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계 계파갈등 히스토리 - 1] 당 내분의 서막, ‘열린우리당’

모래알 조직력의 짬뽕정당…“분열로 시작해 분열로 끝!”

김범준 기자 | 기사입력 2015/05/29 [18:43]

[민주당계 계파갈등 히스토리 - 1] 당 내분의 서막, ‘열린우리당’

모래알 조직력의 짬뽕정당…“분열로 시작해 분열로 끝!”

김범준 기자 | 입력 : 2015/05/29 [18:43]
‘여당은 비리로 망하고 야당은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현재 제 1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을 봐도 이 논리는 그대로 통한다. 최근 야당 상황을 보면 그야말로 ‘개판오분전’이 무엇인지를 자세히 알려주고 있다. 연이은 내부 권력투쟁으로 1,2위 최고위원들이 사퇴하면서 사실상 식물지도부가 되는 등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내분이 쉽사리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현 야당인 새정치연합의 계파갈등이 뿌리 깊다는 점이다. 현재 폭발하고 있는 민주당계 내분의 뿌리는 2000년대 초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편집자 주>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여당 쇄신 차원에서 창당
탄핵으로 다수당 차지…상이한 이념으로 내분 잦아
연이은 선거패배로 내분 심화…탈당러시로 당 붕괴
존재한 계파만 10개 넘어…모두 정치적 지분 요구


[주간현대=김범준 기자] 민주당계 정당은 과거에도 내분이 있어왔다. 하지만 대주주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력과 카리스마로 휘어잡고 이끌어 왔기 때문에 극심한 계파갈등이 이뤄지진 않아왔다. 현재와 같은 갈등의 시발점은 지난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시작된다.

분열로 시작된 창당

지난 2000년 김대중 전 대통령이 창당했던 새천년민주당은 기존 민주당 세력의 세력부족을 극복하고자, 기존의 인물들에 더하여 다양한 인사들을 영입했다. 대표적으로 386 초선 인사들, 지역 정계입문자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을 위시한 전직 유명 정계인사들과 이인제 세력(국민신당 세력), 장태완 전 사령관을 포함한 군인 출신 인사들을 영입하여 탄생한 정당이었다. 그만큼 세력 문제에서는 한나라당과 맞먹는 정당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

우선, 16대 총선에서 석패했다.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직접 총재, 국민신당 세력의 이만섭과 이인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기를 몰아주었으나 남북정상회담 내용이 일찍 터지면서 되레 정략적이란 반응으로 야당(보수 한나라당) 표가 결집한 것이 큰 패착이었다.

선거 출구조사만 해도 민주당은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울진군·영덕군 선거구에서 김중권 후보가 17표 차로 낙선하는 등 접전이 벌어진 선거구 11곳 가운데 10곳에서 패하며 115석에 그쳐, 133석의 한나라당에게 제1당을 내줬다. 한나라당은 이로써 여당의 과반을 저지하고 오히려 원내 과반수에서 4석 모자란 거대야당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회창의 1인 지배체제를 확고하게 굳혔다.

▲ 김대중 전 대통령     © 주간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천년민주당은 김중권-한광옥-한화갑으로 대표로 이어지던 시절엔 그나마 김대중이라는 막강한 힘이 있었으므로 괜찮았다. 하지만 2002년 3월 대선 경선에서 계파 갈등이 극심해지기 시작했다. 비주류였던 노무현이 대선후보로 결정되자 이인제 세력들을 위시로 한 당내 갈등이 심각해진 것이다. 이 당시 2002년 제4회 지방선거에서 수도권에서 참패를 하면서 노무현의 입지는 흔들리고 이에 따라 당내 비주류는 정몽준과 연합, 단일화를 하려고 한 것이다.

2002년 대선이 끝난 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궤를 같이하는 영남 출신 세력과 천신정(천정배·신기남·정동영)으로 대변되는 소장파 세력을 중심으로 하는 호남 신주류세력들은 새천년민주당의 쇄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적당히 부패한 이미지에 호남색이 강해보이는 낡은 민주당으로선 2004년 총선에서 승리하기 어렵다는 것이 명분이었다. 물론 민주당 역시 김대중 대통령이 새정치국민회의의 외연확대와 전국정당화를 위해서 2000년 재창당한 정당이었지만, 대선 때의 혼란과 ‘실용주의’ 노선으로 보수야당 한나라당(현 새누리당)과의 구분점이 희미해진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쇄신론이 불거진 노무현 대통령의 집권 1년차는 집권 여당이 쇄신을 하느냐 마느냐로 입씨름을 벌이던 시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쇄신을 주장하는 천신정 중심의 호남 신주류와 친노 측은 총선 승리를 위해 과감한 재창당을 주장한 반면,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구주류는 이런 재창당 주장이 호남세력을 비토하기 위한 음모라고 규정해 합의점이 도통 나오지 않았다.

중진 의원인 정대철 등이 합의를 계획했으나, 결국 타결 직전 단계에서 박상천·권노갑 등의 보수파들이 “이념이 다르고, 색깔이 다르기에 함께 갈 수 없다”를 내세우면서 합의는 무산되었다. 그리고 막상 떠나려고 보니 과거 대선 국면에서 노무현을 적극적 지지했던 개혁파 조순형, 추미애조차 대북특검 문제 등에서의 문제로 잔류를 선언하면서 잔류자가 70여 명으로 훨씬 더 많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렇게 이른바 ‘개혁신당파’들이 갈라져 나오면서 대한민국 역사상 사실상 최초의 집권 여당 대분열이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떨어져 나온 쪽은 집권 여당으로서 신당 창당을 준비했고 남은 쪽은 민주당의 간판을 고수하며 정통 야당임을 선언했다.

결국 새천년민주당은 반수에 달하는 탈당파가 창당한 열린우리당과 기존의 새천년민주당으로 쪼개졌고, 양 세력은 서로 극단적으로 대립했다. 결국 한때 여당이었던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 자민련과 연합하여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수를 둔 대가로 2004년 17대 총선 때는 겨우 9석 의석을 갖는 데 그쳤다.

극심해진 내분

탄핵 돌풍으로 말미암아 영남을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하면서, 열린우리당은 2004년 4월15일에 열린 17대 총선에서 초기 예상 의석인 70석, 100석을 훌쩍 넘은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문제 많던 전두환 정권 시절에 치러진 1985년 12대 국회의원 총선 이후 최초로 선거로 여대야소를 이루었다. 즉, 민주화 이후 최초의 여대야소 형국이 이시기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성공은 결국 열린우리당에는 큰 불행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미니 정당에서 거대 정당이 돼버리는 바람에 머리는 그대로인데 갑자기 몸만 커진 것같은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더욱이 108명에 달하는 초선의원은 제각기 자기 목소리를 내는 바람에 108번뇌라는 비아냥을 들었고 당의 이념적 노선을 가지고서도 실용이냐 개혁이냐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다. 계파갈등이 극심해진 것이다.

총선에서 승리했지만 유세전 당시 ‘노인 폄훼 발언’으로 입지가 약해진 정동영 의장은 총선 직후 김근태 원내대표와 함께 내각으로 들어갔으며, 최고의원 중 제2위인 신기남 의원이 2대 의장이 되었다(2004년 5월17일). 신기남 의원은 ‘천신정’ 가운데 하나인 당내 주류 개혁파 의원으로 손꼽혔으나, 부친의 일제 경찰 경력이 드러나는 바람에 2004년 8월 의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 뒤를 비록 17대 총선에서는 낙선했지만 한나라당 부총재 출신으로 정치력을 인정받은 이부영 전 의원이 이어받았다.

내각으로 들어간 김근태 원내대표를 대신하여 선출된 천정배 원내대표의 주도로 소위 ‘4대 개혁입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완전 폐지에 대해서 국민적 여론은 손을 들어주지 않았고, 이를 등에 업은 한나라당의 강력한 저지와 ‘당내 갈등’으로 합의한 수정안까지도 통과되지 못하고 결국 2004년 연말 통과가 무산되고 말았다. 결과적으로는 대충 합의를 본 문제 조항 폐지조차도 시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부영 의장과 천정배 원내대표는 개혁입법 통과 실패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 열린우리당은 노무현 탄핵으로 거대정당이 됐지만 계파갈등으로 무너졌다. 사진은 지난 2004년 3월12일 탄핵소추안 가결당시 모습.     © 주간현대
이때부터 당은 내분의 소용돌이에 본격적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혹자는 이미 총선 승리에 도취될 때부터가 기나긴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부영 의장의 뒤를 이은 임채정 의장의 과도기를 거쳐, 정기 전당대회를 통해 문희상 의원이 2005년 4월2일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문희상 의장 체제에서도 열린우리당의 난맥상은 달라지지 않았고, 국민들은 우왕좌왕하는 열린우리당에 점점 실망하기 시작했다. 결국 4월 재보궐선거의 참패로 6석을 잃으며 146석으로 과반을 상실했고, 당내에서 갈등이 빚어지면서 문희상 의장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그 유명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역시 2005년 7~8월 내내 거론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표현대로 ‘한나라당에서 터질 것 같던 폭탄은 당내에서 터졌고’, 열린우리당은 더더욱 극심한 내분과 분열로 빠져들었다.

이어 열린 10월 재보선에서 단 한 석도 얻지 못한 채 참패함으로써 문희상 체제가 붕괴되고, 급기야 열린우리당은 비대위까지 구성하면서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결국 의원들의 토의 끝에 지난 2005년 11월 원만한 조정자 타입인 정세균 원내대표에게 당 의장을 겸하게 하여 위기를 돌파하려 하였다. 하지만 사립학교법 강행처리 이후 당의 지지도는 더욱 폭락하면서 내부의 혼란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붕괴된 짬뽕정당

이후 열린우리당은 2006년에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광역자치단체장으로는 전북도지사만 당선시키는 대굴욕을 겪으면서 당의 존립자체가 흔들리게 된다. 이후 지지율 조사에서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보다도 지지율이 낮은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열린우리당의 간판으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위기감이 확산되었고 한나라당 대권주자인 이명박, 박근혜 후보들의 기세가 갈수록 오르자 한나라당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들을 연합해 2007년 대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리하여 민주당과의 재통합 및 반한나라당 세력들과의 연합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후 무더기 탈당사태로 더 이상 당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대통합신당이라는 이름으로 통합을 추진하게 된다. 대통합신당은 이름 그대로 정동영계(구당권파)+김근태계(재야파)+김한길계+천정배계+기타 당내 세력+한나라당을 탈당한 손학규계+시민단체 세력(미래창조연대)에 열린우리당 잔존세력을 합쳐 다양한 세력들이 통합을 선언한 것이었다. 즉 열린우리당 탈당 세력에 민주당 탈당 세력 일부, 그리고 한나라당에서 쫓겨나다시피한 손학규 세력이 더해진 것이었다.

지리멸렬 계파갈등 서막

결국 3년 9개월 만에 해체돼버린 열린우리당은 지역감정을 뛰어넘은 전국정당을 지향했는데 이것은 17대 총선에서 152석이라는 결과를 얻으며 확실히 달성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과연 열린우리당이 기존 창당목적이었던 지역감정을 뛰어넘었느냐는 점인데 이에 관해서 확실하게 실패라고밖에 볼 수 없다. 도리어 집토끼인 호남과 수도권만 잃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열린우리당이 과반을 확보한 결정적 요인이자 가장 선전한 지역은 충청도 전역이었으나, 이들 상당수는 정권이 끝나고 혼란 끝에 자유선진당에 합류했으며 당내 보수의원이 다수였다.

17대 총선에서 승리한 뒤에도 열린우리당의 내분은 지속되었다. 갑작스럽게 거대해진 152명이라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세력들은 사안마다 충돌하며 계파갈등을 빚은 것이다. 그런 탓에 어떤 정책을 추진하려고 해도 당시 야당이던 한나라당뿐만 아니라 당내에서 더 심하게 갈등이 빚어질 정도였다.

당내 계파로 알려진 세력만 해도 천정배계, 김근태계 등의 재야계인 ‘민주평화국민연대’(민평련)와 신기남계의 ‘신진보연대’가 당내 개혁세력으로 한편이 되고, 이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정동영계의 구 당권파가 김한길계의 ‘바른정치모임’나 ‘안정적 개혁을 위한 모임’ 등의 온건·보수 세력과 손을 잡고 당내 중도 우파 세력으로 한편이 되어 서로 대립했다. 이 사이에 친노(이광재, 서갑원, 유시민 등), 중진 위주의 중진파, 기타 386 세대 개혁의원 등도 나름대로 정치적 지분을 주장하는 형국이었다.

각각 개별 의원의 움직임과 특성을 고려하면 열린우리당은 정말 대혼란 그 자체였다. 의원모임으로 존재했던 계파만 12계파를 넘었고, 큰 계파만 6~7계파였다.

무엇보다 역량 있는 대표의 부재는 결국 당의 혼란이라는 악순환이 계속 이어졌다. 한나라당이 박근혜 당시 대표의 활약 속에 전열을 정비하고 차기 대권에 대비한 것을 생각하면 크게 비교되는 일이었다. 실제로 열린우리당 역대 당의장들은 총 11명으로 46개월, 평균 4개월 5일의 재임기간을 가졌다. 이 때문에 보통은 2년마다 한 번씩 하는 공식 전당대회만 4회를 했다.

결국 개혁이냐 실용이냐를 놓고 당내 싸움만 하는 열린우리당에 실망한 국민들은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그리고 등을 돌려 보니 다른 대안 정당이 없었고 결국 오랜 장기집권과 그에 따른 부패와 무능한 행정력으로 IMF를 불러와 정권을 내줬던 한나라당계 보수정당이 이 시기를 토대로 대부분의 선거에서 승리하는 원동력을 얻게 됐다. 반면 민주계 중도진보 정당은 2015년 현재까지도 선거 때마다 이때부터 징조를 보인 계파정치와 분열 때문에 계속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된다.

kimstory2@naver.com

<무단전재 및 배포금지. 본 기사의 저작권은 <주간현대>에 있습니다.>
※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의 글을 게시하고자 할 경우에는 실명인증 후 등록하셔야 합니다.
실명확인 된 게시물은 실명인증확인 여부가 표시되며, 실명확인 되지 않은 정당·후보자에 대한 지지 또는 반대 게시물은 선관위의 요청 또는 관리자의 판단에 의해 임의로 삭제될 수 있습니다.
※ 본 실명확인 서비스는 선거운동기간(2020.04.02~2020.04.14) 동안에만 제공됩니다.
  • 실명인증
  • ※ 일반 의견은 실명인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 도배방지 이미지
  • ※ 이 댓글에 대한 법적 책임은 작성자에게 귀속됩니다.

광고
광고
광고
포토뉴스
4월 첫째주 주간현대 1137호 헤드라인 뉴스
1/3
광고
광고
많이 본 기사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