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8]

주원장을 황제 만든 마태후는 진정한 ‘내조의 여왕’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0/07/24 [11:11]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8]

주원장을 황제 만든 마태후는 진정한 ‘내조의 여왕’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입력 : 2020/07/24 [11:11]

행실 고상하고 아름다워 수많은 미담…아내의 內助로는 至尊
지혜로운 마태후 없었다면 주원장은 명나라 황제 못 됐을 것

 

주원장의 국가통치 보필하면서 시종일관 고귀한 국모로 한몫
아무리 가난해도 품위를 잃지 않고 중국의 전통적 이상 구현

 

▲ 마태후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이야기를 그린 중국 드라마 ‘대각 마황후’ 한 장면.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황제는 당연히 남자여야 한다. 하지만 중국의 봉건왕조 역사에서 여자가, 정치를 했던 왕조는 적지 않았다. 측천무후(則天武后)나 여후(呂后), 자희태후(慈禧太后)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황제가 어리다는 이유로 수렴청정(垂簾聽政)한 태후나 황태후가 수십 명에 달한다. 편견을 배제하고 이들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평가한다면, 이들 가운데 몇 명은 남편이나 자식, 손자를 도와 출세시킨 인재로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역사에서 황제를 가장 잘 도왔던 여성을 들자면 당연히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 1328~1398, 재위 1368~1398)의 부인 마(馬)태후(본명, 마수영(馬秀英)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마태후는 평생 행실이 고상하고 아름다워 수많은 미담을 남기고 있고, 뛰어난 지혜를 발휘하여 주원장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마태후가 없었다면 주원장은 명나라의 개국 황제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주원장과 마수영의 혼인


시중(侍中)이었던 주원장은 한때 중이 되었다가 생활이 곤궁해 원에 반기를 들고 기의한 곽자흥(郭子興, 원나라 말기 홍건군(紅巾軍)의 장수)의 군대로 들어갔다. 이때 곽자흥은 주원장의 기백이 범상치 않고 외모가 출중한 것을 보고는 그를 중용했다. 지모와 용기를 겸비한 주원장이 작전마다 승리로 이끌자, 곽자흥은 더욱 그를 신임하여 부인 장씨에게도 그의 무공을 자랑했다. 장씨가 말했다.


“장차 큰일을 이룰 인물이 틀림없으니 잘 후대해서 언젠가는 장군의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하세요.”


곽자흥이 이미 그를 대장으로 임명했다고 말하자 장씨가 한마디 덧붙였다.


“제 생각엔 그것으로는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의 나이가 이미 스물여섯인데 아직 가정을 꾸리지 못했으니 수양딸 마씨를 배필로 맺어주는 게 어떨까요? 주원장으로 하여 충성을 다하게 하는 동시에 사위로 삼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아니겠어요?”


마씨는 곽자흥의 양녀였다. 곽자흥이 아주 미천하던 시절 숙주 신풍의 부호인 마공(馬公)과 친교를 맺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인정이 많고 정의감이 투철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도와왔다. 이런 생활이 오래 되다 보니 가업이 쇠락했고 부인은 딸 하나를 남겨두고 일찌감치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던 중 마공이 원수를 갚기 위해 사람을 죽이고 도망하면서 딸을 곽자흥의 집에 맡겼다. 얼마 후 마공이 타향에서 객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곽자흥은 마씨를 수양딸로 삼았다.


마공의 딸은 예쁘고 총명하여 양부가 글을 가르치고 양모가 침선을 가르처 못하는, 일이 없는 훌륭한 규수로 성장했다. 열여섯의 어린 나이임에도 현명하고 성실한 데다 외모 또한 아름다웠다. 마씨도 일찍이 주원장의 이름을 자주 들어 그 사람 됨됨이를 잘 알고 있었고, 두 사람이 서로 존경하고 사모하고 있었기 때문에 혼인은 순조롭게 성사되었다.


주원장이 곽자흥의 사위가 된 직후에 진무(鎭撫)로 승급하고 혁혁한 무공을 세우면서 모두들 그를 주공자로 존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주원장의 위세가 나날이 커가자 곽자흥의 두 아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주원장이 자신들에게 호형호제하자 불만은 더욱 커졌다. 두 형제는 부친 곽자흥에게 주원장을 비방하기를 서슴지 않았다.

 

곽자흥은 처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나 비방이 계속되자 점차 마음이 흔들렸다. 곽자흥은 사리 분별이 흐리고 귀가 얇은 위인이었다.


결국, 곽자흥은 주원장이 자신의 권력을 가로챌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게 되었다. 때마침 군사 회의에서 주원장과 의견이 대립하자 그럴 듯한 구실로 그를 잡아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아들은 주원장을 제거할 기회가 왔다고 내심 좋아하고는 간수에게 밥을 들이지 못하게 지시하여 그를 아사 시키려 했다.


주원장이 집에 돌아오지 않자 부인 마씨는 은밀히 사정을 알아보았다. 남편이 갇힌 채 밥도 못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안 마씨는 몰래 부엌에 들어가 갓 쪄낸 떡을 주원장에게 갖다주려 했다. 그런데 막 문을 나서는 순간 양모인 장씨와 맞닥뜨리자 떡을 얼른 품속에 감추었다. 살을 데는 고통을 참고 짐짓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장씨가 꼬치꼬치 캐어묻는 바람에 마씨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녀는 품속의 떡을 꺼내놓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녀의 가슴은 이미 빨갛게 화상을 입은 뒤였다.

 

사정을 알게 된 부인 장씨가 곽자흥에게 달려가 항의하자, 곽자흥도 주원장을 가둔 것이 지나친 행동이었음을 깨닫고, 그를 풀어주었다. 주원장은 아내 마씨의 행동을 알고는 크게 감동했고 더욱더 아내를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인자한 성품, 뛰어난 지모


서기 1353년, 곽자흥은 팽대(彭大)와 조균(趙均) 등 두 장군으로부터 배척당해 저주로 밀려나게 되었다. 특히 조균은 계속 곽자흥을 공격하면서 주원장을 매수하여 자신의 오른팔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주원장 등은 곽자흥을 저주왕으로 추대하고 현지의 모든 군마를 주원장의 수하로 집결시켰다.

 

하지만 한 달이 못 돼 곽자흥이 주원장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이자, 주위에 있던 장수들이 전부 곽자흥의 수하로 돌아갔다. 주원장의 기실(記室)이었던 이선장(李善長)마저 곽자흥에게 발탁되어 가자 주원장만 외톨이가 되었다. 이처럼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주원장은 그저 놀랍고 두려울 뿐이었다.


주원장의 부대가 간신히 저양을 사수하고 있을 때,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은 그가 병력을 유지하고 있을 뿐 전투에 나가도 전혀 싸우지 않는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다. 곽자흥은 주원장의 수하에 있는 유능한 장수들을 전부 자신의 부대로 이동시킴으로써 주원장의 병권을 약화하는 동시에 주원장을 몹시 냉대했다. 전투가 벌어져도 주원장과 작전을 상의하지 않았다.


한번은 주원장이 저양 외각에 진을 친 적의 군사를 완전히 몰아내고 곽자흥에게 가서 승전을 보고했으나 그는 냉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몹시 기분이 상한 주원장은 집으로 돌아와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이 모습을 본, 부인 마씨가 상냥한 얼굴로 물었다.


“장군께서는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셨는데 어째서 수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계십니까? 무슨 마음 불편한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당신이 내 속사정을 어떻게 알겠소?”


“양부께서 또 장군을 냉대하신 모양이군요!“


아내의 말에 주원장의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당신이 사정을 알아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소!”


“양부께서 당신을 왜 그렇게 대하시는지 아세요?”


“전에는 내 전권이 두려워서 그러셨지만, 지금은 이미 내 병권이 축소된 상태요. 지금은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고 의심하고 있는 것 같소. 하지만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왔는데도 여전히 날 냉대하고 있소. 이젠 왜 그러시는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방법도 모르겠소.”


마씨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출정 나갔다 돌아올 때마다 양부께 선물을 갖다 드렸나요?”


“선물은 한 번도 갖다 드린 적이 없소.”


“다른 장수들은 나갔다 올 때마다 선물을 바치고 있다는 걸 모르세요? 왜 장군께선 다른 사람들처럼 하시지 않습니까?“

 

“그들은 싸움에 나설 때마다 노략질을,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런 짓을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선물을 준비한단 말이오! 적에게서 빼앗은 물건들은 전부 부하들에게 나눠주는데, 주군께 뭘 바친단 말이오?”


“민생을 보살피고 장병들을 위로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건 양부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요. 하지만 다른 장수들은 전부 선물을 가져오는데 장군만 빈손으로 돌아오시니, 혹시 장군께서 사사로이 재물을 챙기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시는 겁니다. 제게 양부의 의심을 풀어드릴 좋은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 있다면 어서 말해보구려.”


“제가 모아놓은 재물이 좀 있으니 이걸 양모께 드리면서 속사정을 양부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할게요. 틀림없이 양부께서 좋아하시고 더 이상 당신을 다른 눈으로 보지 않으실 거예요.”


주원장은 억울한 생각이 들어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지만, 아내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다음날 부인 마씨는 그동안 모아놓은 귀중한 장식품들을 장씨에게 갖다 바치면서 주원장이 양부와 양모에게 효성의 마음으로 마련한 작은 선물이라고 말했다. 장씨가 몹시 기뻐하면서 이를 곽자흥에게 알리자, 곽자흥도 금세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주원장에게 이런 효심이 있는 줄 모르고 공연히 그를 의심했었구먼!”


이때부터, 곽자흥은 주원장에 대한 의심을 풀고 싸움에 나갈 때마다 항상 주원장과 상의하기 시작했다. 장인과 사위의 관계도 좋아져 저양의 성은 더욱 공고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곽자흥의 두 아들은 여전히 그를 제거할 틈만 노리고 있었다. 어느 날 곽자흥의 두 아들이 주원장을 술자리에 초대하자 부인 마씨가 당부했다.


“그들은 여러 번 장군을 해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번에도 방심하지 마시고 그들이 주는 술은 절대 드시지 마세요.”


부인 마씨의 조언에 따라 주원장은 계책을 마련했다. 곽씨 형제들을 따라 길을 가던 주원장은 갑자기 말에서 뛰어내려 하늘을 향해 뭔가를 중얼거리더니 잠시 후에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다시 말에 오른 다음 말머리를 돌려 왔던 길을 쏜살같이 달렸다. 곽씨 형제가 뒤따라오면서 그를 불러대자 주원장은 고개를 돌려 소리쳤다.


“난 그대들과 어울릴 수 없소. 그대들이 대체 무슨 이유로 날 해치려 드는지 모르겠지만 방금 천신께서 그대들이 술에 독을 풀어 날 죽이려 한다고 알려주셨소. 나는 천신의 명령에 따라 돌아가는 것이오.”


이 말에 놀란 곽씨 형제는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술에 독을 탄 사실은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정말 천신께서 그를 돕고 있다는 말인가?”

 

이때부터 두 사람은 감히 주원장을 해칠 마음을 먹지 못했고 곽자흥의 앞에서도 더 주원장을 헐뜯지 못했다.


얼마 후 곽자흥이 죽자 자연스럽게 주원장이 그의 자리를 이었고, 부인 마씨는 그의 중요한 참모가 되었다. 주원장은 전장에 나갈 때마다 중요한 문서들을 전부 마씨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 인자한 성품과 뛰어난 지모를 갖춘 마씨는 문사(文史)를 좋아하여 주원장이 맡기는 문서들을 빈틈없이 처리하고 보관했다.

 

마태후의 현덕


서기 1355년, 주원장은 병력을 이끌고 화양에서 강을 건너 태평을 공격했다. 마씨는 화양이 비게 될 경우, 원나라 군사가 쳐들어올 것이라, 예측하고 기의군 가족들을 전부 대피시켰다. 과연 마씨의 예측대로 대피하자마자 원군이 화양을 공격했다.


1360년, 주원장은 남경에서 진우량(陳友諒)과 일대 전투를 치렀다. 진우량의 병력이 크게 우세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기 힘든 싸움이라고 생각했다. 성안 사람들도 불안을 감추지 못해 땅을 파고 금과 은을 묻어두기도 했다.

 

그러나 마씨는 자신의 금붙이를 병사들에게 나눠주며 사기를 북돋았다.그 결과 주원장은 진우량을 대파하는 대승을 거두고 ‘대한(大漢)’ 정권을 세웠다. 1367년, 주원장은 소주를 장악하고 장사성(張士誠)을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군웅을 평정한 주원장은 1368년에 마침내 중원을 통일하고 명의 개국 황제가 되었고, 부인 마씨를 황후로 봉했다.


마태후는 주원장이 남북 정벌전을 수행하는 동안 온갖 어려움을 함께했고 수시로 군무에 참여했다. 틈날 때마다 부녀자들과 함께 군복을 제작하고 부상병을 돌보는 등 적지 않은 공로를 세웠다. 아녀자로서 이처럼 훌륭한 모범을 보인 그녀가 개국 후에 보여준 모습은 더 놀라웠다.


주원장은 마씨를 황후로 봉하고 아내에 대해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밝혔다.


“짐이 평민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는 밖으로는 공신들의 노고가 있었고 안으로는 현명한 부인의 조력이 있었기 때문이오. 부인은 짐을 위해 문서를 처리했고 친히 종군하면서 온갖 어려움을 함께해주었소. 옛말에 집안엔 좋은 아내가 있고 나라엔 훌륭한 재상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짐의 처지를 보니 헛된 말이 아니구려.”


마씨가 겸손하게 말을 받았다.


“부부관계는 지키기 어렵지 않지만, 군신 관계는 지키기가 매우 어렵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처와 함께했던 가난한 시절과 신하들과 함께했던 어려운 시절을 잊지 마십시오.”


주원장은 마태후를 당대의 장손황후(長孫皇后)에 비유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를 과찬이라고 일축했다. 또 주원장이 그녀의 친척들에게 관직과 봉록을 주려고 하자 사사로운 인사와 행상으로 황제의 위정에 오명을 남겨선 안 된다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주원장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그녀의 부모를 위한 묘당을 건립하고 일년 사시 제사를 올렸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 보기 드문 미담이다.


마태후는 자녀들에게도 매우 엄격하여 자식들이 화화공자(花花公子)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옛날의 고난을 잊지 않도록 철저히 교육했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막내아들 주시(朱施)가 주왕(周王)으로 책봉되었을 때, 그녀는 부모 곁을 떠난 아들이 방종할 것을 걱정하여 특별히 강귀비(江貴妃)를 동행시켜 감시하게 했다.


꼭 필요한 일에는 인색함이 없었다. 주원장의 태학(太學) 시찰에 동행한 그녀는 태학생 가족들의 생계를 걱정하고는 홍판창(紅板倉)을 설립하여 가난한 학생 가족들을 돕게 함으로써 태학생들이 마음 놓고 학문에 전념하도록 했다.


명나라 초기 때 일어난 재상 호유용(胡惟庸)의 모반 사건은 명 왕조 최대의 사건 가운데 하나로, 연루 범위도 중국 역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큰 규모였다. 유명한 문학가이자 홍무조 대학사이며 태자 주표(朱標)의 스승이었던 송렴(宋濂)은 이미 은퇴하여 경사에서 천 리나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도 손자 송신(宋愼)이 호유용의 모반에 연루되자 도성으로 압송되어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마태후는 황급히 주원장에게 달려가 말했다.


“듣자 하니 폐하께서 송학사를 처형하려 하신다는데,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장손인 송신의 모반 사실을 알고도 알리지 않았으니 이는 대역죄에 해당하오. 법률에 따르자면 구족을 멸해야 마땅하오.”


마태후는 송렴이 이미 은퇴한 몸으로 정치에 전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사면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주원장의 태도는 단호했다. 며칠 후 주원장은 식사하다가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황후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서 그 이유를 물었다.


“송학사는 40년 동안이나 황상을 보필했던 분으로 덕망이 높아 사해가 다 그를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지금 고희가 넘은 그분의 몸에 무고하게 형구를 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너무나 잔인하고 슬픈 일이지요.”


이 말에 마음이 움직인 주원장은 그의 사형을 면하고 무주로 유배 보내는 것으로 형벌을 대신했다.


‘토끼를 잡은 후에는 개를 삶아 먹고, 새가 떨어지면 양궁을 감추며 적국을 멸한 다음에는 모신을 죽인다’라는 말이 있다. 마태후가 나서서 이런 비극을 막고 공신들을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주원장도 옛사람들의 전철을 반복했을 것이다.

 

고귀한 국모 형상


황후가 된 지 15년째 되던 홍무 15년(1382), 마태후가 중병에 걸려 백방이 무효한 채 의관들이 대거 문책을 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러자 마태후가 평온한 얼굴로 주원장에게 말했다.


“생사는 천명으로 정해진 것입니다. 세상에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 있다 하더라도 죽을 목숨을 살리진 못하는 법이지요. 약이 효과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의원들을 문책하시는 것은 곧 저를 괴롭히시는 일입니다.”


이처럼 온화하고 자애로운 태도에 주원장은 물론 모든 신하들이 크게 감복했다. 주원장이 마지막 유언을 묻자 마태후가 말했다.


“평민에서 국모가 되었는데 무얼 더 바라겠습니까? 다만 제가 죽더라도 현신들의 간언 듣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이런 마태후가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민간에서 조정에 이르기까지 온 나라가 오열했다. 홍무 15년 9월, 효릉 장례를 진행할 때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면서 한동안 뇌성벽력이 쳤다. 주원장은 이를 몹시 불길한 징조로 여기며 두려움에 떨었다. 이때 장례를 주관하던 승려가 큰소리로 노래했다.


雨落天垂漏 雷鳴地擧哀
西方諸佛子 同送馬如來
쏟아지는 비는 하늘의 눈물이요 뇌성은 온 땅의 울음소리로다.
서방의 모든, 부처들이 함께 마 여래를 떠나보내는구나.


주원장은 이 노랫소리를 듣고서 비로소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마태후가 세상을 떠난 후 궁중에는 그녀를 기리는 노래들이 그치지 않았다.


흔히 역사에는 황제는 대부분 잔인하고 포악하며 후궁은 하나같이 분란을 일으키곤 했다. 특히 후궁이나 황후들은 현명한 품성으로 통치자를 보필하기보다 정사를 어지럽히고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때문에 마태후의 현덕은 더 눈부신 빛을 발하는 것이다.


마태후가 주원장의 천하통일과 국가 통치를 보필하면서 시종일관 보여준 아름다움은 정말 고귀한 국모의 형상이 아닐 수 없다. 그녀는 아무리 가난해도 품위를 잃지 않고 아무리 부귀해도 교만하지 않은 중국의 전통적인 이상을 구현한 인물이었다. 장례를 진행하던 승려가 그녀를 고난에서 사람을 구하는 ‘여래’로 칭한 것도 결코 지나친 과장은 아닐 것이다.


j64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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