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화가들이 탐닉한 정원 이야기

거장들이 그려낸 계절의 얼굴은, 바로 정원!

김보미 기자 | 기사입력 2020/08/14 [15:17]

위대한 화가들이 탐닉한 정원 이야기

거장들이 그려낸 계절의 얼굴은, 바로 정원!

김보미 기자 | 입력 : 2020/08/14 [15:17]

르누아르, 세잔, 살바도르 달리, 프리다 칼로를 비롯한 전 세계 위대한 화가들이 직접 가꾼 정원 이야기를 엿들을 수 있다면? 걸출했던 거장들의 정원은 여전히 남아 있으며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 화가들은 꽃과 채소, 과일을 기르는 소박하고 단순한 행위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들의 손길이 닿은 화단과 텃밭, 올리브나무 숲, 포도밭을 살펴보면 작품을 감상하는 것 이상으로 화가의 삶과 예술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사실 20세기 중반, 화가이자 정원사로서의 삶은 수많은 화가가 선망하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정원은 정물화의 소재와 달리 매번 새로운 시선과 느낌으로 담아낼 수 있는 소재다. 화가들은 정원이라는 모티프를 반복해서 그리면서 화법을 다듬고 완성해나갔다. 그래서 정원은, 예술 사조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화가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뮤즈가 되어왔다. 정원을 들여다보면 화가들의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굴곡진 그들의 삶도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국의 작가 재키 베넷의 책 <화가들의 정원>(샘터)을 밑자락으로 삼아 화가들의 비밀 공간으로 들어가보자.

 


 

모네·르누아르·세잔이 사랑했던 정원을 보면 예술세계 보여
정원 그리면서 화법 다듬고 완성…정원은 시들지 않는 뮤즈

 

▲ 야외 작업을 고수했던 모네가 아네 카미유와 아들 장을 그린 ‘파라솔을 든 여인’. 

 

프랑스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70km 떨어져 있는, 센 강변의 한적한 도시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정원에서 모네는 수백 점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고흐는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아를르의 작은 정원에서 한 해 동안에만 150점이 넘는 작품을 완성했다.


“실내 작업을 기반으로 한 기존의 관습을 깨부수고 캔버스를 야외로 이동시킨 인상주의. 그 정점에는 클로드 모네라는 대가가 있었다. 화가들의 정원과 예술을 나란히 두고 이야기하게 된 것도 정원을 예술 세계의 중심에 두었던 모네의 역할이 컸다. 인상파 화가들은 교외 정원의 장미와 뜰, 텃밭을 즐겨 그렸고 정원을 만드는 과정에 몰두했던 모네는 아름다운 지베르니의 정원을 남겼다.”


이렇듯 정원은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들의 정치적 위기나 고난의 시기에 휴식과 성장, 안식처가 되기도 했다.

 

▲ 인상파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Claude Monet)가 머물며 명화를 탄생시킨 파리 근교 마을 지베르니 풍경.  


1930년대 후반 멕시코시티에서 살아간 프리다 칼로에게 ‘푸른집’ 정원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그녀의 삶과 예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추방당한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에게도 푸른집의 정원은 피난처가 되었다.


잉글랜드의 평온한 마을 서식스 찰스턴의 정원은 예술가들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이었을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의 징집을 피하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정원은 예술 사조와 시대를 막론하고 수많은 화가에게 영원히 시들지 않는 뮤즈가 되어왔다. 정원을 들여다보면 화가들의 작품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굴곡진 그들의 삶도 오롯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은 1800년대 중반이 되어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은 몇몇 예술가들의 천재성이 아닌, 기술 발달에 기대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유럽의 옛 거장들은 아무리 뛰어난 화가라도 꽃을 제대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았다. 꽃을 꺾어 꽃병에 꽂거나 모델의 손에 들려야만 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기에 들어서 스케치 정도는 야외에서도 가능했지만, 캔버스나 목판에 물감을 칠하는 작업은 여전히 실내에서만 가능했다. 광물 안료를 손으로 갈아 오일과 혼합하여 물감을 만드는 과정은 지저분한 데다 꽤 위험하기까지 해서, 19세기 이전 작업실의 모습은 화학 실험실에 가까웠다.


유화 물감을 보관할 수 있는 말랑말랑한 튜브가 미국의 한 초상화가의 손에서 탄생했고 도약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물감의 발명으로 자연 풍경과 정원을 그리는 화가들은 야외에서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이 변화했다.


야외 작업을 의미하는 ‘앙 플랭 에르(En Plein Air)’는 ‘인상주의’ 운동과 동의어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인상파 화가들은 대표적인 정원사이자 화가로서 그림과 정원 가꾸기를 결합했다. ‘인상파’라는 단어는 맨 처음 조롱의 의미로 시작되었으나 19세기와 20세기 초반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닌 예술운동이 되어 독일과 스페인,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까지 퍼져나갔다. 인상파 화가들이 공유한 것은 야외 작업에 대한 열정뿐만 아니라 그림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과 태도였다.


“꽃에는 아름다움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완전히 다른 아름다움이 있다.”-마리아 오키 듀잉.

 

삶의 터전이자 예술적 유산


영국의 전업작가 재키 베넷은 <화가들의 정원> 전반부에서는 혼자 독립적으로 활동했던 화가들을, 후반부에는 다른 화가들과 함께 ‘화가 마을’을 이루며 하나의 예술 사조를 형성하기도 했던 그룹을 소개한다. 독립적이든, 그룹을 이루었든 집과 정원이 가진 ‘장소성’은 그 자체로 삶의 터전이자 예술적 기반이 되었다.


엑상프로방스에서 태어난 폴 세잔은 프랑스 남서부의 바위 언덕과 소나무 숲을 노닐며 자랐다. 엑상프로방스의 자연은 세잔의 삶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살아가는 내내 작품 활동의 영감이 되었다. 세잔은 “자연은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절대 빼앗길 수 없다”는 말도 남겼다.


그렇기에 “세잔은 1902년 레 로브의 작업실에서 작업 활동을 시작했다. 만나는 모두에게 도심에서보다 작업이 훨씬 순조롭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매일 아침 6시 30분에 불레공(Boulegon)가에 있는 집에서 나와 레 로브까지 걸어갔고 집에 돌아와서는 밥을 먹거나 잠만 잤다. 세잔은 뜰에 있는 과일나무 중 오래된 올리브나무 한 그루를 유독 아꼈고 집을 짓는 동안 나무가 다치지 않도록 낮은 담을 둘러주었다. 이 나무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세잔은 나무를 매만지고 나무에 말을 걸기도 했다. 세잔은 마치 오랜 친구처럼 여긴 이 나무 밑에 묻히기를 원했다.”


“말년의 세잔은 쇠약해져 정원 일은 할 수 없었지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정원의 풍경과 조용한 생활을 즐겼다. 올리브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돌보기 위해 정원사 발리에(Vallier)를 고용했고 그는 세잔의 걸작 중 하나인 초상화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말년에 쓴 편지들을 보면 발리에의 초상화가 너무 더디게 그려져 세잔이 괴로워했음을 알 수 있다. 발리에도 이어 여러 번의 초상화 작업으로 앉아 있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자 원래 자기 일을 할 시간이 부족하다며 불평했다고 한다.

 

1906년 10월 정원에서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주르당의 작은 집(Jourdan’s Cabin)〉을 작업한 것이 세잔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 세잔은 비바람을 맞고 의식을 잃은 채 집으로 실려 왔다. 다음 날 아침 상태가 좋지는 않았지만 작업실까지 걸어온 세잔은 라임 나무 아래 앉아 발리에의 초상화 작업을 했다. 그리고 며칠 뒤 흉막염으로 숨을 거두었다.”


파리 샹파뉴 지역의 ‘에수아’에서 경험한 소박한 시골 생활은 르누아르의 삶과 예술의 근간이 되었다. 르누아르는 과학의 진보를 경계하고 자연의 흐름을 따라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사랑했다.


“르누아르는 몸이 점점 더 불편해지는 중에도 계속해서 회화 기법을 발전시켰고 2차원인 자신의 작품을 3차원 형태로 표현하고 싶어 했다. 처음으로 청동을 비롯한 여러 재료를 다룰 수 있는 기회가 생겼지만 당시 손 변형이 심각해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지 않게 붕대를 감아야 할 정도였다. 신체적으로는 작업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카탈로니아(Catalonia) 출신의 젊은 조각가 리샤르 기노(Richard Guino)와 함께 작업하여 아래층 테라스에 세운 〈승리의 비너스Venus Victrix〉를 비롯한 37점의 조소 작품을 만들었다.”


스페인의 위대한 화가 호아킨 소로야는 ‘빛의 대가’라는 명성답게 생동하는 정원과 해변의 풍경에 매료되어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해 질 녘의 분위기에 사로잡힌 르 시다네르는 오래된 헛간을 개조해 만든 작업실에서 집 안과 밖의 대조적인 분위기를 실험적으로 그려냈다.


21세기에 들어서 전 세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던 프리다 칼로는 전통적인 수채화부터 초현실주의 걸작까지 다양한 작품을 남겼는데 의상과 집, 정원, 수집한 민속 예술품들로 자신의 내면을 화려하고 담대하게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널리 인정받지 못했다. 첫 단독 전시회도 그녀가 죽기 1년 전인 1953년 멕시코에서 개최되었다. 이후 칼로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고 21세기에 들어서며 멕시코를 넘어 전 세계에서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다.

 

푸른집에는 칼로가 숨을 거두기 바로 전에 작업한 선명한 색의 수박 정물화 한 점이 있는데 서명과 함께 ‘삶이여 영원하라(Viva la vida)’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47세에 세상을 떠나야 했던 프리다 칼로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마주하면서도 끝내 멈추지 않았던, 세상과 자연을 향한 열정이 이 한 줄에 담겨 있다.”


독특한 예술성으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천재, 달리는 그가 생의 대부분을 보냈던 스페인의 포르트리가트라는 지역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예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한편 화가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꾸려가고 예술을 창조할 자유를 찾아 모여들고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내내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화가 마을이 생겨났다. 화가들의 집과 정원은 그들에게 만남의 장소이자 그 자체로 예술 작품이 되었다.


수많은 명화를 탄생시킨 비밀의 공간, 정원. 위대한 화가들이 직접 만들고 살아간 집과 정원에서 우리는 예술과 생에 대한 결코 시들지 않는 열망을 발견할 수 있다. 정원이 영원히 그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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