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4> 신령계

“지금의 무당들은 욕망 숨긴 채 하늘의 뜻 전하는 척”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20/03/20 [11:49]

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제2부 <4> 신령계

“지금의 무당들은 욕망 숨긴 채 하늘의 뜻 전하는 척”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20/03/20 [11:49]

“무당업은 마치 방부제로 처리된 눈알처럼 오래 갈 거예요”
“무당들은 어깨에 힘 빼고 영적 엔터테인먼트로 만족했으면”

 

“신은 지금도 계시고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겠지만…”
“그러나 신은 지구 차원의, 인간만을 위한 분은 아니잖아요?”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상념에 잠겨 있던 화정 여인은 갑자기 상체를 비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의외로 좀 피곤하네요. 오늘은 이만 하고 다음 기회에 또 봐요…좀 섭섭할 때가 사실은 좋죠. 흐흥, 이왕 온 김에 신당을 한번 구경하시려나?”


“네.”


“참 욕심도 많군요.”


여인은 살풋 미소 짓곤 일어나서 그를 안내했다. 아마 예순 살이 조금쯤 넘었을 텐데도 마치 처녀마냥 사뿐사뿐 위층으로 향한 계단을 걸어올랐다. 군살 없이 호리호리한 몸매는 젊은 아가씨 못잖게 고혹적이었다. 머리카락을 뒤로 모아 틀어올려서 희고 가녀린 목이 기품 있게 드러났다. 그래서 그런지 얼핏 천상의 계단을 오르는 요정이나 선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진갈색 복도를 지나 한 방의 문 앞에 섰다. 다른 방의 문과 달리 하얀 그 문을 여인은 조용히 열었다. 의외로 아담하고 소박스런 신당 풍경이었다.

 

▲ 신과 인간 사이의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선을 이어주는 무당의 삶을 감동적으로 포착한 영화 ‘사이에서’ 한 장면. 


“여긴 나만의 공간으로 정해두고 있어요. 문지방 안으로 들어서진 말고 그냥 구경이나 잠시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원래 이런 장면은 전혀 예상치 않았거든요. 지금 생각하니, 간청을 해서라도 한번 볼 필요가 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화정은 아무런 대꾸 없이 연노란 장판 깔린 방안으로 들어가 다소곳하게 절을 했다. 그러곤 무릎 꿇고 앉아 기도하는 몸짓으로 단정히 두 손을 모으곤 속삭이듯 뭔지 중얼거렸다.

 

Q라는 별명의 사내는 좀 놀란 표정이었다. 사실상 은퇴했다고는 해도 한때 유명했던 무녀의 신당치곤 너무 소박했던 것이다. 진설대엔 제철 과일 몇 가지뿐 떡이나 고기 종류는 없었고, 하얀 도자기병에 백합 꽃이 꽂혀 있었으며, 푸르스름한 향연(香煙)이 피어 올라 신령계와 인간계를 이어 주는 성싶었다.


그런데 정작 더욱 의아스럽고 놀라운 건 신당 어디에도 허연 수염을 나부끼는 신불도(神佛圖)나 청룡언월도를 비껴든 관우 신상 따위가 전혀 없다는 점이었다. 오직 진설대 위의 정면 벽에 어느 이름 모를 시골 할머니의 흑백 초상화가 걸려 있을 따름이었다. 하얗게 세어 버린 백발은 해풍(海風)에 바랜 듯 거칠거칠했고, 애잔스런 눈빛은 온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살로 인해 더욱 구슬퍼 보였다.


잠시 후 화정은 마지막 절을 다소곳이 하곤 일어나서 천천히 걸어나왔다.


“일반적인 신당과는 무척 다르군요. 물론 꼭 정해진 틀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초상화의 할머니는 누군가요?”


복도를 걸으며 Q가 물었다.


“엄마.”


여인은 간단히 대꾸했다.


“어머님은 어릴 때 세상을 떠나셨잖아요?”


“내가 마음속으로 그려 본 엄마예요. 만약 살아 계셨다면 지금쯤은 어떤 모습일지…살아오면서 늘 생각해 보곤 했죠. 설령 무슨 일을 당해 돌아가셨을지라도, 내 마음속엔 언제나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거예요.”


“혹시 모정의 그리움에 대한 신성화인가요?”


“성모 마리아처럼?…호호, 그건 아니에요. 엄마는 그냥 엄마일 뿐이지….”


“그래도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신당에 신령 아닌 엄마를 모신 건 무척 파격적이잖겠어요?”


“어차피 요즘 무당업 자체가 모두 파격적인걸 뭐. 내 생각에…무당들이 섬기는 신불상은 이젠 하나의 상징이 아닐까 싶어. 요즘은 모든 게 진실상이 아니라 각각의 사업자들이 만들어 내세운 상징, 즉 상표와 캐릭터들에 의해 돌아가는 판이니까. 무당업계에서도 이미 벌써부터 그런 조짐이 나타나 참 신령은 사라져 버리고…야릇한 아견과 아집을 개성미로 내세워 광고하면서 돈 버는 데 목적이 있으니까.”


여인은 계단을 사뿐사뿐 밟아 천천히 내려가며 말했다.


“망하기 전에 창궐하는 현상은 혹시 아닐까요?”


한 발짝 뒤에서 Q가 물었다.


“음, 그렇진 않을 거야. 마치 방부제로 처리된 눈알처럼 오래 갈 거예요.”


“언제까지…?”


“그건 모르지. 어쨌든 무당의 뿌리 자체는 무척 깊이 뻗어나가 또아릴 틀고 있을 테니까.”


아래층 거실에 내려선 화정은 소파에 앉아 창백한 얼굴을 두 손으로 쓸어 내렸다. 비유하자면 마치 나비가 날갯짓을 하며 가다듬는 것 같기도 했다.

 

▲ 만다라, 무속, 춤 등에 깃든 기와 혼을 화폭에 힘차게 담아낸 이중희 화백의 작품. 


그는 작별인사를 하려는 듯 선 채로 기다렸다.


“앉으세요. 먼길 오셨는데 차라도 한잔 드시고 가셔야지.”


“괜찮은데….”


화정은 대꾸 없이 사뿐히 주방 쪽으로 걸어갔다.

 

Q는 생각에 잠겼다.


‘요정마냥 순수하고 어여뻐 보이지만 결코 만만한 여자는 아니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고도 마음의 처녀성을 간직할 수 있을까? 하긴 설령 꽃요정이라 한들 요즘 세상에 맨정신으로 살아 존재할 리는 없겠지. 그녀는 혹시 무지막지한 한국 사회의 피해자가 아닐까?…음, 그렇게 판단한다면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가 될 거야. 하지만 왠지 요정은….’


그때 여인이 찻잔 담은 쟁반을 들고 와 탁자에 놓았다.


“한번 들어 봐요. 남도의 깨끗한 햇빛과 땅이 빚어낸 무아차예요. 한 모금 마시면 아집이 사라지고 두 모금째엔 총명해지고 세 모금 머금곤 우화등선한다고 해요.”


“은은히 향기롭군요. 매화향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매화 향기를 제대로 맡을 수 없죠. 다른 많은 꽃들은 욕망을 지니고서도 향긋함을 즐길 수 있는데…어떤 꽃은 욕심이 없으면 향을 맡을 수 없기도 하고…….”


“꽃요정이라 잘 아시는군요.”


“무슨 가당찮은 소릴!…사실 백화 스승님으로부터 받은 이름은 무화(無花)예요. 그런데 내가 경기도 화정이란 곳에 잠시 머물 때 그 이름으로 굳어져 버린 것일 뿐 뭐 별것 아냐.”


“아마 이미지에 어울리니 그랬겠죠. 억지로 되는 건 아니니까.”


“아니에요. 가짜 이미지 따윈 버리고 그냥 세월 따라 흘러가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인간은 세월에 앙탈을 부리는 존재니까요.”


“….”


“요즘엔 특히 이미지나 캐릭터에 집착해 순간적인 허상에 시시각각 앙탈을 부리곤 하죠. 하하….”


“그런가…인생은 미망이라던가….”


“인간은 개미들의 미망 같은 행로에 대해 웃지만, 실상 인간 자신은 어떨까요? 개미 족속과 인류로 분류해서 보아 그렇지 만약 개미 한 마리와 인간 한 명을 놓고 공정히 비교하면 누가 더 헤매어 다니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요.”


“호호…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란 얘기도 인류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벗어나면 말짱 허상이고 거짓이라는 건가?”


“벼룩이나 이 같은 인간도 있으니까요. 영웅과 위인 속에도 그런 해충의 속성이 도사려 숨어 있죠. 확대해 보면 아마 훨씬 더 잔악스럽고 교활할걸요.”


“요즘은 만물의 영장이니 하는 말도 잘 안 쓰니까…경제 동물이나 섹스 광귀라고 비판해도 인간 스스로 히히 웃으며 받아들이는 세상이니 뭘.”


“이런 시대에 무당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닌 존재일까요?”


“난 현재의 무당들에 대해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요. 천지인을 이어 준다느니 앞날을 내다본다느니 하며 거창스레 어깨에 힘을 넣기보다는, 그냥 영적인 엔터테인먼트로 만족하면 어떨까 싶어요. 인생길에서 고뇌하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꿈과 희망과 재미를 주는 것도 의미가 있잖겠어요?

 

이미 영화배우나 가수나 개그맨 등 인기 연예인들이 대중의 영혼까지 세련되게 휘어잡은 채 위무와 예언을 하고 있는 마당에…무당은 뭔 되잖은 짓거리로 화려한 허위의 오색 반투명 장막을 친 채 사기술이나 부리고….”


“혹시 좀 주관적이고 일방적인 비판이 아닐지요?”


“음,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난 그들을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 할 해충으로 지탄하는 건 결코 아니에요. 미래가 있으니까요.”


“미래의 무당?…지금 열 살쯤 된 소녀가 무당이 된다고 생각하면…좀 씁쓸하네요.”


“그리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말아요. 십 년, 이십 년이면 앞으론 아주 다른 세상일 거예요. 나는 늙어 죽고, 댁은 아마 중년이 되어 있겠죠.”


“뭘 그렇게까지 과장스레….”


“호호, 역시 청춘이 좋은 모양이네요. 암튼…미래의 무당은 어딘지 정육점 딸 같은 이미지를 버리고, 동양의 신선뿐만 아니라 서양의 진짜 신사들과도 대화를 나누며 영혼과 신령의 진실을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그게 지나친 욕심일지라도…미래엔 아마 소박하면서도 인간미 있고 진리에 따라 사업하는 무녀들이 점점 늘어나지 않을까 싶어요.

 

옛날 옛적의 전통적인 만신님들이 신령들의 눈으로 인간을 내려다본 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죽고 신령의 마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지금의 무당들은 싸구려 가짜 연예인들보다 못하게 마음의 욕망과 허위를 숨긴 채 짐짓 하늘의 뜻을 전하는 척하잖아요. 차라리 발가벗어 버리면 더 아름다울 텐데…….”


“정신미나 육신미가 있다면 드러내겠죠.”


“진짜 그런 걸 갖추었다면 오히려 아리따운 옷가지로 한 겹 더 감추더라도 빛이 나련만…요즘의 화려한 무복은 정신을 전달하는 게 아니라 겉치장 같아서 역겨워.”


“혹시…자기 자신을 완전히 발가벗고 남들 앞에 드러내는 게 가능하다고 보세요?”


“혼자서는 아무리 벗고 또 벗는다고 해도 양파 까기일 거예요. 하지만 남이 보고 반응한다면…즉, 한 겹씩 따라 벗는다면 그런 환상을 가질 수도 있겠죠.”


“환상?”


“벗는다고 진실로 믿는 사람은 아마 입고 있지 않을까 싶어. 정신이든 육신이든…하지만 뭐 다 제 잘난 맛에 사는 거니까. 호호호….”


“그래도 어쨌든 무당업의 미래를 낙관하시는 거네요?”


“낙관? 글쎄…그건 내가 해보고 싶었으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한 가닥 미련 또는 희망일지도 모르지. 순수, 진실한 말, 화광동진(和光同塵)…신령님과 번민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지금이라도 하면 되잖아요.”


“그러고는 싶지만 쌓인 업이 많아서….”


“업이 쌓여서 인간의 운명을 만드는 것인가요?”


“글쎄, 그렇겠죠….”


여인은 수심에 젖은 눈을 슬며시 감았다.


“자기가 모르고 한 것도 업이 되나요? 이를테면 화정 여사님의 소녀 시절처럼…사람들은 그 당시 부자지간의 비극적인 살인사건을 순결한 소녀와 연결시키려고 애쓰던데요.”


여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사실 그 전부터 그 집이 끔찍스레 두려웠는데도…난 떠나질 않고 그냥 머물렀지. 혹시 그런 위험스런 순간들을 왠지 내심 은근히 즐겼는지도 몰라. 알았든 몰랐든 마음속으로 죄의식을 느낀다면 아마 업이 돼 운명에 영향을 미치겠지. 흥….”


“업…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을 누가 맨 처음 했는지는 모르지만…아마 그 사람은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받았을 성싶어요.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이 하나씩 쌓여서 금언으로 만들어졌으니…일리가 있겠죠…어리고 젊을 때의 영욕에 얽매여 살기보다는, 지금부터 참 꿈을 향해 한 발짝씩 걸어간다면 한결 아름다우실 것 같아요.”


“호호, 용기를 줘서 고마워요.”


“헤헤, 뭘요…그런데 새로운 출발을 하시더라도 신당에 어머님의 초상화를 계속 걸어두실 건가요?”


여인은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글쎄…그건 좀 생각해 보고….”


“전 좋아 보이던데요.”


“하긴 뭐 신이나 신령님이 꼭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기도 할 테고…예전부터 엄마나 아빠는 신의 대리인이라는 풍문도 있으니까….”


“신은 인간을 닮았다, 그건 신이 인간을 만든 게 아니라 인간이 신을 생각해냈기 때문이란 소문도 있죠.”


“호호, 그건 우리가 늘 하고 있잖아요. 자기를 닮은 신을 찾죠. 무당도 마찬가지고…절에서도 교회에서도…참 신을 찾기는 지고지난하니까 우상으로 적당히 만족하는 게 아닌지 몰라. 부처님도 신도 모시지 않은 대적광전(大寂光殿)이 더 그윽해….”


“참다운 신에 대한 꿈이 있으세요?”


 그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입술을 열었다.


“신은 지금도 여여히 계시고 과거에도 있었고 미래에도 있겠지만…인간이 제 생각대로 더럽히고 왜곡시켰지 않았나 싶어요. 신은 지구 차원의, 인간만을 위한 분은 아니잖겠어요?

 

해맑은 날에도, 별이 총총한 밤에도, 아집과 욕망에 눈먼 인간은 모르겠지만…신은 이 작고 푸른 강낭콩 같은 지구뿐만 아니라 온 우주와 미지의 은하계에서 깜박이는 행성들, 그곳의 이름 모를 존재들을 위해 섭리를 베풀고 있지 않을까요?…이 드넓은 우주에서 지구와 인간만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사실은 세들어 사는 주제에), 너무 파렴치하고 우스꽝스러워요…외계인을 자기 위주로 상상하면서 기괴하다고 비웃지만 실상을 보면 인간이야말로 괴상하지 않을까 싶단 말예요…아마 개미나 벼룩에게도 나름대로 신이 있을 거예요. 인식 차이일 뿐…미물들의 신을 비웃기보다 인간 자신의 과대망상을 먼저 깨뜨리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만고불변의 진리를 추구한다는 종교인들이 서로 자기네만 옳다고 싸운다면 벼룩이 비웃고 모기가 오히려 진리의 침을 찔러댈 거예요…무신론자보다 신앙인들이 더 격렬히 신을 향해 '왜 죄 없는 사람에게 이토록 심한 고난을 주시나이까?' 하고 울부짖기도 하는데 그런 의문의 실마리는 혹시 신에 대한 인간들의 착각으로 인한 과대망상이 원인이 있지 않을까?”


“그래도 어쨌든 이 오염된 행성인 지구상에 살아가야 하니까요.”


“하긴 날개를 지닌 나비나 파랑새도 날아다니다가 지상의 풀 혹은 나무 위에서 쉬어야 할 테니까…소박한 고향 땅에서 순수한 마음으로 불러 본 하느님은 저 아득한 우주로부터 메아리로 대답할지도 모르지. 호호….”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언젠가 그런 날이 오려나….”


“지구가 폭파돼 우주 속의 한 점 먼지로 변해 버리거나 진짜 푸른 보석 별로 반짝이거나 하겠죠.”


“호호, 백일몽….”


“과대망상….”


두 남녀는 마주보고 웃었다.


“신당은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고 늘 소박한 그대로 유지하시겠군요?”


“글쎄, 계절 따라 꽃이나 좀 제때 갈아놓으면 되겠지 뭐.”


“아까 언뜻 보니 과일만 몇 가지 진설돼 있던데 소박하다 못해 너무 소홀한 것 아니에요?”


“그런 셈이긴 하지 뭐. 하지만 갖가지 음식을 잔뜩 진설해 놓기도 어려워. 신령님께서 흠향하신 과일은 내가 먹거나 파출부 아줌마가 가져가니까 매일 새로 올릴 수 있지만. 요즘은 잘 썩지 않게 처리한 음식이나 인조 모형 과일 따위를 진설하기도 한다지만 어찌 그럴 수야 있겠어.”


“처음 듣는 얘기네요.”


그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그저 풍문에 불과할지도 모르지. 어쨌든…요즘 세태처럼 허례허식에 빠지기도 않고 나처럼 빈약하지도 않은 진짜루 장엄한 신당을 보려면…강화도의 백화 스승님이 계신 곳으로 가 보면 되겠지. 지킬 것은 꼭 지키고 버릴 것은 허공 같은 빈 마음으로 버리고…그곳에선 음식을 많이 장만해 올려도 매일 깨끗이 정리돼 새날엔 늘 새것을 올린다더군.”


“음, 그렇군요. 많은 사람들이 나눠 먹는가 봐요.”


“그곳도 요즘은 출입하는 사람이 그닥 많진 않은가 보던걸. 이젠 연로해서 가능하면 활동을 자제하시기도 하지만, 원체 엄격한 분이라 제자들이라 해도 오래 붙어 있진 못한다더군…그곳 신당에 올렸던 음식은 신약(神藥) 같다고 해서 사람들이 소중히 여겨 나눠 먹기도 하고, 배고픈 거지들이 몰려와 얻어 가니 금세 사라져 버린다던걸…….”

 

Q는 찻잔을 들어 마시고 나서 가볍게 미소 지었다.


“이만 가볼까 합니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래요. 나도 오랜만에 좋은 얘기 많이 나눴어요.”


여인은 정원 앞에 서서 생긋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다음에 또 봐요. 좋은 얘기만 기억하고 실없는 소린 잊어버려요. 왠지 상상 속의 막내동생 같아서…너무 마구 지껄여댔는지도 몰라. 알았죠?”


여인은 사내의 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네, 그럴게요. 저도 누님 같은 느낌이 드는군요.”


Q는 대답하곤 잔디 마당에 깔린 자갈길을 지나 대문 밖으로 나섰다.
개들이 작별 인사인지 뭔 엄포인지 헷갈리게스리 컹컹 짖어댔다.


<다음 호에는 ‘성령’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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