는 도이장가(悼二將歌)를 지어 애도했으며, 신숭겸 장군의 기상은 계속 이어져 충성의 본보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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