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6]

여치는 황제 칭호 없었으나 중국을 통치한 최초의 황후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0/07/10 [12:08]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6]

여치는 황제 칭호 없었으나 중국을 통치한 최초의 황후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입력 : 2020/07/10 [12:08]

남편 유방 숨진 후 연적 ‘척희’를 노비로 내몰고 잔인하게 죽여
아들 유영 즉위했으나 나약…모친 살육에 충격 우울증으로 사망
친아들 죽자 궁녀의 소생을 황제로 앉혀…섭정 기회로 권력 장악

 

연적 척희와 정적 한신·소하 잔인무도하게 죽여 조정 대신에 경고
강약 조절하여 주도면밀하게 위엄과 명망 세우고 신하들 복종시켜
여치의 성공비결은 남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능란한 기지와 잔인함

 

▲ 패왕 항우와 큰 그릇을 자랑하던 유방, 그리고 믿음직스러운 부하 한신. 세 남자는 의기투합하여 백성들에게 패악을 부리던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평화를 되찾는다. 사진은 영화 ‘초한지: 영웅의 부활’ 한 장면. 

 

유방이 죽은 후 태자 유영(劉盈)이 즉위하여 혜제(惠帝)가 되었고 유영의 모친인 여치(呂雉)가 대권을 장악했다. 그녀는 유씨 황실의 세력을 더욱 배척했을 뿐만 아니라, 눈엣가시였던 유방의 애첩 척희(戚姬)를 냉궁(冷宮, 버림받은 왕비가 머무르는 처소)으로 몰아내었다.


여치는 사람을 시켜 척희의 머리를 자르게 하고 목을 쇠줄로 묶어놓았다. 또 궁궐에서 입던 옷을 벗기고 평민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러고는 우리에 가두어 일어나지도 못하게 하고 종일 쌀을 찧는 노동을 하게 했다. 한 번도 쌀을 찧어본 적이 없는 척희는 슬피 울며 쌀을 찧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면서 쌀을 찧는 노래 ‘용가’를 지어 불렀다.


아들은 왕이 되었고, 어미는 포로가 되었네.
하루종일 쌀을 찧다가 죽어 가리라.
3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누가 너에게 알려주리오.

 

척희에 대한 질투와 복수


여치가 이 사실을 알고는 미친 듯이 화를 내며 욕했다.

“비천한 노비가 어찌 감히 아들에게 의지하는가?”


기원전 194년 여치는 사람을 시켜 척희의 아들인 조은왕(趙隱王) 여의(如意)를 독살한 후 척희도 잔인무도하게 죽였다.

 

여치는 먼저 그녀의 손가락과 발가락을 자르고 가슴을 베어낸 후 두 눈을 도려냈으며 두 귀도 멀게 했다. 그리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마시게 한 후 변소에 처넣었다. 여치는 척희에게 ‘인간돼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며칠이 지난 후 여치는 혜제를 불러내어 척희를 보여주었다. 혜제가 저게 무엇이냐고 묻자 어떤 사람이 그에게 그것은 바로 척희라고 알려주었다. 다음 날 척희는 죽고 말았다.


혜제는 척희가 죽은 것을 보고는 궁으로 돌아와 울음을 그치지 않았고 병이 생겨 1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는 여치에게 말을 전했다.


“척희를 그런 지경으로 만든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당신의 아들로서 천하를 다스릴 수가 없다.”


이때부터 혜제는 술을 마시고 방탕해지기 시작했으며 조정을 돌보지 않았고 폐인이 되어갔다. 기원전 188년에 혜제는 우울증으로 사망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여인의 질투는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라고 했다. 여치의 척희에 대한 질투와 복수는 이 세상에서는 참으로 보기 드문 일이다. 여치는 같은 여자를 상대할 때도 이처럼 잔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성을 상대할 때 역시 인정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한나라 초기에 천하는 안정되었지만, 인심은 아직 통일되지 않고 있었다. 특히 강력한 군대를 손에 쥔 몇몇 장수들이 천하를 차지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유방은 이를 각별 조심했다. 유방은 자신을 배반한 장수 진희를 정벌하러 갈 때 궁정 안의 일을 여치에게 위임하고 궁 밖의 일은 소하에게 맡기고 나서야 비로소 안심하고 떠났다.


여치는 야심이 강해서, 누군가가 권위를 세우고 대권을 잡기 위해 세력을 키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유방은 개국공신 한신이 모반할까, 의심하여 그를 강등시켜 장안에 머물게 했다. 그러자 한신의 심부름꾼인 란설(欒說)이 동생을 시켜 한신과 진희가 함께 모반하기로 약속한 편지를 가져오게 했다. 한신이 야음을 틈타 죄수들을 풀어 황태자를 습격하기로 진희와 모의했다는 내용이었다.


여치는 그 편지를 보고는 소하와 상의하여 한신을 몰래 죽이기로 약속했다. 여치는 자신의 군사를 장안에 잠복시켜 북쪽으로 돌아 다시 장안으로 들어가게 하고는 유방이 급히 오라고 해서 왔으며 이미 진희의 반란을 평정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하게 했다. 신하들은 이것이 거짓인 줄도 모르고 모두 궁에 들어와 축하했다.


여치의 속셈은 한신을 속여 그를 궁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으나, 한신은 오지 않았다. 여치는 소하를 시켜 한신의 집으로 가보도록 했다. 한신은 할 수 없이 소하를 만나야 했고 병을 핑계 댈 수도 없었다. 결국, 한신은 소하를 따라 궁으로 가게 되었다. 여치가 진희의 반란을 평정한 것에 대해 축하하라고 했으나 끝내 한신은 축하하지 않았고 결국 군사들에게 결박당했다. 한신은 상황이 불리해지자 급히 친구 소하를 불러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소하는 숨어버린 지 오래여서 보이지 않았다.


무사들이 한신을 여치 앞에 데려갔다. 여치는 란설이 보내온 편지를 모반의 증거로 삼았다. 한신은 당연히 이에 승복하지 않았다. 여치가 말했다.


“지금 황제의 조서를 받았다. 진희는 이미 붙잡혔고 네가 주모한 것을 자백했다. 너의 식객 또한 모반의 서신이 있는 것을 알려 왔으니 증거가 확실하다.”


한신은 다시 변명하려 했다. 그러나 여치는 꿈자리가 사나울까 두려워 한신의 목을 자르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일등 공신이며 개국에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이 여치의 칼 아래서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개국공신 죽여 서늘한 경고


애초에 소하는 유방이 등용하지 않아 도망쳤던 한신을 유방에게 추천하여 대장군으로 중용하게 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신을 주살하기로 모의하여 그를 죽게 했으니, 그야말로 성공도 소하 덕분이요, 실패도 소하 덕분이었다. 소하가 그렇게 한 것은 시대의 조류를 잘 탔기 때문이다. 유방이 급히 인재를 구하고자 할 때는 한신을 천거했고, 공신이 모반할까 두려워 토사구팽(兎死狗烹)할 때는 한신을 죽였던 것이다.


여치는 한신을 죽였으나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일부러 구실을 찾아 양왕(梁王) 팽월(彭越)도 죽였다. 유방이 진희를 토벌할 때 양(梁)나라 땅에서 군사를 모았는데 공교롭게 이때 양왕 팽월이 병이 나서 가지 못했다. 유방은 이에 매우 화가 났고 팽월이 모반했다고 의심했다. 이때 마침 양나라 태복이 팽월이 모반을 꾀했다고 고발하자 유방은 즉시 그를 체포했다.


심문 끝에 팽월이 비록 반란 진압에 적극적이지는 않았으나 결코 모반한 사실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유방은 그를 평민으로 만들고 낙양궁에 가두었다. 그리고 후에 그를 촉나라 땅에 살게 했다. 팽월은 서쪽으로 가서 정나라에 이르렀는데 마침 장안에서 낙양으로 온 여치를 우연히 만났다.


팽월은 여치에게 자신은 무죄라고 울며불며 하소연했고 아울러 고향 창읍(昌邑)에 머물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여치는 두말 없이 그의 부탁을 승낙하고 그를 낙양까지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몰래 사람을 시켜 팽월이 모반을 했다고 무고하여 그를 낙양성 밖에서 죽였다. 또 그의 삼족을 모두 죽여 화근을 철저히 없애버렸다.


여치는 이처럼 두 개국공신을 죽여 조정의 대신들을 놀라게 하여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일부 세력이 여치에게 접근했다. 그녀가 개국 공신들을 죽인 것은 자신의 원대한 목표인 권력 장악을 위해 길을 터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야심을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유방은 이 점을 간파하고 자신이 죽은 후 유씨 정권이 멸망하지 않게, 하기 위해 대신들과 함께 백마를 죽여 그 피를 삼혈하고 맹세하며 말했다.


“만일 유씨 종족이 아닌 사람이 왕위에 오른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함께 그를 토벌할 것이다.”

 

여치가 여씨 정권 일궜지만…


유방이 죽은 후 유영이 즉위했으나 그는 나약했기 때문에 여치가 대권을 잡았다.


얼마 후 혜제 유영은 세상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친아들이 죽자 여치는 유공(劉恭)이라 불리는 궁녀 소생의 남자아이를 찾아서 즉위시키고는 그의 생모를 죽여버렸다. 이때부터 여치의 섭정(攝政)이 시작됐다.


여치는 천자를 대신해 조정을 다스린 8년 동안, 유방의 유씨 종족이 아니면 왕이 될 수 없다는 규정을 깨뜨리고 모든 여씨들을 크게 봉하여 여태(呂台)를 여왕(呂王)으로, 여산(呂産)을 양왕(梁王), 여록(呂祿)을 조왕(趙王)으로, 여통(呂通)을 연왕(燕王)으로 봉했다. 번쾌의 처 여동생 여수(呂須)는 임광후(臨光侯)로 봉하였다. 이로써 정권은 유씨에서 여씨에게로 넘어갔다.


유공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자신이 여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자 분개하며 말했다.


“황후는 어찌하여 나의 친어머니를 죽이고 나를 아들로 삼아 황제로 세웠는가? 내가 장성한 후에 반드시 복수하겠다.”


이 말을 들은 여치는 몰래 그를 가둔 후, 황제가 중병에 걸렸다고 거짓말을 퍼뜨려 대신들이 그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황제를 폐위시킨 후에 몰래 죽였다. 그러고는 상산왕 유불의를 세워서 황제로 삼고 이름을 유홍(劉弘)으로 바꾼 뒤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기원전 180년 7월 여치는 병이 위중해지자, 자신이 죽은 후에 반드시 대란이 발생할 것을 알고 미리 모든 여씨들을 군대에 배치시킨 다음 경고했다.


“내가 죽으면 황제의 나이가 어리므로 대신들이 난을 일으킬 것이니, 반드시 병권을 장악하여 황궁을 지키고 나를 위해 궁 밖으로 나가 장사 지내지 말며 다른 사람들에게 제압당하지 않도록 하시오.”


여치가 죽은 후 모든 여씨 세력이 어찌할 바 몰라 당황하는 틈을 타서 개국공신 주발(周勃)과 승상 진평(陳平) 등이 다른 장군들과 연합하여 그들을 죽인 후 대왕(代王) 유항(劉恒)을 황제로 세웠으니 그가 한문제(漢文帝)다. 이로써 여치가 일궈낸 여씨 정권은 철저하게 무너졌다.

 

잔인한 여치의 성공 비결


여치는 비록 황제 칭호는 없었으나 당시의 실질적인 황제였다. 중국 역사상 첫 번째 여황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가 천자를 대신하여 국정을 맡은 8년 동안 민생안정을 위한 정책들을 실행했기 때문에 한나라 사회는 한층 발전했다. 이는 분명히 역사상의 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여치는 평민의 아녀자로서 제왕의 위치에까지 오른,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그녀의 일생을 보면, 우연한 기회로 이룬 일이 절반 정도였고 나머지 절반은 그녀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 앞의 반생에서는 유방의 아내가 되어 존귀한 황후가 되었으며 남이 도저히 가질 수 없는 세력을 얻었다. 후반부 인생에서는 자신이 처한 유리한 위치를 이용하여 장기적인 안목에서 끊임없는 노력과 잔혹한 수단을 동원하는 수완과 능력을 발휘하여 대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척희는 여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그것을 이용하지 못했고 줄곧 유방에게 애원만 하다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여치는 강약을 조절하여 주도면밀하게 위엄과 명망을 세우고 신하들을 복종시켰다. 사실 여치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녀의 성공비결은 남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능란한 기지와 잔인함에 있었다.


중국의 봉건시대 궁정은 세상에서 가장 비이성적이고 비도적적인 곳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조금만 인정을 베풀어도 정치투쟁에서 밀려나게 된다. 권력을 위해서는 물질이나 도덕, 혈육의 끈끈한 정도 아낌없이 버릴 수 있어야 했다. 모든 일에 대가를 지불하고 비인간적이어야 자신의 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양심의 가책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궁궐에서 정치투쟁 가운데 권세욕과 인성이 충돌하면 언제나 권세욕이 승리하고 인성이 패했다. 권력투쟁에서 패한 사람의, 땅에 떨어진 머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실패했던 이유가 인정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승리자의 미소를 우러러보게 될 때, 우리는 단지 권력욕만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j64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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