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로 목소리 잃은 섬마을 주민으로 변신해 묵직한 울림 선사
무표정한 듯 미세한 표정, 삐뚤빼뚤 글씨체로 극의 몰입도 높여
▲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목소리 없이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낸 배우 이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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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1학년 때 ‘너의 목소리 말고 너를 보여줘’라는 말을 들었다. 언어를 배제한 순간을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었다. 언어에 진심을 담거나 언어의 유희를 즐길 때도 있지만, 아예 없는 순간이 오기를 바라는 배우도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작품으로 그런 순간을 만났다.”
영화 <기생충>으로 스타덤에 오른 배우 이정은이 이번에는 목소리 없이도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영화 <내가 죽던 날>에서 사고로 목소리를 잃은 섬마을 주민으로 변신,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11월9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정은은 “감정을 읽어내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느린 게 좋았다”며 “자극적인 감정에 사람들이 시선이 가지만, 호흡이 느린 작품을 하고 싶었다”고 출연 이유를 밝혔다.
이정은은 이번 작품에서 사라진 소녀를 마지막으로 본 무언의 목격자 ‘순천댁’ 역을 맡아 극의 무게감을 더했다. 무표정하면서도 미세한 표정 변화, 삐뚤빼뚤한 글씨체로 미스터리한 분위기와 함께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목소리를 낼 수 없으니 잘 들으려고 했다. 표정을 따로 생각하진 않았다. 말을 못하니 듣고 있는데 낯선 얼굴이 나와서 나도 신기했다. 감독님도 일부러 뭔가 더 하지 말자고 했고, 편안하게 할 수 있었다. 필체는 시골 어머니들이 쓴 시집의 원본을 구해서 비교해보니 공통의 필체가 있더라. 오른손으로는 예쁘게 써져서 왼손으로 연습을 했다.”
이정은은 목격자인 순천댁을 속내를 알 수 없는 이로 표현했다.
“이번 영화는 형사물처럼 보이지만 휴먼 드라마이기 때문에 극단적인 부분들은 빼고 자연스럽게 감정이 흐르게 했다. 앞부분에 모호하게 보이도록 연기했는데, 적절히 조화된 것 같다. 내가 역할을 잘 풀었다기보다는 이 사람이 가진 손바닥의 굳은살과 세월을 감당한 얼굴이 표현해준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얼굴에 더 주름이 있고 진중해 보이는 배우가 했다면 더 잘 어울렸을 것 같다고 아쉬움도 표했다. “해안가에 사는 어머니들이 주는 느낌이 있다. 통통한 얼굴에 주름을 만들 수도 없고, 분장을 더 해야 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연기를 했지만 아쉽더라.”
이정은은 이번 영화에서 호흡을 함께 맞춘 김혜수에 대해 “멋진 배우”라고 극찬했다.
“오래전부터 관심이 많았다. 좋아하는 혜수씨가 한다고 해서 과감하게 택했다. 촬영장에서 처음 혜수씨가 찍은 걸 봤는데 화장기 없는 얼굴이 너무 매력적이고 좋았다. 그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의 파장이 있다. 선착장에서 함께한 장면은 현실같았다. 주변이 사라지고 오로지 우리 둘이 낯선 소음의 바닷가에 있는 기분이 들었는데 정말 좋았다.”
이정은은 김혜수를 ‘여신’으로 부르며 환하게 웃었고, 김혜수 덕분에 데뷔한 사람도 많다며 ‘농사꾼’이라고도 했다.
“좋은 연기를 하면 주변에 추천해줬다고 한다. 그냥 떠 있는 스타가 아니라 작품에 필요한 배우들을 일궈내는 농사꾼 같다. 나도 기회가 되면 척박한 환경의 연극배우들에게 힘이 되고 싶다. 난는 연극배우인 걸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무대에서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 경력이 단절되는 상황에 놓인 배우들이 꿈을 잃지 않게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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