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가볼 만한 여행지…세계유산 주목받은 한국의 서원

필암서원 뜰에 서면 옛 선비들 글 읽는 소리 들릴 듯

김수정 기자 | 기사입력 2019/10/25 [10:02]

10월에 가볼 만한 여행지…세계유산 주목받은 한국의 서원

필암서원 뜰에 서면 옛 선비들 글 읽는 소리 들릴 듯

김수정 기자 | 입력 : 2019/10/25 [10:02]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모시며 시정 비판의 기능도 담당하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역 교육기관이었다. 그런 만큼 서원에는 명망 높던 유학자들의 역사와 인간적인 자취가 오롯이 배어 있다. 한국의 서원은 유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리고 제향자의 정신을 건축으로 구현해 유생들이 공간 속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체험하게 했다. 얼마 전 유네스코에서도 도동서원,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남계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필암서원 등 한국의 서원 9곳을 자연생태와 인문생태의 관점에서 분석한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성리학의 가치를 온전히 담고 있는 한국의 서원에는 선현들의 사상과 숨결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10월에 가볼 만한 여행지’로 국가문화재를 넘어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난 한국의 서원들을 꼽고 있다. 우리 선현들의 사상을 공간에 녹여낸 장성 필암서원과 정읍 무성서원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홍살문 옆엔 가마 탈 때 쓰던 노둣돌과 200년 된 은행나무
2층 앉아 내다보면 월선봉과 드넓은 들판 한눈에 들어오고

개울 흐르고 성황산 등진 원촌마을 거닐면 서원·사당 곳곳에
신라 최치원이 뿌린 유교와 풍류의 씨앗 무성서원에서 만개

 

1. 장성 필암서원


조선시대 지방 사립학교인 서원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우리나라 성리학과 관련된 전통을 이어오며, 건축학적으로 뛰어나기 때문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은 47곳은 그 의미가 더 중요한데, 전라도에는 3곳이 있다. 장성 필암서원(사적 242호)도 그중 하나다.


흥선대원군은 전라도 지역을 평하며 ‘학문은 장성만 한 곳이 없다(文不如長城)’고 했다. 전남 장성은 호남지방의 학문과 선비정신을 잇는 대표적인 고장이다.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문묘에는 최치원·이황·이이 등 우리나라 성현 18인도 함께 봉안됐는데, 호남에서는 하서 김인후가 유일하다. 필암서원은 하서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2019년 8월19일, 서원 안팎으로 유난히 사람이 붐볐다.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가 열렸기 때문이다. 유두석 장성군수와 김봉수 장성문화원장, 하서의 후손 등이 모여 제를 지냈다. 경건한 의례는 한 시간 정도 이어졌다.

 

▲ 필암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사실을 알리는 의례, 고유제.    


장성에서 태어난 김인후는 성균관에서 이황과 더불어 학문을 닦았다. 시를 약 1600수 남겼으며, 담양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와 가깝게 지내 그곳을 노래한 시도 지었다. 또 양산보의 아들을 사위이자 수제자로 맞았다.


필암서원은 1590년(선조 23)에 김인후를 기리기 위해 장성읍 기산리에 세웠다. 1597년 정유재란으로 불탔으며, 1624년(인조 2) 황룡면 증산동에 다시 지었다. 1672년(현종 13) 물난리가 나서 바로 옆인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서원은 전체적으로 아담한 편이다. 홍살문 옆엔 말이나 가마를 타고 내릴 때 사용한 노둣돌과 2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확연루는 서원의 출입문으로, 선비들이 시를 지으며 쉬던 건물이다. 2층에 앉아 내다보면 월선봉과 드넓은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확연루는 하서를 ‘마음이 맑고 깨끗해 확 트였고 크게 공정하다(廓然大公)’고 표현해서 지은 이름이다.

 

▲ 장성 필암서원 청절당에서 바라본 확연루.    


확연루를 지나자 유생이 회의하고 공부하던 청절당(淸節堂)이 나온다. 이곳에 서면 유생이 생활하던 진덕재와 숭의재가 보인다. 청절당 건너편엔 경장각(敬藏閣)이 있다. 정조가 쓴 편액은 신성하게 여겨 얇은 망을 쳤다. 건물 내부엔 묵죽도(墨竹圖) 판각이 있다.


김인후는 인종이 세자일 때 세자보도(世子輔導)라는 직책으로 글을 가르쳤다. 인종은 직접 그린 묵죽도를 스승에게 선물했다. 하서는 인종이 서거한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병을 들고 산에 올라 밤을 지새웠다. 묵죽도엔 그가 인종을 향해 쓴 시가 있다. “뿌리 가지 마디 잎새 모두 다 정미롭고/굳은 돌 벗인 양 주위에 들어 있네/성스런 우리 임금 조화를 짝하시니/천지와 함께 뭉쳐 어김이 없으셔라.”

 

▲ 위에서 본 필암서원. 예의 중심인 공간으로서 서원의 구조를 잘 담고 있다.    


서원의 중심 건물인 우동사에는 하서 김인후, 사위이자 수제자인 고암 양자징의 위패가 있다. 우동(祐東)은 ‘하늘의 도움으로 동방에 태어난 이’를 가리키는 말로, 하서를 뜻한다.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등이 산지에 있어 사당이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것과 달리, 필암서원은 건물이 평지에 있다. 예의 중심인 서원의 기능을 다하기 위해 독특한 건물 배치를 보인 것도 이 때문이다.

 

청절당은 여느 서원과 달리 입구인 확연루를 향하지 않고 반대편 산 아래 우동사로 향해 있다. 진덕재와 숭의재도 우동사를 바로 볼 수 있도록 다른 건물로 막지 않았다. 유생은 공부하고 생활할 때 늘 사당을 바라보며 공손히 예를 표했다.


서원을 나오면 곁에 작은 시내가 흐르고, 건너편에 유물전시관이 있다. 이곳에 필암서원과 김인후에 대한 자료가 전시된다. 1624년부터 1900년경까지 필암서원의 역대 원장을 기록한 <원장선생안>, 유생 명단인 <서재유안서>, 서원의 재산을 기록한 <필암서원원적>, 서원의 노비를 족보 형식으로 적은 <노비보> 등이 있다.


필암서원에서 약 3km 떨어진 곳에 김인후가 태어난 맥동마을이 있다. 마을에서 신도비와 난산비 등을 볼 수 있다. 신도비는 하서를 기리기 위해 1742년에 세운 것으로, 송시열이 10년에 걸쳐 지은 명문장이 새겨졌다.


필암서원을 둘러본 뒤엔 ‘옐로시티(Yellow City)’ 장성을 여행하자. 도시에 흐르는 황룡강을 모티프로 아늑하고 따사로운 이미지가 느껴진다. 황룡강 변을 중심으로 봄엔 유채꽃, 가을엔 노란 코스모스가 피어 화사하다. 장성군을 대표하는 음식점에 가면 밥, 두부, 전 등 음식에도 노란빛을 낸다.

 

▲ 장성호수변길에 있는 옐로출렁다리.    


남북으로 길게 뻗은 장성호수변길에는 옐로출렁다리가 있다. 비상하는 두 마리 황룡을 형상화한 출렁다리는 154미터에 이른다. 황룡이 소원을 이뤄준다니 다리를 건너며 소망을 빌어도 좋을 듯. 옐로출렁다리까지 1.5km에 이르는 데크가 조성됐다.


자연과 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축령산으로 향하자. 우리나라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1148헥타 편백 숲은 걷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물소리를 들으며, 혹은 맨발로 걷는 등 6개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이 울창한 숲은 한국전쟁으로 황폐해진 산을 춘원 임종국이 20여 년간 가꾼 것이다.


가을에 장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내장산국립공원 내에 있는 백암산이다. 백양사는 632년(백제 무왕 33)에 창건한 고찰로, 주변 경관이 빼어난 백암산에 들어앉아 찾는 이가 많다. 사찰로 향하는 길목에 갈참나무가 양쪽으로 빽빽하고, 그 사이에 고운 글귀가 쓰인 기왓장이 놓여 따뜻함을 더한다. 가을이면 아기단풍이 곱게 물들고, 우뚝 솟은 백암산이 사찰의 미를 완성한다.

 

 

2. 정읍 무성서원


신라 말 학자 고운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정읍 무성서원(사적 166호)이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이번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된 ‘한국의 서원’은 정읍 무성서원, 영주 소수서원,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장성 필암서원, 함양 남계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 9곳이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태산군(정읍 지역의 옛 지명)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고 떠나자, 백성이 세운 생사당(生祠堂) 태산사가 뿌리다. 생사당은 감사나 수령의 선정을 찬양하기 위해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부터 제를 올리는 사당을 뜻한다. 조선 중종 때 태인현감으로 부임한 영천 신잠의 생사당이 태산사와 합해졌다. 이후 태산서원으로 불리다가, 1696년(숙종 22) 사액 받아 무성서원이 됐다.


무성서원은 불우헌 정극인, 눌암 송세림, 묵재 정언충, 성재 김약묵 등을 추가로 배향하며 성장했고, 흥선대원군의 대대적인 서원 철폐에도 살아남으며 역사적·학문적 가치를 증명했다. 당시 전국의 서원 47곳이 화를 면했는데, 전라도에서는 무성서원과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뿐이었다.


서원은 조선 시대 학문과 제향을 위해 사림이 설립한 사설 교육기관이다. 향교가 지방의 국립 교육기관이라면, 서원은 지방의 사립 교육기관인 셈이다. 서원은 향교와 달리 각 지역의 선현을 모셨고, 독자적으로 운영했다.

 

중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경상도 순흥면 백운동(지금의 경북 영주 지역)에 만든 백운동서원이 시초로 전해진다. 지금 우리에게 소수서원으로 익숙한 백운동서원은 이황의 건의로 사액 받으며 얻은 이름이다.


사액서원은 정부에서 토지와 노비를 내리고, 세금과 역을 면제해주는 등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서원이 늘어가며 사액서원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수를 줄여야 했지만, 이미 거대해진 서원은 힘이 막강했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라는 칼을 꺼내기까지 조선은 서원의 나라였다.


고종 때 과거제도가 사라지자, 입신양명을 위한 교육 공간으로 출발한 서원은 성리학을 탐구하는 학문 공간으로 변해간다. 서원이 출세와 직결되는 공간에서 벗어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풍수지리 좋은 곳에 자리 잡은 연유다. 지금 우리가 ‘서원’ 하면 풍광 좋은 자연을 떠올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무성서원은 여느 서원과 달리 마을에 있다. 이를 두고 김은숙 해설사는“마을 속 서원은 신분 차별 없이 학문의 기회를 제공한 무성서원의 성격을 오롯이 드러낸다”며 “이곳은 모두에게 열린 학문 공간이자, 마을 사람들이 소통하는 공간이었다”고 설명한다.

 

▲ 무성서원은 마을 안에서, 백성과 함께 현실을 마주하며 학문에 힘썼다.    


앞으로 개울이 흐르고 뒤에는 성황산을 등진 칠보면 무성리 원촌마을. 잠시 지도를 살펴보면 무성서원을 필두로 서원과 사당이 제법 많다. 조용한 마을에 유교의 흔적이 왜 이렇게 많을까.

 

여기서 최치원이 다시 등장한다. 신라 말 최치원이 이곳 태산군에 뿌린 유교와 풍류의 씨앗은 무성서원을 필두로 여러 서원과 향교, 조선시대 최초 가사 작품 〈상춘곡〉으로 만개했기 때문이다.


무성서원에 들어서면 고직사와 현가루가 반겨준다. 당시 서원의 살림을 맡아 보는 관리인이 거주하던 고직사에는 현재 해설사가 머물며 길손을 반겨준다. 외삼문 대신 1891년에 건립한 현가루는 <논어>의 현가불철(絃歌不輟)에서 따온 이름이다. ‘어렵고 힘든 상황에도 학문을 계속하다’라는 뜻이다.


서원 내부로 들어서면 학습 공간인 강당,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우 태산사가 이어진다. 1828년 강당을 중수한 서호순의 공덕을 기리는 현감 서호순불망비와 비각도 자리한다.

 

▲ 정읍 무성서원의 강학 공간인 강당.    

 

강당은 좌우로 스승이 기거하던 공간이 있고, 중앙 마루 3칸은 앞뒤가 시원하게 트인 구조다. 덕분에 강당 뒤 태산사로 들어서는 내삼문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당 전면에 걸린 현판이 1696년 사액 받았음을 알려준다. 현판 곳곳에 지워진 이름이 눈에 띈다.

 

▲ 무성서원의 역사를 오롯이 기록한 현판.    


강당 중앙 마루 뒤의 내삼문을 열면 태산사다. 서원의 건물 중 유독 지붕이 낮은 내삼문에 들어가려면 고개를 숙여야 한다.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태산사에 들기 위한 절차일까. 고운 최치원을 중심으로 불우헌 정극인 등 7인의 위패를 모신 태산사는 말이 없다. 무성서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상춘곡〉으로 유명한 정극인의 묘와 재실이 있다. 벼슬에서 물러난 뒤 부인의 고향인 이곳 태인현에 터를 잡은 불우헌은 여생을 교육자로 살았다.


강당 오른쪽으로 기숙사인 강수재로 연결되는 협문이 있다. 강수재 앞으로 또 다른 비각과 병오창의기적비가 자리한다. 병오창의는 1906년 면암 최익현과 둔헌 임병찬이 을사늑약에 항거해 일으켰으며, 호남 최초의 항일 의병 운동으로 평가 받는다.


정읍을 이야기할 때 조선 근현대사의 핫 이슈, 동학농민혁명을 빼놓을 수 없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이 계속되자, 1894년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충청 일대 농민이 고부 관아를 습격해 고부민란을 일으켰다. 정부가 조병갑의 횡포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해서 해산했지만, 민란을 조사하기 위해 내려온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이 이어지자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가면 불과 120여 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동학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기념관 지척에 자리한 정읍 황토현 전적(사적 295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이 관군에게 압승한 현장이다. 신무기로 무장한 조·일 연합군에게 우금치 전투에서 패하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까지 동학농민군의 항쟁은 계속됐다. 불합리에 항거하며 개혁과 민족 자주를 외친 동학농민혁명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영향을 주었듯이, 현실에 뿌리내린 마을 속 무성서원에서 의병 운동이 일어난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이제 한 박자 쉬며 ‘호남 제일의 정자’ 피향정(보물 289호)으로 가보자. 지척에 있는 연못에 지난여름 만개한 연꽃 향기가 나는 듯하다. 최치원이 이곳을 거닐었다는 설명을 들으니 그가 쓴 〈추야우중(秋夜雨中)〉 시구가 들려오는 듯하다.
“가을바람에 괴롭게 시를 읊노라/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드물구나/밤이 깊도록 창밖에는 비가 내리는데/등불 앞에 있는 마음은 만 리 밖을 달리네.”


백성이 생사당을 만들 정도로 실력과 인품을 갖췄음에도 육두품이라는 신분적 한계로 뜻을 펼치지 못한 최치원,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동학농민군. 이들의 안타까움과 절절함을 품은 무성서원 이야기에 귀 기울일 시간이다.


<콘텐츠 제공=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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