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3부 <6> 슬픈 막달레나

기지촌 흘러든 여자들 중에는 ‘애달픈 심청’ 많았다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19/11/01 [11:20]

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3부 <6> 슬픈 막달레나

기지촌 흘러든 여자들 중에는 ‘애달픈 심청’ 많았다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19/11/01 [11:20]

부모의 병 고치고 오빠·남동생 학비 대기 위해 몸 팔며 희생
미군은 그 여자를 몇십 달러에 사서 황색 노예처럼 갖고 놀아

 

미군은 달러로 양공주 사고…양색시는 화대로 PX 미제품 사고…
PX 물품은 아줌마들을 거쳐 남대문 도깨비시장, 명동 백화점으로

 

일제시대부터 왜관(倭館)을 중심으로 해 매춘이 성행했던 부산은 미군기지가 들어선 이후 동두천과 함께 한반도 최대의 기지촌을 이뤘다. 초량 텍사스촌을 비롯해 범전동·완월동 등지가 유명했다.


부산의 중심가인 서면 뒤쪽에 자리 잡은 하야리아 부대는 한반도 남부 지역의 요충지이자 거대한 병참기지였다. 한국 제2 도시의 중심부에 또아리 틀고 자리 잡은 그 거대한 미군부대는 높다란 회색 담벽 위에 전기 철조망을 겹겹으로 쳐 놓아 무척 위협적이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 속한 작은 도시 가운데 하이얼리어(Hialeah)라는 마을이 있는데 어떤 미군 사령관이 향수를 달래기 위해 그런 이름을 붙였다는 얘기도 있었다.

 

양코배기 장교의 여인


기지 내의 고급 주택에 보금자리를 틀게 된 정인은 양코배기 미군에게도 따스하고 고상한 인품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느꼈다. 그 장교 크리스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정인의 여린 육체보다는 결함 있는 정신을 더 사랑했다. 신성한 사랑으로써 반불구적인 정인의 정신을 회복시키고 영혼 속에 하나님의 애정을 주입시키려 애썼다. 그는 그녀를 진정으로 가엾어 하면서 악의 구렁창 속에서 꺼내 새사람으로 만들려고 기도했다.


정인은 쾌적한 장교 아파트에서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녀는 매일 아침 영어로 씌어 있는 신약성경을 억지로 한 구절씩 읽고 크리스의 설명을 들어야 했으며, 주일엔 부대 내 교회에 참석해 예배를 드린 후 신앙심 깊은 새로운 여자들을 만났다. 옛 친구들과의 교류는 엄격히 금지되었다.

 

거실 벽엔 커다란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침실 침대맡 탁자에도 성스런 예수의 초상화가 놓여 있었다.


식사 때마다 크리스는 엄숙한 표정으로 감사 기도를 올렸다. 식탁엔 주로 빵과 버터, 우유, 햄버거, 콜라, 수프, 비프스테이크, 샐러드 등 양식이 놓였다. 김치나 된장찌개는 크리스가 질색했기 때문에 절대 금지였다.


정인은 표현하진 않았지만 하루하루가 은근히 고통스러웠다. 다른 양식도 그랬지만 특히나 육고기는 전혀 못 먹었기에 식탁 앞에서 구역질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크리스는 의외로 강경하게 한식에 대한 추억을 끊고 양식과 육고기에 익숙해지라고 반강제적으로 요구했다. 앞으로 미국에 가서 살게 될 테니 미리 잘 적응해 놓아야 한다고 구슬렀다.


크리스는 자기 나름대로 정인을 사랑해 재생의 길을 열어 주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의 감정은 점점 메마르고 몸은 야위었다. 차라리 가난할지언정 정겨운 사람들을 만나 속을 나누고, 좁은 온돌방에서 자고 된장국에 보리밥 한 술 말아 김치와 함께 먹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미군부대 PX와 암시장


그즈음 어찌 알았는지 갑자기 계모가 나타났다. 아버지가 죽을 병에 걸려 큰 수술을 해야 하니 돈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그토록 악독하던 얼굴이 살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정인은 울면서 금목걸이와 다이아몬드가 박힌 팔찌를 건네주었다. 아버지를 한번 보고 싶다고 말하자 다음에 보자며 짐짓 흐느꼈다. 하지만 불쑥불쑥 나타나 돈이나 패물을 받아 챙겨선 휑하니 사라지곤 했다.

 

▲ 1950년 8월18일, 미군 준장이 이제 막 개장한 부산의 한 PX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모습.    


크리스와 안면을 트고부턴 혀 짧은 소리로 어쭙잖게 영어를 지껄이면서 독실한 기독교인인 척 성경 구절을 읊조리곤 했다. 그리고 정인을 마치 친딸인 양 무척 예뻐하면서, 오랜 세월 자기가 곱게 잘 키웠다고 손짓 발짓으로 강조하곤 했다. 정인은 예전에 받은 구박일랑 싸그리 잊곤 백치같기도 하고 천사같기도 한 미소를 지었다.


계모는 악녀 본색을 감춘 채 자애로운 엄마를 연기하며 한 달에 한 번씩 꼬박꼬박 찾아와서는 병원비 명목으로 달러를 챙기고 값비싼 미제 물건들을 선사받아 갔다. 아버지의 병환이 사실인지 어떤 상태인지 크리스는 잘 몰랐지만 엄마와 함께 구슬피 흐느끼는 정인의 모습이 안쓰러운 나머지 선뜻 돈을 내밀었다.


기지촌에 들어와 몸을 파는 여자들 중엔 자신의 향락이 아니라 궁핍한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부모의 병을 고치고 오빠나 남동생의 학비를 대기 위해 희생하는 애달픈 ‘심청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미군들은 대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 여자들을 단돈 몇십 달러에 사서 황색 노예처럼 갖고 놀며 그들은 매음이 아니라 일종의 자선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녀들이 몸을 판 덕분에 겨우 목숨을 잇고 대학을 마치고 마침내 고등고시에 합격해 웃음꽃을 피우게 된 부모 형제들이, 만신창이가 된 그녀를 양갈보라 욕하며 외면하고 나아가 족보에서마저 삭제해 버린다는 사실을 아는 미군은 아마 없었으리다.


한 달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씩 점점 자주 들락거리던 계모는 정인이 임신을 한 뒤부터는 아예 아파트에 들어와 눌러앉았다. 하지만 몸조리를 돌보긴커녕 어떡하든 돈을 빼낼 사악한 궁리만 했다.


급기야 계모는 크리스에게 미군부대 PX의 일상용품과 가전제품 따위를 빼내 도와 달라고 부탁했다. 요즘 한국에서는 돈과 물건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특히 교회에서 기독교를 선교하려면 미제, 즉 made in U.S.A의 고급 물품이 필요하다고 꼬드겼다.

 

처음엔 화장품, 치약, 비누, 샴푸, 치즈, 커피, 초콜릿으로 시작했는데 차츰 라디오, 만년필, 면도기, 만능칼, 카메라, 믹스기, 티브이 세트 등으로 커져 갔다. 조니워커와 말보로 담배 따위도 슬쩍슬쩍 끼어들었다.

 

처음엔 난색을 표하던 크리스는 날이 갈수록 의외로 순순히 받아 주었다. 계모는 그것들을 암시장(black market)에 내다 팔아 주머니를 채웠다.


정인은 그런 요지경 세상에 대해 잘 몰랐지만 블랙마켓의 암세포는 상당히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무슨 짓을 하든 한국 땅에서는 돈만 많이 벌면 장땡이라는 생각에 미친 계모 같은 여인네들이 동두천뿐 아니라 전국 각지의 기지촌에 기생하고 있었다.

 

물론 잔챙이들은 가족의 생계 등 먹고 사는 절박한 사정으로 위험스런 일에 뛰어들지만 이른바 큰손들은 황금알을 뽑아내는 사업으로 여기고 부정부패한 짓을 일삼았다.

 

그게 가능한 건 미군 장교나 고위급 관계자의 도움이 있기 때문이었다. 단속은 엄했으되 통하는 구멍은 있기 마련이었다. 송사리가 통과하는 구멍엔 촘촘하고 엄한 그물이 쳐져 있었으나 가물치가 드나드는 구멍은 어둑하고 넓었다. 원래는 유유히 흘러가던 자연 속의 강이었으되 이젠 돈독에 오염된 개골창으로 변해 버린 그곳엔 온갖 기형 물고기가 복작거렸다. 오직 생존이라는 이름으로….


미군과 동거하거나 결혼한 여자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영내 PX에 들락거리며 전용 카드로 미제 물건을 사 모았다. 한 번에 10달러 이하의 구매일 경우는 월 할당 금액에 가산되지 않는 점을 이용해 부대 내의 여러 매점을 빙빙 돌며 사들이는 ‘뺑뺑이 돌리기’도 넉살좋게 해치웠다.

 

양공주뿐만 아니라 영내의 식당, 카페, 미장원, 세탁소, 심지어 청소부까지도 미군과 짜고 부정을 저질렀다. 미군들 역시 엄격한 복무 수칙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돈이 필요했기에 밑천 들지 않는 장사에 맛을 들인 것이었다.

 

‘중대장 물품 승인서’로는 개인 카드보다 훨씬 고가의 가전제품 등을 다량으로 구매할 수가 있었다. 만일 대대장, 연대장, 사령관 급과 관계를 맺게 된다면 그 규모는 아마 상상을 초월할 터였다.

 

PX의 물품은 원칙적으로 미군을 위한 것이었지만, 어쨌든 다양한 루트를 통해 막대한 미국산 제품이 부대 밖으로 빠져나가 한국인들에게 판매되었다.

 

형식상 일부 비합법적 행위가 개입됐다곤 하더라도 대부분 돈을 내고 구입하는 상황이기에 미국으로서는 미군부대를 매개로 해 사실 엄청난 물량의 상품을 팔아먹는 셈이었다(혈맹 우방국에 대한 실례라고 생각될지 모르지만, 실상 동서고금의 모든 대국은 소인국에 대해 그런 식의 눈 가리고 능청 떠는 장사를 했다-지은이 주).


그렇게 해서 PX를 빠져나온 미제품은 전국 각지의 암시장에 풀려 날개 돋힌 듯 팔려 나갔다. 미제 물건 하나만 가지면 은근슬쩍 어깨에 힘을 넣고 개폼을 잡는 시절이었다.

 

간단하면서도 복잡하고, 복잡하면서도 간단한 관계… 돌고 도는 검은 바퀴의 회전… 미군 병사는 달러로 양공주를 사고, 몸 판 달러 화대로 양색시는 PX 미제품을 사고… 그런 각종 물품은 일선 판매 아줌마들의 손을 거쳐 남대문 도깨비시장, 명동 백화점, 이태원 따위로 퍼져 나갔다.

 

▲ 양공주인 소냐와 기지촌에 빌붙어 사는 남자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영화 ‘지옥화’ 한 장면.    

 

딸 잃자 정신줄 놓은 정인


정인의 계모와 크리스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서로 속닥속닥 계획을 짜서 거금을 챙기는 모양이었다. 선교 사업이니 고아원이니 양로원 복지시설이니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정인은 난산으로 계집애를 낳았다. 거의 죽어가다 살아나서 그런지 아기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트기였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어여뻐졌다. 한국 아이와 미국 아이의 고운 점만 모아 신께서 잘 조화시켜 놓은 것만 같았다. 엄마 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는 건강한 모습으로 방긋방긋 미소지었다.

 

크리스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며 좋아했다. 그런데 아기가 엄마, 맘마라는 말을 겨우 익혀 재롱을 떨 무렵부터 계모가 끼어들어 분란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저런 멍청한 에미 품에 맡겨 놨다간 아이도 바보 되기 알맞다니깐. 앞으로 세상이 어찌 돌아갈진 모르지만, 아가야, 네 아빠 나라인 미국은 변치 않고 우뚝할 거야. 그러니 이제부턴 엄마라고 하지 말고 마미라고 해야 돼, 알았지? 자, 따라해 봐. 마미~.”


아기는 짙은 화장을 한 할머니가 무서운지 울음을 터뜨렸다. 정인이 아기를 보듬으려 하면 계모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거칠게 밀어냈다. 크리스의 눈치를 살피며….


“애가 운다고 다 받아 주면 버릇만 나빠져. 알겠니?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그래. 내가 잘 키워 놓을 테니 넌 그냥 가만 있어.”


“안 돼요. 애기가 저렇게 빤히 바라보고 웃는데….”


“니가 불쌍해 보여서 비웃고 있는 것이야. 엄마란 게 애보다 더 칭얼거리니 깔보는 거지. 호호호….”


그러고는 모유 속에 이상스런 정신병 유전 성분이 들어 있을지 모른다면서 굳이 우유를 먹였다. 그리고 크리스에게 뭐라고 소곤소곤댔다. 크리스는 눈살을 살풋 찌푸린 채 신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인이 슬피 흐느끼며, 아기를 품에 안아 젖을 먹이고 싶다고 애원하자 크리스가 대꾸했다.


“오케이, 그래 그렇게 하자구. 하지만 지금은 자기 몸이 너무 약해서 안 돼. 우선 자기부터 건강해진 후 애기를 챙기는 게 올바른 방법이야. 그리고 사실 미국 아이들은 우유를 먹고 자라거든. 앞으로 그들과 함께 어울려 살려면 미리 적응해야 돼.”


정인은 자기 젖을 아기에게 먹이면서 느꼈던 흐뭇함과 포만감을 회상하며 울먹였으나 거부당했다. 아기도 울고 엄마도 울었다.


그들은 엄격한 시간표를 정해 두고 어린 아기에게 따르도록 강요했다. 시간표대로 깨워 억지로 우유를 먹이고 옹아리 발음 교육을 시키고 강제로 침대에 뉘어 잠재웠다.

 

한낮에도 그렇지만 특히 밤중에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정인은 애가 끊어지는 심정이었다. 아직은 너무 어려서 품어 주고 싶은 병아리를 독수리가 채어가 버린 것만 같았고, 정인 자신의 몸 일부분을 칼로 도려내 버린 듯 허전했다.


정인은 아기가 좀더 자란 후에 그런 교육을 시키면 좋겠다고 바랐으나, 크리스는 은테 안경 속의 무정스런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그 눈은 이전의 선량하고 자애롭던 모습을 잃은 채 자기 소유물에 대한 정당한 권리를 행사한다는 단호한 기운을 내뿜었다.

 

물론 크리스의 인품 자체가 바뀐 건 아니었고 평소엔 다정다감했지만, 아기 마리아의 교육에 대해서만큼은 정인의 모정을 무시하며 자기 방식을 고집했다.

 

때론 자신처럼 이지적이지 못하고 감정에 얽매여 애처로이 흐느끼는 정인을 마치 한 마리 어미 원숭이를 바라보듯 불쌍스레 내려다보기도 했다. 크리스 본인은 어디까지나 정인과 딸에게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모녀 사이의 애정과 교감을 빼앗아 고통을 주었을 뿐더러 그들의 심신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그런 사연 때문일까, 지난 여름 장마가 계속되던 어느 날 가벼운 감기에 걸린 마리아는 점점 떨며 엄마를 찾아 울부짖다가 어이없이 숨지고 말았다.

 

마지막 순간에 정인이 품에 안고 젖을 물렸으나 아기는 이미 빨 힘이 없었다. 울음을 입술 새로 깨물며 흐느끼던 정인은 아기의 시체를 계모와 크리스에게 빼앗긴 다음 며칠 동안 울부짖다가 반쯤 미쳐 버렸다. 원래도 정신이 별로 온전하지 않은 대로 그나마 겨우 사람 구실을 했었는데 이젠 아주 정신줄을 놓아 버린 상태였다.


크리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적어도 정인에게 있어서… 그는 한 명의 미군 장교에 불과했지만 정인에겐 남자나 남편을 넘어 신성한 대부(Godfather) 역할까지 하려 했다. 자기 나름대로 미국의 문화를 이 작은 미개국 여인에게 뿌려 개명케 하려는 것이었을까?

 

하지만 얼마 후 그는 말 한마디 없이 홀연 집을 정리해 사라져 버렸다. 그때부터 정인은 사악한 계모의 강아지가 되어 용산 삼각지, 이태원 등으로 끌려 다니며 몸을 팔다가 겨우 동두천으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삭막한 이 세상 천지에 그나마 정든 사람들이 있는 곳이기에… 그런데 그 종착지가 악마 수용소로 불리는 몽키하우스라니….

 

몽키하우스에 감금된 여자


숲속의 새들은 이리저리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저마다 독특한 목청으로 지저귀었다.


정인은 청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가만히 있었다. 잠시 꿈이라도 꾸는 요정 같았다. 청운은 조금이나마 더 포근하길 바라며 무심결에 꼭 안아 주었다. 자신의 삶이 그러했듯 정인의 인생도 남들에 의해 함부로 조작된 우스갯거리가 되어선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키하우스에 감금된 여자들의 갖가지 비극이 각색돼 만들어진 정인의 인생 여정은 진실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청운은 생각해 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정인 자신이 이미 그런 차이의 이해관계를 벗어나 버린 상태인데 따져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싶었다.


‘그것보다는 당장 지금 현실이 중요하다. 대체 얘는 어떻게 창살 밖으로 나왔을까? 설마 숲속의 요정이라서 그런 건 아닐 테고… 혹시 밤 동안 어느 직원 숙소에 머물다가 나온 건 아닐까? 혹부리 영감이 색을 밝힌다는 풍문도 있고 하니….’


하지만 청운은 그녀에게 물어 보지는 않았다. 어두운 세상을 헤쳐 살아 나오는 동안 흑막과 의문에 관해서는 추적해 밝혀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됐지만, 정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자 그저 애처로운 생각이 들 뿐이었다. 하얀 풀꽃이나 나비처럼 언제 어디로 사라져 버릴지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문득 정인의 입에서 노래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정인은 배시시 웃고 있었는데도 어느 결인지 속눈썹엔 눈물방울이 맺혀 방울방울 창백한 볼 위로 흘러 내렸다. 청운은 손가락을 들어 가만히 닦아 주었다.

 

<다음 호에는 ‘독초’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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