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창간 23주년 기획특집…다시 보는 5·18 진실의 기록

‘탕!’ 신군부 계획된 총살…‘5월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신대희(뉴시스 기자) | 기사입력 2020/05/15 [11:57]

본지 창간 23주년 기획특집…다시 보는 5·18 진실의 기록

‘탕!’ 신군부 계획된 총살…‘5월 광주’는 피로 물들었다

신대희(뉴시스 기자) | 입력 : 2020/05/15 [11:57]

본지가 5월18일로 창간 23주년을 맞았다. 타블로이드 판형의 시사종합지 <주간현대>가 1997년 5월18일 자로 창간호를 낸 것은 한국 현대사에 크게 기여한 광주 민주화 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주간현대> 제1호 지면에는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시민의 증언과 아픔을 담으려 노력했고, 5·18 당시 군부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진압작전을 고발하하는 사진도 실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운동가이자 철학자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는 일찍이 “1980년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은 놀라웠다. 군부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진압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광주항쟁은 혹독한 독재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민주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한국인들이 용감하게 투쟁의 발걸음을 내디딘 사건이다”라고 진단했다.

 

세월은 23년이나 흘렀지만 광주항쟁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왜곡과 폄훼는 여전하며, 일부 정치인과 단체가 객관적·역사적 사실마저 송두리째 부인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본지는 해마다 5월이면 창간특집 기사를 통해 1980년 광주항쟁의 의미를 조명해왔다.

 

특히 올해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일어난 지 40주년이 됐다. 그런 만큼 그 어느 해보다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창간특집으로 다시 보는 ‘5·18의 기록’과 ‘그날의 진실 찾기’ 관련 소식을 지면에 소개한다. <편집자 주>

 


 

5월21일 2시간 넘게 조준사격…금남로는 핏빛 전쟁터 방불
5월27일 공수부대 총 쏘며 돌격…전남도청 삽시간에 생지옥
국민 향해 발포…진압과정에 섬광수류탄 등 신무기까지 동원

 

5월21일 전두환·정호용 광주 다녀간 후 무차별 조준사격 자행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전후 맥락 너무나도 뚜렷하고 필연적
만삭의 딸 잃은 모친부터 아빠 영정 품은 꼬마까지 사연 절절

 

1. 열흘간의 ‘핏빛 항쟁’

작전명 ‘화려한 휴가’. 1980년 5월17일 비상계엄 확대를 의결한 신군부는 7공수여단 33·35대대 공수부대원 688명을 광주로 보냈다. 5월18일 7공수 33대대는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인 전남대학교를 봉쇄했다. 계엄 해제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군홧발로 짓이겼다. 항의하는 시민에게는 곤봉이 날아들었다.


광주역 광장에 하나 둘 모여든 시민과 학생들의 발길은 광주의 심장 금남로를 향했다.


신군부의 잔혹함이 드러나기 시작한 날 오후 4시 금남로. 공수부대원들은 시민을 향해 대검과 곤봉을 휘둘렀다. 쓰러진 시민을 질질 끌고 가 트럭에 실었다. 이들의 잔혹함은 마치 ‘살인 면허’를 받은 것처럼 보였다.


첫 희생자도 나왔다. 청각장애인 김경철(당시 24세)씨가 충장로 제일극장 골목 입구에서 공수부대원들에게 진압봉으로 머리를 맞아 다음날 숨졌다. 5월18일 하루에만 405명이 연행됐다. 이 가운데 68명이 두부 외상, 타박상, 자상 등을 입었다. 12명은 중태였다.


광주는 그야말로 ‘공포의 도가니’였다. 신군부는 11공수를 추가 투입했다.


‘탕!’ 5월19일 오후 4시50분, 광주고 앞 도로. 첫 발포였다. 군(軍)이 보호대상인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11공수 63대대 장교가 쏜 M16소총에 김영찬(당시 조대부고 3학년)씨가 중상을 입었다.


이튿날에는 첫 집단발포가 이뤄졌다. 5월20일 오후 11시 광주역 앞에서 자행됐다. 3공수는 ‘16대대 운전병이 시위대 차량에 치여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역사를 뒤로 도열한 채 사격했다. 시민 5명(김재화·이북일·김만두·김재수·허봉)이 숨졌다. 부상자는 최소 11명이 넘었다.


시민들은 다음날 새벽 광주역에서 김재화·허봉씨의 주검을 발견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면서 10만 명 넘는 시민이 전남도청 앞 금남로로 집결했다.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철수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21일엔 발포 수위가 극에 달했다. 오후 1시 정각, 전남도청 건물 옥상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11공수 부대원 등이 비무장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시작했다.


2시간 넘게 이어진 조준사격에 금남로는 피로 물들었다.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넋을 잃은 시민들은 분노와 공포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신군부의 ‘계획된 총살’이었다.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의 정확한 사상자 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최소 54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군부의 만행에 시민들도 다”이대로 죽을 순 없다”며 불가피하게 무장에 나섰다. 시민군의 최초 무장 시점은 ‘도청 발포 이후인 5월21일 오후 1시30분’. 오후 3시20분에는 시민군이 계엄군의 사격에 응사하면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광주 시내 모든 병원은 총상 환자로 넘쳐났다.


계엄군은 작전상 후퇴한 뒤 ‘광주 봉쇄→내부 교란→최종 진입’이라는 단계적 작전을 폈다.


계엄군을 앞세운 신군부는 5월26일까지 광주 안팎(주남마을·송암동·교도소 등)에서 11차례 이상 시민 학살을 자행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임산부에게도 총을 난사했다.


계엄군의 잔악한 학살을 목도한 항쟁 지도부는 5월26일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80만 광주시민의 결의’로 군사 반란에 맞선 민주화 운동임을 대내외적으로 천명했다. 5·18 심장부인 도청에서는 ‘최후 항전’을 결의했다.


5월27일 오전 3시50분께. 전남도청에선 ‘사랑하는 우리 형제·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여성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으로 불리는 재진입 작전을 확정했다. 같은 날 오전 4시 적막을 깨고 총성이 울렸다.


공수부대는 전남도청 뒷담을 뛰어넘어 내부로 돌격, 닥치는 대로 총을 쐈다. 전남도청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으로 변했다. 군은 진압 과정에 섬광수류탄 등 신무기까지 동원했다.


동이 터오기 시작한 오전 5시10분께 YMCA·YWCA·계림초등학교·전일빌딩·관광호텔 등이 계엄군의 손으로 속속 넘어갔다. 전남도청을 마지막으로 열흘간에 걸친 광주시민의 항전은 끝을 맺었다. 계엄군의 조준사격, 집단발포, 진압형 난사로 금남로와 전남도청은 핏빛으로 물들었고 그날의 의로운 희생은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등불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국민에게 총부리를 겨누라고 지시한 학살 주범들은 40년째 범행을 부인하며 단 한 번도 용서를 구하지 않고 있다.

 

▲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은 5월 그날의 잊을 수 없는 기억을 자세히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다. <사진출처=5·18민주화운동기록관> 

 

2. 기록·증언으로 본 발포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계엄군의 집단발포를 방증하는 기록과 증언은 차고 넘친다.


5·18기념재단 등에 따르면 1980년 5월20일 오후 11시 광주역,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3공수·11공수여단의 집단발포는 비공식 지휘체계에서 이뤄졌다는 분석과 의견이 지배적이다.


그동안 검찰 수사와 정부의 조사내용을 종합하면, 보안사령관 전두환, 특전사령관 정호용 등이 5월21일 광주를 다녀간 직후 도청 앞에서 비무장 시민을 향한 무차별 조준사격이 자행됐다. 우연의 일치로 보기에는 전후 맥락이 너무나 뚜렷하고 필연적이다.


505보안부대가 5월21일 작성해 보안사령부에 보고한 것으로 추정되는 일일속보철 ‘광주 소요사태(21-57)’ 문건에는 ‘23:15 전교사(전투병과교육사령부) 및 전남대 주둔 병력에 실탄 장전 및 유사시 발포명령 하달(1인당 20발)’이라고 적혀 있다.


육군 제2군사령부의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 사항’에 ‘전(全) 각하(閣下): 초병에 대해 난동 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명시돼 있는 점도 사실상 전두환씨가 발포 지시를 내린 정황을 선명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1980년 기갑부대사‘에는 5월21일 오전 8시 전투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됐고, 오전 11시 각급 부대에 개인당 M16 소총 실탄 90발씩을 지급했다고 기록돼 있다.


‘12·12 5·18 실록, 자위권 발동 이전의 발포 행위 일람표‘에도 5월19~20일 광주역, 광주고~계림파출소 등지에서 사격 행위와 실탄 지급·통제 기록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는 5월21일 도청 앞 발포 전 조직적·체계적 실탄 분배가 이뤄졌고, 자위권 천명에 앞서 발포허용 명령이 있던 것으로 넉넉히 추정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육군본부 ‘광주소요사태분석(교훈집)‘ 70쪽에도 ‘무장 헬기가 작전기간(7일간)에 1인당 평균 59발 소모했다’고 적혀 있다.


신군부 핵심 세력들의 지휘로 발포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증언도 잇따랐다.


전 505보안대 수사관, 미군정보 요원, 공군 706보안부대장 운전병 등은 5월21일 정오 전두환씨의 광주방문 직후 이뤄진 발포에 대해 한결같이 또렷이 증언했다. “극비리에 홀로 광주를 찾은 전씨가 광주비행장에서 핵심 인사들과 회의를 했고, 헬기를 타고 서울로 돌아간 직후 도청 앞 사살 행위가 이뤄졌다”는 설명이다.


실제 ‘육군본부 작전교육참모부 작전상황 일지’ 등에도 ‘5월21일 (정호용)특전사령관 외 2명이 오전 8시부터 10시20분까지 기동용 헬기 UH-1H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고 기록돼 있다.


▲공수부대 투입 과정에 작전통제권을 갖게 될 전교사령관·31사단장과 사전협의가 없던 점 ▲상급 부대 승인 없이 공수부대가 독자적으로 실탄을 분배한 점 ▲발포 관련 보고가 공식 지휘 계통에 누락된 점 ▲계엄군 간 오인 사격이 잇따른 점 등도 비공식 지휘 체계에 따른 발포를 방증하고 있다.


이에 자위권 발동 결정은 발포를 합리화시키기 위한 조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비선 라인(보안사령관-육군참모차장-특전사령관-3·7·11공수)에 의한 발포 명령과 자국민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조치라는 뜻이다.


▲집단발포 ‘이후’인 5월21일 오후 7시30분 자위권 천명 ▲자위권 발동 수칙인 하반신 사격 등 미준수(5·18 총상 환자 53% 이상이 5월21일 이전 부상, 머리·목·가슴 등 파편) ▲공수부대원들이 검찰 조사에서 ‘실탄 분배, 자위권, 봉쇄 작전을 사살명령으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한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실제 김순현 전교사 전투발전부장은 검찰에서 “육군본부 전문에 작전발령호수나 발령권자의 표시 없이 ‘향후 광주지역 수습 작전에 대한 모든 책임을 현지 사령관에게 위임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를 소준열 전교사령관에게 전했다. 소 장군 얼굴이 흑빛이 됐다”고 진술했다.


이는 신군부 핵심 세력의 중요 명령(발포 등)과 책임 회피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라고 5·18 연구진은 설명했다.


전 505보안대 수사관 허장환씨는 5월20일 505보안대 통신실에서 ‘자위권 구사 발포 사살 합의’라고 적힌 ‘보고 전문’을 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다만, 그동안 정부 차원 조사에서 발포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찾지 못했다.


안길정 5·18기념재단 자문위원은 “증거를 남기지 않고 발포가 이뤄졌을 가능성이 매우 유력하다다”며 “최근 출범한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발포 관련 역사적 흔적과 ‘그날의 진실‘을 밝혀줄 자료 찾기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 1980년 5월24일 ‘상무충정작전’을 위해 공수여단 병력이 트럭을 타고 광주공항으로 이동했다. <사진출처=5·18민주화운동기록관> 

 

3. 희생자 유족들의 사연


계엄군의 총에 맞아 숨진 희생자는 있지만, 발포 명령자는 4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희생자 유족들의 아픔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가슴이 미어지고 애가 끓는다. 유족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뿐 아니라, 5·18을 둘러싼 갖가지 왜곡과 폄훼로 또다시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5·18민주유공자유족회 등에 따르면 5·18 당시 열흘(1980년 5월18~27일)간 직접 사망자는 165명, 상이 후 사망자는 112명이다. 이 가운데 총상으로 숨진 희생자는 확인된 것만 128명에 달한다.


만삭의 임신부 딸과 뱃속의 손자를 잃어야 했던 어머니부터 영문도 모른 채 아버지의 영정을 품에 안았던 꼬마, 5·18둥이에 이르기까지 애끊는 사연은 다양하다.

 

▲ 1980년 5·18 민주화 운동 과정 중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 총에 맞아 숨진 조사천씨(당시 34세)의 영정사진을 아들 조천호씨(당시 5세)가 들고 있는 모습.  


1980년 당시 임신 8개월의 주부였던 고(故) 최미애(당시 23세)씨는 5월21일 오후 1시50분께 광주 북구 전남대 인근에서 계엄군 3공수여단의 총격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시위에 나선 학생들을 살펴보고 정오까지 돌아오겠다’며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찾아나섰다가 벌어진 참극이었다.


어머니 김현녀 여사가 남편 등과 함께 현장을 찾아갔으나, 딸 최씨는 이미 숨진 상태였다. 참혹한 딸의 시신을 가까스로 집으로 옮겼으나, 뱃속에 있는 태아도 20분가량 심장이 거칠게 뛰다가 잠잠해지며 숨을 거뒀다.


목격담에 따르면 최씨는 전남대 정문 쪽에서 발포로 쓰러진 한 학생의 두 발을 끌고 옮기는 과정에서 총에 맞았다. 총격이 날아온 방면에는 앉은 채 총을 겨누고 있는 계엄군이 있었다. 명백한 조준사격이었다.


팔순을 넘긴 어머니는 만삭의 임신부에게 조준사격을 한 이유도, 딸과 손자를 동시에 잃게 한 계엄군의 발포는 누구 지시인지 여전히 모른 채 한 많은 세월을 살고 있다.


‘교복 입은 시민군’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고 안종필(당시 16세)군의 어머니 이정님 여사도 ‘아들을 더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못했다’는 회한 속에서 괴로운 여생을 보내고 있다. 당시 광주상업고등학교(현재 광주동성고) 1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안군은 휴교령이 내려진 5월19일 다음날인 5월20일 오전 전화 한 통을 받은 뒤 집을 나섰다.


아들이 시위에 나서지 못하도록 숱하게 붙잡고 만류했지만 안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신발을 쓰레기통에 넣고 교복을 물에 담가도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안군은 교련복을 챙겨입고 전남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에 재합류해 마지막 진압이 있었던 5월27일 오전 2시께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당시 무등중 3학년생이던 고 김완봉(당시 15세)군도 계엄군의 집단발포가 시작된 1980년 5월21일 금남로를 걷던 중 총탄에 맞아 숨졌다.


뒤늦게 적십자병원에서 아들 시신을 찾은 김군의 어머니는 8일 만인 5월29일 망월동 구묘역에 안장했다. 안장식 당일 아들을 가슴에 묻은 어머니의 한 맺힌 오열이 나경택씨(당시 전남매일 사진부 차장)의 렌즈에 잡혔다.


이 사진은 5·18의 아픔을 상징하는 사진 가운데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33년이 지난 2013년 인터넷 사이트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에 이 사진이 ‘아이고 우리 아들 택배 왔다, 착불이요’라는 조롱성 글과 함께 게시됐다. 유족들의 아픔을 또 다시 후벼파는 이 같은 행태는 국민적 공분을 샀지만, 5·18을 둘러싼 망언과 폄훼는 끊이지 않고 있다.


‘꼬마상주’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고(故) 조사천(당시 34세)씨와 조천호(당시 5세)씨 부자의 사연도 오월 광주의 아픔을 상징한다. 조사천씨는 5월21일 시민들이 몰고 다니던 트럭에 올라탄 뒤 시위에 나섰으나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이 쏜 총을 맞았다. 급히 기독교병원으로 옮겼으나 손쓸 겨를 없이 세상을 뜨고 말았다.


조사천씨가 3대 독자였던 탓에, 상주를 맡은 것은 다섯 살배기 조천호씨. 그가 하얀 상복을 입고 아버지의 영정 위에 턱을 괸 사진이 독일 외신에 보도됐다. 이후 이 사진은 신군부의 감시를 피해 국내로 몰래 반입된 뒤 대학 운동권 사이에서 돌며 5·18의 진실과 아픔을 알렸다.


희생자 유족들의 염원은 누가, 왜 가족의 목숨을 앗아가도록 발포를 명령했는지 하루빨리 규명하는 것이다. 정수만 전 5·18민주유공자유족회 회장은 “40년 되도록 가족이 왜 세상을 등져야했는지 이유조차 알지 못하는 것이 더 큰 한(恨)이다. 조속하고 명확한 진상규명만이 살아남은 자들의 아픔·고통을 덜어주는 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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