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수사관 6번 찾아와 체모 요구” 증거조작 의혹 제기
“1989년 특별 승진한 경찰관들 지금이라도 진정성 보여야”
▲ 화성 8차 범인으로 지목돼 20년간 수감 생활을 해온 윤모씨가 10월21일 인터뷰를 하고 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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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떳떳하다면 나와서 해명해줬으면 좋겠다.”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지목돼 20년 수감생활을 한 윤모(52)씨는 10월21일 <뉴시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진정성 있게 인정하고 사과하면 받아줄 것”이라며 입을 열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가운데 8차 사건 범인 검거의 공을 인정받아 지난 1989년 특별 진급한 경찰관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윤씨는 “당시 형사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분석 결과에 따라 체모가 분명해 강압 수사를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는데, 경찰조사 과정에서 잠을 안 재우고, 쪼그려 뛰기와 구타는 분명히 있었다”며 당시 수사팀의 가혹 행위 의혹 부인을 반박했다.
그러면서 “1989년 가을에 붙잡힌 후 수사본부에서 거짓말 탐지기 조사를 20여 분간 받았다. 당시 계장인가 과장이 탐지기가 안 맞으니 조사를 하라 했다”며 “조사 과정에서 불편한 다리로 쪼그려 뛰기를 시켜 한 번도 못하니 누가 날 찬 기억이 난다”며 당시를 떠올렸다.
화성 8차 살인사건은 1988년 9월16일 화성군 태안읍 진안래 자택에서 박모(당시 13세)양이 잠을 자다 성폭행 당한 뒤 목숨을 잃은 사건이다.
당시 경찰은 사건 현장인 방 안에서 체모 8점을 발견했으며 윤씨에 대해 4차례 체모를 채취해 방사성 동위원소를 분석하고 현장에서 발견된 체모와 윤씨의 체모가 일치한다는 결과를 받았다.
윤씨는 “형사들이 1989년 5월부터 두 달간 총 6번 찾아와 나에게 체모를 요구한 기억이 난다”며 “붙잡힌 뒤 현장에서 내 체모가 나와 범인 확률이 99.9%라고 했는데 사건 발생 1년이 지난 시점에서 내 체모가 나오는 게 말이 되느냐”고 경찰의 증거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그동안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모방범죄로 알려졌던 이 사건은 화성사건의 유력 용의자 이모(57)씨가 최근 화성 8차 사건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사건 발생 30년 만에 새 국면을 맞았다.
8차 사건 범인으로 검거돼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씨는 현재 재심을 준비 중이다.
1989년 10월 1심 선고에서 무기징역을 선고 받은 윤씨는 “집에서 잠을 자고 있다가 경찰에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고 잠을 자지 못한 상태에서 허위 자백했다”고 항소했으나 상급심 재판부는 “고문을 당했다고 볼 만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며 윤씨의 항소를 기각했다.
3심에서 무기징역이 확정된 윤씨는 20년을 복역한 뒤 2009년 청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됐다. 20년간 옥살이를 한 윤씨는 가석방 이후에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엄밀히 말해 돌아갈 수가 없었다.
‘죄인’이라는 낙인이 무서웠다. 가족을 볼 면목도, 부담을 주기도 싫었다. 사회는 아직까지 출소자에 대한 막연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출소 후 나와 갈 곳이 없었다. 성한 몸도 아니었다.
윤씨는 “세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왼쪽 다리가 매우 불편하다”며 “출소 후 사회에 나왔을 땐 막막했다. 세상에 홀로 서 있는 느낌이었지만, 그래도 살아야 했다”고 10년 전을 떠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윤씨의 왼쪽 다리는 팔뚝보다 가늘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가 좌우로 휘청거렸다. 윤씨는 출소 후의 삶은 힘든 나날이었지만, 교도소에서 만난 교도관과 교화위원들이 큰 힘이 됐다고 털어놨다.
그는 “그들의 도움으로 출소 후 청주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6개월 간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살면서 한동안 교도소에서 알게 된 교화복지회에 신세를 졌다”며 “한때 취업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생의 수렁에 빠진 느낌이었지만, 종교의 힘으로 이겨냈다”고 말했다.
출소자 신분으로 일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사회는 출소자에게 한없이 냉랭했다. 억울하고 분했지만, 화를 내면 윤씨의 손해였다. 살면서 폭발할 수도,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긴 세월을 복역하고 나온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화성 사건이 나올 때마다 모방범죄로 8차 사건이 늘 거론됐다. 보기 싫고 고통스러웠지만, 그럴 때마다 종교의 힘으로 견뎌냈다. 교도소에서 큰 힘이 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교화복지회를 통해 따뜻한 격려와 위안을 받으며 힘든 나날을 이겨냈다.
윤씨는 종교를 통해 직장생활과 신앙생활, 인간관계를 조화롭게 유지할 수 있도록 용기와 희망을 얻었다고 했다.
윤씨의 억울한 옥살이와 사회에 대한 분노, 증오의 서슬 퍼런 응어리는 차츰 풀어지며 용서와 관용의 따뜻한 가슴으로 자신도 모르게 바뀌었다.
윤씨는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교화복지회에 기부하면서 달라진 마음가짐으로 내 자신에게 떳떳해지기 위해 노력했다”며 “그러다 보니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이런 기회가 생긴 것 같다”고 설명했다.
남들과의 약속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신뢰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오길 10여 년, 차츰차츰 화성 사건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힐 때쯤 화성 8차 사건에 대한 유력 용의자인 이씨의 자백이 나왔다. 이씨 자백 후에도 언론에 강한 적대감을 드러내던 윤씨는 서서히 마음을 열었다.
“무서웠어요. 겨우 정착한 삶이 다시 무너질까봐. 이제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잃어버린 청춘보다 명예를 되찾고 싶어요. 명예를 되찾는다면 남은 인생 세례명 ‘빈센치오‘처럼 남에게 베푸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이제 와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저를 수사한 경찰관의 진정 어린 사과입니다.”
피해자의 얼굴도 모르고, 집에도 가본 적이 없다는 윤씨는 박준영 변호사 등의 도움으로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 그의 재심 상대는 31년 전 윤씨 검거로 특진한 경찰관들이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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