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2]

광무제 劉秀, 유연함으로 천하를 다스리다!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기사입력 2020/06/05 [11:14]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再讀新書 人物論[12]

광무제 劉秀, 유연함으로 천하를 다스리다!

글/이정랑(중국고전 평론가) | 입력 : 2020/06/05 [11:14]

‘부드러움’을 치세의 원칙으로 삼고 모든 분야에서 실천
형이 피살당하자 다른 얘기 접어두고 자신의 과실만 토로


‘유도’ 펼쳐 권위 아닌 인덕으로 사람들 복종시키고 안정확보
‘중용의 도’를 몸소 실천하여 인심 얻고 결국 천하에 우뚝 서

 

▲ 사진은 영화 ‘삼국지-용의 부활’ 한 장면. 

 

부드러움 속에 강경함이 숨어 있고, 강경함 속에 부드러움이 병존하여 양자가 서로 잘 조화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 중국인들이 지켜온 처세의, 기본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역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강경한 사람이 많았던 데 비해 부드러운 사람이 적었다는 것이다. 만일 부드러움을 위주로 하고 강경함을 보조 수단으로 할 수 있었다면 이러한 처세 및 통치의 방식은 이른바 ‘유도(柔道)’, 즉 유연한 도로 나타났을 것이다.


하지만 ‘유도’가 치국치민과 인간의 처세에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었을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통치자들이 지나치게 탐욕스럽고 거칠며 눈앞의 성공과 이익에만 급급하여 ‘유도’를 행하지 않거나 행한다 해도 올바른 방식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하지만 중국 역사에는 ‘유도’를 처세의 원칙으로 삼아 나라를 다스리는 데 성공함으로써 ‘유도’가 ‘강도(强道)’보다 훨씬 효과적임을 입증한 사례도 적지 않다.

 

부드럽게 나라 다스린 황제


후한의 시조인 광무제 유수(劉秀, BC 6~57, 재위 25~27)는 ‘유도’로 나라를 세워 부드러움으로 나라를 다스린 황제였다. 또한, 그는 ‘부드러움’을 치세의 원칙으로 삼아 정치와 군사 등 모든 분야에서 이 정신을 실천했고, 중국의 ‘유도’를 최고의 경지로 발전시켰다.


유수는 한 고조 유방의 9대손으로 그의 부친 유흠(劉欽)은 남돈의 현령으로 그가 아홉 살 되던 해에 병으로 사망했다. 이때부터 그는 형 유연(劉縯)과 함께 숙부 밑에서 자라게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유수는 키가 7척 3촌인 데다가 입이 크고 아주 잘생겨 누가 봐도 제왕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유수는 농사짓기를 좋아했고 그의 형은 이런 그를 보고 항상 비웃었다.


한번은 친척 집을 찾아갔을 때였다. 손님과 친구들이 모인 가운데도 도참(圖讖, 미래의 길흉에 관하여 예언하는 술법)의 학문에 정통한 주인 채소공(菜少公)이 예언하듯 말했다.


“유수는 장차 천자가 될 것이오.”


사람들은 당시 왕망의 대신이었던 유흠이 이름을 유수로 바꿨기 때문에 대신 유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리며 유수가 나타났다.


“제가 황제가 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모두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유연의 동생 유수인지라 장내는 한바탕 웃음바다가 되었다.


유수가 스물여덟 살 되던 해에 왕망의 통치는 인심을 얻지 못한 데다가 천재지변까지 그치질 않아 각 지역에서 농민 봉기가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녹림과 적미의 기의군은 기세가 대단하여 왕망의 군대를 위협하기에 충분했다. 폭풍처럼 번지는 농민 봉기의 혼란 속에서 유수는 남양 일대의 곡물을 싼값에 사들여 형 유연과 더불어 군사를 모을 계획을 세우고 7000~8000에 이르는 군중을 모았다.


병사 모집에 성공한 유수는 점차 그 지역의 다른 군사들을 규합하여 단번에 녹림군을 합병했다. 서기 23년 2월, 녹림군은 따로 나라를 세우기 위해 유수의 친척인 유현(劉玄)을 황제로 세우고 연호를 경시(更始)라 했다.

 

유수 형제 명성 날로 높아지고


이때부터 녹림군의 기세는 맹렬한 속도로 발전했고 왕망은 ‘하루에도 세 번씩 놀랄’ 지경에 이르렀다. 왕망은 새로 42만 명의 군사를 모집하여 왕읍(王邑)과 왕심(王尋)에게 이들을 이끌고 녹림군을 진압하게 했다.


이에 유수 등은 양관을 포기하고 부대를 인솔하여 곤양으로 퇴각했다. 곤양의 수비군은 8000~9000 명에 불과한 데 비해 적의 진영은 백 리에 이를 정도로 세력이 커서 현격한 차이를 나타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장수들은 분산하여 철수할 것을 주장했으나 유수는 이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끝까지 힘을 다해 버티면 진영을 보전할 희망이 있지만 분산하여 포위망을 뚫으려 했다간 전멸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결국, 그는 열세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야밤을 틈타 직접 남문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하기로 마음먹고 정릉과 연성등지의 병사들을 설득했다. 그리고 직접 수천 명을 이끌고 곤수를 건너 적을 기습했다. 결국, 적은 극도의 혼란에 빠져 손도 써보지 못하고 유수의 군대에 대패했다.


곤양 전투는 중국 전투사에 있어서 적은 인원으로 큰 승리를 거둔 훌륭한 전례가 되었고, 또한 기의군이 왕망 정권을 전복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왕읍과 왕심의 군대를 격파한 후부터 유수 형제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다른 기의군 장수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다.


게다가 유연은 애초부터 유현을 황제로 세우는 것에 반대해왔던 터라 이런 기회를 빌려 유연을 제거하지 않으면 후환이 될 것이라는 모함이 들어왔다. 유현은 패기가 없고 유약하여 자기 주장이 없는 사람이라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기회를 틈타 반란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기의군 내부에 분열이 생기면서 유연이 피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유수는 마침 부친의 성에 있다가 형의 피살 소식을 듣고는 비통함을 이기지 못해 한참 동안 통곡했다. 그리곤 곧장 완성으로 가서 유현을 만나 다른 얘기들은 접어두고 오로지 자신의 과실만을 토로했다. 유현이 완성의, 수비 상황을 물었을 때도 유수는 모든 공을 장수들에게 돌리면서 조금도 자만하지 않았다.


다시 처소로 돌아온 그에게 만나는 사람마다 애도의 뜻을 표했지만, 그는 입을 굳게 다문 채 형이 피살된 사실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상복도 입지 않고 평소와 같이 식사를 했다. 유현은 그런 유수의 태도에 오히려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고 마침내 그를 파려대장군(破慮大將軍)으로 임명하고 무신후(武信侯)에 봉했다.


사실 유수는 형의 유고에 대해 몹시 비통해하며 그 후로도 수년 동안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평림과 신시의 기의군에 대항할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말없이 인내하며 견딘 것이었다.


유수의 말 없는 인내는 자신을 지켜주었을 뿐 아니라 기의군 병사들로부터 동정과 신뢰를 얻어내는데도 큰, 역할을 했고 나중에 독자적인 노선과 조건을 확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유수의 말 없는 인내


왕망이 피살되자 유수는 기의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가서 유현을 맞아들였다. 유현의 관속들은 모두 배로 만든 모자를 썼는데 그 모양이 하도 우스워 낙양으로 가는 연도의 사람마다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유수만이 한조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뜻밖에 한조 관원의 엄숙한 용모와 늠름한 태도를 다시 보게 되자 저마다 감탄했다. 이리하여 사람들의 마음속에 유수라는 존재가 깊이 각인되었다.


유현은 낙양에 도읍을 정한 후 자신과 친근하면서도 유능한 대신을 하북 일대에 보내고자 했다. 이때 유수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유현에게 자신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고 유현은 그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결국, 유수는 대사마의 신분으로 하북으로 가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후한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하북에는 세 개의 세력이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가장 큰 세력은 왕랑(王郞)으로, 그는 유방의 후예임을 자처하며 대단한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다음은 왕망의 잔여 세력이고, 세 번째가 동마, 청독 등의 농민 기의군이었다.


유수는 하북의 각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현지 관리를 만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을 풀어주고 왕망의 학정을 폐지했으며 한조의 제조를 부활시켜 죄인들을 석방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위로했다. 이처럼 그는 하는 일마다 민심에 순응하여 관민이 모두 기뻐했다.


이때 유림(劉林)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한 가지 계책을 올렸다.


“현재 적미군이 황하 동쪽에 진을 치고 있으니 재빨리 수공 작전을 쓰면 이들을 전부 물고기 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수는 잔인한 방법을 쓰다가는 민심을 잃기가 십상이라고 판단하고 이에 따르지 않았다. 유수가 처음 하북에 갔을 때 병사들의 수는 적은 데 비해 장수들이 너무 많아 아무도 그의 지휘에 따르려 하지 않았다. 영웅들을 끌어들이고 민심을 얻었으며 고조의 위업을 세우긴 했지만, 대규모 군대를 갖추지는 못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왕랑의 추격을 받으면서 점차 위기에 몰렸지만, 점차 등우(鄧禹)와 풍이(馮異), 구순(寇恂), 요기(姚期), 경순(耿純) 등의 인재를 끌어드리고 해당 지역 기의군의 이름으로 군사를 모집함으로써 거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신도와 상곡, 어양 등지의 관료집단과 연합하여 입지를 튼튼히 했다. 그는 ‘유도’ 정책을 펼침으로써 권위가 아닌 인덕으로 사람들을 복종시켰고 이에 따라 민심이 귀속되면서 사회의 안정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음 호에도 ‘유수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j64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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