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4> 제1부 짐짓 심각한 포르노

음란 포르노는 사람을 누추하고 허망하게 만든다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20/01/17 [10:46]

김영권 세태풍자 소설 ‘불 꺼진 무인등대’ <4> 제1부 짐짓 심각한 포르노

음란 포르노는 사람을 누추하고 허망하게 만든다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20/01/17 [10:46]

온 세상 천지 포르노물 만연…독야청청 쉽지 않은 세상
인생 유한한데 욕망 무한…대부분 곧 자제하리라 믿어

 

애완견 기르는 1층집에 어느 날 밤 묘한 남자 찾아들고
1층 여인과 사내 살벌한 악다구니…애처로운 딸의 호소
‘사실 걘 친딸 아니란다…바람둥이가 밖에서 낳은 핏덩이’


아침빛이 점점 밝아와 유리창을 아리땁고 그윽한 연분홍 장밋빛으로 물들였다. 첫사랑을 느낀 소녀의 볼 같았다. 이어 첫 경험을 치른 순결한 처녀의 핏빛처럼 장엄해지더니 마침내 맥달뜬 여인의 미소인 양 찬란해졌다가 곧 평범한 일상의 색조로 변해 갔다. 지하방이기에 그 빛은 한결 귀중스레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인생 유한한데 욕망 무한


Q는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눈을 감곤 생각에 잠겼다.
‘인생은 무엇이며, 인간의 운명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사람은 만나보면 알고, 어려운 책도 읽다 보면 웬만큼 이해되고, 왕궁의 최고급 의식주 같은 것도 몇 번 체험해 보면 실상을 느끼게 될 텐데…왜 나 자신의 삶과 운명에 대해선 수십 년을 돌고 돌아봐도 오리무중일까?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할 텐데 오히려 반대거든.

 

미용사가 제 머리 못 깎고, 재단사가 제 몸 칫수 못 재고, 요리사가 제 밥상 안 차리는 것 하곤 좀 다른 성싶어. 점쟁이가 제 신수 모르고, 관상가는 제 얼굴의 본질을 못 보고, 무당은 자아를 완전히 버려야만 신령과 교류한다는데…우리가 자기 운명을 통찰할 수 없는 건 어떤 형태로든 우리의 심안(心眼)을 가로막고 있는 갖가지 욕망 때문이 아닐까?


약간 부적절한 비유일지 모르지만…예를 들어, 포르노의 경우를 상정해 보자. 온 세상 천지에 포르노물이 만연한 상황에서 그것으로부터 독야청청하긴 쉽지 않다. 그건 인간의 본성적 욕망 중 하나를 일그러진 대로 생생히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음란 포르노는 꼭 사회 법률적 제재가 아니더라도 사람의 마음을 누추하고 허망하게 만드는 게 사실이다.


인간에겐 동물적 욕망뿐만 아니라 고상함을 지향하는 정신적 욕구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인간은 신성과 악마성 사이에 가로놓인 사다리 위에서 고뇌하는 존재라고도 한다만….)


포르노를 보고 있을 땐 차라리 괜찮다. 하지만 일상생활의 소중스런 시간들이 문제다. 음란물에 중독된 정신은 좀비화되어 더 이상 진실을 추구하는 행복도 생명의 순수한 희열도 아름다움도 느끼기 어렵다. 허위와 추악 속에 가라앉는 게 더 편하기 때문이다.


정욕에 물든 인간은 영혼과 육신이 뒤집힌 채 삭막한 거리를 짐승마냥 헤매기 마련이다. 해맑은 정신은 설령 현실의 구렁창을 절뚝절뚝 걸어다니더라도 늘 푸른 하늘로 비상할 수 있기에 흐뭇하련만….


인생은 유한한데 욕망은 무한하다. 사람들은 대부분 곧 자제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욕망의 심해(深海), 포르노의 바다를 항해하는 건 끝이 없다. 망망대해라고나 할까. 정욕의 베일에 눈이 가려 버린 사람은 친구와 연인뿐만 아니라 부모·자식, 형제·자매, 스승·제자, 소년·소녀까지도 모두 애욕의 먹이로 보게 된다. 그야말로 성지옥이 아닐 수 없다. 볼 만큼 보고 나면 성욕 지옥에서 벗어나는 게 아니라 더욱 강렬한 표현을 찾다가 결국 현실과 망상의 경계선을 넘어 성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자유는 참 좋고 고귀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자제의 미덕 없이 극단적으로 방종스러워진다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추락해 악마의 졸개 노릇을 할 수밖에 없으리라.

 

▲ 요즘처럼 삿된 욕심 추구가 자유로 오인되는 시대엔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강제하는 자율정신이 훨씬 더 요긴하지 않을까? <이미지 출처=Pixabay>    


이제 포르노 얘기 그치고 본론으로 돌아가자. 조금이나마 자신의 인생을 파악하고 운명을 예견해 아름답게 만들려 한다면, 포르노 같은 찰나적인 욕망 탐닉들의 연속을 자유라고 착각하기보다, 육신의 행복뿐 아니라 정신과 영혼도 숨쉴 수 있도록 자율하는 마음을 1년에 1밀리미터라도 새싹인 양 키워가야 하지 않을까. 강금(强禁)의 시대엔 물론 자유가 필요하겠지만, 요즘처럼 삿된 욕심 추구가 자유로 오인되는 시대엔 자기가 자신을 스스로 강제하는 자율정신이 훨씬 더 요긴하지 않을까?

 

윗집 개 또 앙칼맞게 컹컹


Q는 천장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별안간 위층에서 개가 캬르릉 카릉 앙칼맞게 짖어댔다.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듯싶고 머릿속의 생각들이 일순간에 날아가 버렸다. 스피츠 견종이긴 하되 불시에 발악하듯 목청껏 왈왈대면, 일단 먼저 헛기침을 한 후 컹컹 고함치는 대형견 못잖게 시끄럽고 위협적이었다.


Q는 원래 개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어릴 땐 강아지 데리고 나가 함께 먹고 살라는 핀잔을 엄마로부터 들었을 정도였다.
아, 얼마나 귀여운가! 사람 아이들보다 이기적이지 않고 천사처럼 순진무구한 벗, 외로움을 이해하여 주는 존재…자랄수록 점점 의젓해져 사람의 고민까지 나눌 수 있는 친구, 현실이 죽을 만큼 힘겹더라도 힘을 내라며 말없이 격려해 주는 쓸쓸한 영혼의 반려, 주인에게 해로우면 목숨을 바쳐 잡귀까지 쫓아내 준다…그랬건만 왜 이토록 원수지간이 되고 말았을까…?


Q는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심호흡을 두어 번 했다. 개는 더 극악스레 짖어댔다.
‘아, 창문을 열고 위층을 향해 치명적인 독설을 내뱉을 것인가, 참아내고 속으로 삼킬 것인가? 정녕코 문제로다.’


2층 3층에서 일찍 출근하는 사람이 계단을 내려오자 1층의 개는 더 앙칼맞게 짖어댔다.
Q는 이를 악물었다.


‘음, 흥분해 봤자 나만 손해야. 자제심을 기르는 기회로 삼아 진정하라구. 일부러 시간과 돈을 내서 해병대 캠프 등으로 극한 상황을 체험하러 가기도 하는 세상이잖아.

 

흠, 그런데 인간에게만 운명이란 게 있고 개나 새 같은 짐승에겐 운명학이 적용되지 않는 것일까? 벌레나 식물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에게도 생년월일시와 얼굴, 족상과 발금, 식물에겐 꽃과 가지와 잎맥 따위가 갖춰져 있으니 말야…인간에게만 이치적인 운명학이 필요하고 동식물에겐 자연적인 우연이 운명이라 말한다면…자칭 만물의 영장님의 오만으로 인한 비이치적 부자연이 아닐까? 그들을 잡아먹을 수도 있는 인간 입장에선 하찮게 무시해 버리기 쉽겠으나, 신의 경지에서 봤을 땐 아마 대동소이하리라.


여기서 운명학의 시시비비를 가리려는 건 결코 아니다. 문제는, 층간소음 등등으로 심한 피해를 지속적으로 주는 인간들은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거나 일부러 혼동스런 척하며 사실은 저열한 이기심으로 무장한 채…인간성을 짓밟고 신의 권좌에 오르려 획책하거나(또는 신을 자기 욕망 속으로 끌어내려 추악하게) 더럽히고 있지.

 

그러면서도 애완용 개를 신주처럼 모시고 있으니…적어도 이 집에서 만큼은 개의 운명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지. 정말 죽이고 싶어! 개보다는 사이비 동물, 만물의 영장을…아, 그동안 얼마나 괴상스런 상상을 하며 분노를 삭였던가? 어찌 보면 한 편의 조악한 엽기 영화 같았지….’

 

이삐와 중년 여인 그리고 딸


맨 처음 소음 문제로 항의하러 갔을 때, 1층 여자는 고민 서린 표정으로 말했다. 자기도 개가 무척 싫은데, 딸애가 일상적인 인간관계에 잘 적응하지 못해 걱정하던 끝에 전문가의 조언으로 애완견을 입양케 됐다고…평범하고 좀 통통한 그 아줌마는 어딘지 슬슬 천박하고 통속적인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바로 옆에 털빛이 새하얀 스피츠 놈이 붙어선 채 으르렁거렸다. 저놈의 목을 꽉 졸라 버리면 좋겠다고 몽상해 보는데…‘엄마, 왜 그래?’ 하는 어여쁜 목소리와 함께 한 아가씨가 사뿐사뿐 걸어왔다.

 

뭔가 잘못되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엄마라는 중년 여자와는 아주 다른 얼굴이었다. 육체적인 미와 정신적인 미를 대립시키기도 하지만 그걸 뛰어넘는 성결한 아리따움이라고나 할까. 10대 소녀인 듯 20대 처녀인 듯…요즘 세상에 어찌 저런 묘령의 성결미를 지닐 수 있을까!


‘엄마, 저분 뜻대로 해드려요. 이삐가 귀엽긴 한데 사실은 나도 너무 캉캉 짖어댈 땐 싫단 말야.’
‘얘가 왜 이래. 그동안 아무 소리 않고 사랑스러워하더니?’


딸의 말을 엄마가 반박했었지….


‘어릴 땐 아기 옹아리 소리처럼 귀여웠지만 이젠 점점 목청이 커져서 정신이 깜짝깜짝 놀란단 말예요. 그러니 저 아찌 말씀처럼 성대 수술을 하거나 우선 목테를 한번 채워 봐요. 남한테 피해를 주면 하느님이 먼저 벌을 내리신단 말야.’


‘아무리 짐승이라도 그렇지, 어찌 자연스레 나오는 소릴 막으라는 거야, 응?’


‘조용히 멍멍 몽몽 얘기하는 습관을 들이면 아빠한테도 좋고 나두 즐겁고 저 아찌두 기뻐하실 테야. 엄마, 나 이젠 괜찮아. 설령 이삐가 없더라도…이웃에 피해를 주는 것보다는….’


‘어휴, 변덕스럽긴 지 애비보다 더 심하구먼…얘, 알았으니 그만 네 방에 들어가서 영어 단어라도 하나 더 외우든지 하렴. 그렇게 외간 남자 얼굴을 말끄러미 쳐다보지만 말구….’


‘엄마두 참….’


딸의 하얀 볼이 발그스레 물들었다.
뚱뚱한 엄마가 말했다.


‘아저씨, 우리도 가능한 좋은 방법을 찾아볼 테니 좀 이해하구 기다려 주세요. 굳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남자분이 너무 신경과민이어도 세상 살아가기 힘들 거예요. 자, 그럼 이만….’


매정스레 쾅 닫힌 문 밖에서…왠지 마음속 적개심이 싹 사라지고, 요즘 세상에선 보기 어려운 아가씨의 성결한 큰 눈만 점점 확대되어 어룽거렸지. 마치 영혼이 들여다보일 듯…천상의 그윽한 호수 같은…너무 맑아서 곧 훼손돼 버릴 듯한….


그는 서서히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 이틀 좀 조용했을 뿐 다시 개소리가 귀청을 울렸어. 성결한 그녀의 눈을 떠올리며 참으려 했지만 결코 쉽잖은 노릇이었지. 만일 바로 앞에서 그 눈을 바라보고 있다면 아마 더 그악스런 소리마저 잊어버리지 않았을까.

 

며칠 후 다시 찾아갔어. 뚱뚱보 여자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원망스레 우는 소릴 내뱉었지. 소음 방지용 목테를 채워두고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개가 발작을 일으켰는지 발톱으로 제 눈과 입을 마구 긁어 피가 흥건히 흘렀다는 얘기였어.

 

사람 아이도 종아리에 피멍이 맺히도록 회초릴 맞으면 교육받아 성장하니 좀 더 지속해 보라고 대꾸했더니만 화난 표정으로 노려보며 내쏘더군. ’그렇잖아도 딸애가 아저씨 땜에 신경과민이 될 지경이라 내일 성대수술을 할 예정‘이라고. 비장스런 독기를 띤 눈이었어. 혹시 딸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더 개를 애착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지.

 

어쨌든 애완견 훈련센터에도 연락해 놓았다고 하기에, 정중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왠지 문득 허전하더군. 영혼의 슬픔이 어린 듯한 그 순수한 눈을 보지 못해 그랬는지도 몰라….’


그는 서글픈 기분을 털어 버리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찌 그런 아가씨가 존재할 수 있는 걸까? 영화도 그림도 아닌 이 현실에…단순히 이목구비가 예뻐서 이러는 게 아냐. 정신과 영혼이 내비칠 만큼 투명한 얼굴을 지닌 처녀가 어떻게 저런 후안무치한 아줌마의 몸에서 태어날 수 있으며, 더구나 이 삭막한 세상에 마치 한겨울 나비인 양 살아 견디느냔 얘기지. 아, 정말 하느님이나 신이 없다고는 감히 말하기 어려워. 혹시 친딸이 아니라, 계모인지 어쩐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더군…어쨌거나 조용해졌다면 좋았으련만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지.

 

특히 베란다 쪽 창문을 열어 놓으면 개놈이 심호흡을 하며 제 맘껏 짖어대기 때문에 심장이 깜짝깜짝 놀라 내려앉곤 했어. 귀중한 생각도 명상도 개 한 마리 때문에 파괴되고 말면…그놈의 대가리와 철면피 여자의 머리를 도끼로 찍어 잘라 서로 바꿔 달아 놓고 싶은 심정이더군.

 

개 대가리를 사람 목 위에, 사람 머릴 개 몸뚱이에 붙여…그것만으로 찌르는 듯한 심장의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아예 사람과 개를 함께 산 채로 가마솥에 집어넣어 펄펄 끓여서는 사육견에게 던져주는 공상까지 했지. 그리고 때론 온 정신을 모아 레이저로 만들어서 개년놈을 흔적 없이 살해하려고 흑마술을 실제로 연성해 보려다가…그저 죄 없는 처녀의 순결한 눈동자에 입 맞추는 몽상을 하며 겨우 견뎌내기도 했어….’

 

위층 여자, 사내, 그리고 딸


그러던 어느 날 밤 1층집에 어떤 묘한 남자가 찾아왔다.


비가 주룩주룩 내려 약간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들려는데 별안간 천장 위쪽이 우당탕거리고 상스런 욕설과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빗소리를 뚫고 뚜렷이 귀청을 울릴 정도로 예사롭지 않았다. 개 녀석도 공포스런 상황을 감지한 듯 유난스레 왈왈 짖어댔지만 먼 구석방에 가둬두었는가 싶게 아련한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 비가 주룩주룩 내려 약간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들려는데 별안간 천장 위쪽이 우당탕거리고 상스런 욕설과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이미지 출처=Pixabay>    


싸움은 점점 격렬해졌는데, 아마 아까 빗소리에 취해 있는 사이 남자가 방문해 이런저런 얘길 나누다가 불현듯 이전투구 상황으로 번진 성싶었다. 이웃집의 불화나 싸움은 무척 싫어하는 집안일 경우 격해질수록 더욱 호기심이 동하고 점점 흥미로운데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살벌한 악다구니 속에 그 처녀의 애처로운 호소가 섞여 들었기 때문이었을까. 딸은 울부짖으며 싸움을 그만두길 애소했으나 중년 남녀의 드잡이는 격심해질 뿐이었다.


그는 창문을 열어둔 채 빗줄기를 향해 조용하라고 채근하며 귀를 곤두세웠다.


‘이 쌍놈아, 니가 왜 얘 애비야! 뭘 해준 게 있다고, 응?’


‘그럼 너 혼자서 낳았니? 개 같은 년이 성모 마리아 흉낼 내려 하는군.’


‘그래, 나 혼자 낳았다! 내가 병원에서 진통으로 생사지간을 헤맬 때 넌 코빼기도 안 보이고 대체 어디서 뭘 했니? 잘난 그림 그린답시고, 예술의 도를 닦는답시고…희희낙락거리며 창녀 같은 계집과 어울려 술이나 처마시고 있었겠지.’


‘설령 창녀라도 너 따위보단 진실하고 고상해. 이 얼음장 같은 자본주의 세상의 음독에 마음이 마비돼 버린 너야말로 천박스런 창녀가 아닌지 스스로 한번 물어 봐.’


‘흥, 제 손으로 돈 벌어 딸내미한테 장난감 하나 사준 적이 없는 네놈이야말로 악마보다 덜된 위선자야. 더 이상 두말 듣기 싫으니 썩 꺼져 버려!’


‘그렇게 흥분하지 마라. 결론만 제대로 난다면 제트기 탄 듯 곧장 떠날 테니까. 그런데 넌 항상 서론부터 어깃장을 지르기 때문에 문제야.’


‘서론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으니, 경찰 부르기 전에 곱게 사라지라구. 기분 내킬 때만 술 처먹고 와서 허장성세 부리지 말고 평소에 신뢰감을 쌓아 놓아야지. 실속은 없이 낯빤대기만 번드르하다고 누가 평생 속을 줄 알어? 제 앞가림도 사람답게 못하는 주제 꼴에 왜 나타나서 내 딸앨 데려가려 지랄이야, 지랄은….’


‘영원히 데려가는 게 아니라 한 달쯤 가 있는다는데 웬 난리 법석이야? 그리고 우리 희연이도 그러고 싶다잖아.’


‘순진무구한 애 데불고 가서 무슨 나쁜 물 들이려고 그래, 응? 안 돼!’


‘당신이 외출하고 나면 희연이 혼자 외롭게 지내야 하잖아. 아무리 파트타임 근무라지만 일단 나가면 밤늦게 들어올 때도 많고 말야. 애 생각도 해야지.’


‘흥, 내가 잘난 누구처럼 한 달에 한번씩 슬쩍 들르는 것도 아닌데 뭔 걱정하는 척하구 그래. 희연인 이삐하구 함께 잘 지내고 있으니 괜스런 염려일랑 싹 접어두셔.’


‘그깟 강아지가 희연이의 고독을 얼마나 이해하겠니. 넌 항상 너 자신을 잣대로 삼아 남을 판단하는데, 희연이한텐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래 마음이 여린 희연이는 엄마가 애지중지하는 이삐를 수용해주는 거지, 걔 자신이 강아지를 무슨 마니아 마냥 유별스레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방안에 갇혀 절규하는 이삐를 오히려 희연이가 연민의 정으로 다독여 주는지도 몰라.’


‘그럼 대체 내가 내 딸을 가둬 둔 채 괴롭히고 고문한다는 얘기야 뭐야, 응? 호호호….’


‘그런 말은 하지 않았어. 하지만 딸애를 진정 사랑한다면 현실을 좀 바로 보자구. 창백한 얼굴에 간혹 미소를 짓긴 하나마 점점 몸이 여위고 말수도 적어지잖아. 저러다가 기어코 정신마저 이상해져 병원에 입원할 지경이 돼야만 잘못을 깨닫겠어?’


‘저런 악담을 지껄이다니!…너야말로 천하 없는 정신병자야! 넌 남편도 아빠도 아무 자격이 없는 사악한 작자란 말야!’


‘그래, 알았어. 내가 이기적인 나쁜 놈이야. 예술을 빙자한 악마인지도 몰라…그래도 이번엔 내 부탁을 좀 들어줘. 비록 괄시받는 무명 화가지만…프랑스 화랑 측에서 초청해 부담없이 여행할 수 있는 기회니만큼…희연일 데리고 가서 빠리 구경을 시켜 주고 싶어.’


‘바로 그게 믿을 수 없어서 더 걱정이라니까 그래. 뭘 믿고….’


(바로 그때 가녀리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아냐, 엄마, 너무 걱정 마…난 아빠 따라 가보고 싶어….’


‘뭐라구? 얘, 너 진심이니?’

 

홀로 남은 여인과 이삐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딸의 해맑은 목청 대신 엄마의 비탄 어린 흐느낌이 빗소리에 섞여 젖어들었다. 배신감 때문이었을까.


딸이 떠난 뒤부터 여자는 이삐라는 개를 마치 자식인 양 귀여워하며 속에 든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얘, 이삐…엄마 말 잘 듣고, 편식하지 않아야 건강해진단다. 자, 이것 좀 먹어 봐. 엄마 말 잘 들어야지. 착한 아이라니깐. 그래, 옳지.’
캉, 캉!


‘아유, 예뻐라! 우리 이삐하구 엄마하구 둘이만 있으니 참 좋아. 이삐야, 엄마하구 영원히 함께 살자꾸나, 응?’
캉, 캉캉….


‘사실 희연이 걘 이 엄마의 친딸이 아니란다. 그 쪼다같이 생긴 바람둥이 놈이 밖에 딴년한테서 낳은 핏덩이를 데려온 것이지. 이삐야, 넌 그때의 이 엄마 맘을 이해하겠니?…그래도 난 티내지 않고 친딸인 양 키웠건만, 그렇게 매정스레 파린지 모긴지 훨훨 날아가 버리다니…역시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둬 줄 게 못 돼. 그렇지 않니?’
캉캉, 캉캉캉….


‘엄마가 정이 너무 많아서 탈이야. 이번 기회에 엄마두 차라리 헛된 정 따윈 끊고 신세를 바꿔 버릴까 싶기도 해. 등산회에서 만난 어떤 사장 아찌가 작업을 걸어오는데 어쩔까, 응?’
카앙, 캉!


‘그래, 알았어. 이삐가 질투하는 거야? 호호호….’


악감정 어린 선입관 때문인지 몰라도 그닥 곱게 들리진 않았다. 외로운 인간과 개가 서로 교감하는 건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지만, 개 소음으로 인한 이웃사람의 고통은 모른 척하면서 주범인 개를 사람보다 더 귀중스레 대접하는 저 심보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개가 사람인지 인간이 개인지 혼돈스러울 지경이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희연일 친딸처럼 키웠다는 건 거짓말일 거야. 혹시 본인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애의 변형일 가능성이 더 많아. 어쩌면 희연이는 저 자칭 개 엄마의 변질된 자기애로 인한 희생물일 수도 있어. 이웃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사실이 바로 그 증거라고나 할까?….’


<다음 호에는 ‘대긍정론’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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