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놓치기 아까운 여행지…세계유산 주목받은 한국의 서원

강과 산 품은 병산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김수정 기자 | 기사입력 2019/10/18 [10:39]

10월에 놓치기 아까운 여행지…세계유산 주목받은 한국의 서원

강과 산 품은 병산서원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원’

김수정 기자 | 입력 : 2019/10/18 [10:39]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모시며 시정 비판의 기능도 담당하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역 교육기관이었다. 그런 만큼 서원에는 명망 높던 유학자들의 역사와 인간적인 자취가 오롯이 배어 있다. 한국의 서원은 유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리고 제향자의 정신을 건축으로 구현해 유생들이 공간 속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체험하게 했다. 얼마 전 유네스코에서도 도동서원,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남계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필암서원 등 한국의 서원 9곳을 자연생태와 인문생태의 관점에서 분석한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성리학의 가치를 온전히 담고 있는 한국의 서원에는 선현들의 사상과 숨결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10월에 가볼 만한 여행지’로 국가문화재를 넘어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난 한국의 서원들을 꼽고 있다. 우리 선현들의 사상을 공간에 녹여낸 안동 병산서원과 영주 소수서원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1. 안동 병산서원


안동 병산서원(사적 260호)은 우리나라 서원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 서원 앞으로 낙동강이 휘돌아 흐르고, 낙동강에 발을 담근 병산이 푸른 절벽을 펼쳐놓는다.

 

아름다운 서원으로 꼽는 이유는 그림 같은 풍경을 고스란히 건물 안으로 들여놓은 솜씨 덕분이다. 만대루 앞에 서면 그 감동이 그대로 전해진다. 군더더기 없는 7칸 기둥 사이로 강과 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마주 선 사람도 진초록 풍경이 된다.

 

▲ 안동 병산서원의 입교당. 자연을 서원 안으로 고스란히 들여놓은 솜씨가 놀랍다.    


병산서원은 서애 류성룡과 그 아들 류진을 배향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에 임명된 서애는 권율과 이순신을 파격적으로 등용해 전쟁에서 나라를 구했다. 명나라에 망명하려는 선조를 막아선 것은 충효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다.

 

대동법의 모태인 ‘작미법(作米法)’을 시행했으며, 양반에게 병역의무를 주고, 천민도 공을 세우면 벼슬을 줬다. 그가 남긴 <징비록>은 임진왜란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자료다.


병산서원의 출발은 풍악서당이다. 고려 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풍악서당을 지나다가, 난리 중에도 모여 공부하는 이들에게 감동 받고 서책과 땅을 하사했다는 유서 깊은 서당이다.

 

1572년 서애의 뜻에 따라 서당을 이곳으로 옮겼다. 서애가 타계한 뒤 그를 추모하는 제자들이 존덕사를 짓고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이 됐다. 1863년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았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에도 폐철되지 않고 남은 47곳 중 하나다.

 

▲ 서애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 입구에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병산서원으로 가는 초입은 여전히 흙길이다. 좁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낙동강을 따라 몇 굽이 휘돌아 가면 고요히 숨은 서원을 만난다. 초가을에 찾은 병산서원은 배롱나무꽃 천지였다. 입구부터 해사한 배롱나무꽃에 빼앗긴 마음을 간신히 추스르고 복례문으로 들어선다. 나지막한 솟을삼문이다. 명성에 걸맞게 크고 화려한 문이 아니라 몸을 낮추고 자연에 엎드린 모습이다.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이다’라는 복례의 뜻을 새기고 들어서면 그 유명한 만대루가 보인다. 누마루를 떠받드는 기둥은 휜 나무를 그대로 썼고, 주춧돌은 다듬지 않은 투박한 돌이다. 인공의 냄새를 지운 건축 의도 때문일까. 사람이 지은 것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양 느껴진다.

 

▲ 병산서원의 첫인상은 자연에 몸을 낮춘 듯 보인다.    

 

2층 마루로 오르는 계단은 거대한 통나무를 깎아 만들었다. 만대루는 현재 보수 중이라 올라갈 수 없지만, 그 진면목이 가장 잘 보이는 자리가 있다.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 마루에 앉으면 만대루가 한눈에 잡힌다. 순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강이 흐르고, 병산의 푸른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만대루를 자세히 보면 거창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위아래 기둥만 휑하다. 자연을 즐기는 데 방해하는 요소를 최소화했다.

 

흔한 5칸 누각보다 2칸 넓게 7칸을 세워서 건물 안으로 강과 산을 2폭 더 끌어들였다. 만대루는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구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따왔다고 한다.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다’라는 뜻이다. 늦은 오후까지 바라봐도 지루하지 않은 걸작에 꼭 맞는 이름이다.

 

▲ 병산서원의 백미, 만대루.    


입교당은 ‘가르침을 바로 세우다’라는 의미가 있는 강당이다. 입교당 양쪽으로 유생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고 있다. 동재에는 상급생이, 서재에는 하급생이 머물렀다 한다.


입교당과 동재 사이로 돌아 뒤쪽으로 몇 걸음 옮기는 순간, 입이 떡 벌어진다. 배롱나무꽃이 하늘을 가린 채 꽃그늘을 드리웠다. 병산서원은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전국 사진작가들이 모여들 만큼 배롱나무꽃으로 유명하다.

 

보호수로 지정된 6그루를 포함해 모두 120여 그루가 붉은 꽃을 피운다. 약 400년 자란 보호수가 있는 곳은 존덕사 앞과 전사청 주변이다. ‘서애의 학문과 덕을 우러르는’ 존덕사, 배롱나무꽃에서 짙은 기품이 느껴지는 이유다.


병산서원에서 차로 15분 거리에 안동 하회마을 옥연정사(국가민속문화재 88호)가 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온 서애는 옥연정사에서 집필에 주력했다. <징비록>도 이곳에서 완성했다. ‘지난 일을 경계하여 우환을 삼가다’라는 의지를 담은 책으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원인과 전황을 꼼꼼히 기록했다.

 

문이 닫히는 날이 더러 있지만, 운 좋게 안으로 들어가면 마당에 잘 자란 소나무를 감상하고, 툇마루에 앉아 강변을 내려다보자.


옥연정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부용대 450보’라는 이정표가 눈에 띈다. 넉넉한 숲길을 따라 5분 정도 올라가면 부용대 정상이다. 하회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마을을 감싸며 ‘S자형’으로 흐르는 낙동강이 신비롭다.


서애 류성룡 하면 안동 하회마을(국가민속문화재 122호)을 빼놓을 수 없다.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 집성촌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전통 마을이다. 정겨운 돌담과 고가가 어우러진 골목을 걷기만 해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마을을 대표하는 양진당(보물 306호)은 풍산 류씨 대종택이다. 솟을대문과 대궐 같은 기와집이 한눈에 봐도 으리으리하다.


양진당과 더불어 마을의 핵심 건물인 충효당(보물 414호)은 서애의 종택이다. 선생이 돌아가시고 그를 흠모하는 후학들이 새로 지었다고 전한다. 서애가 평소 가장 중요시하고 몸소 실천한 사상이 충효다. 충효당 앞에는 하회마을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심은 구상나무가 있고, 안에는 선생의 유품이 전시된 영모각이 있다.


그 밖에도 북촌댁과 수령 600년 된 느티나무인 삼신당 등 볼거리가 많다. 다듬이질, 맷돌 돌리기 등 체험할 거리가 많고, 부채며 오방색 지갑이며 아기자기한 기념품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료 공연하는 하회별신굿탈놀이 관람도 필수 코스다. 공연은 매일 오후 2시에 시작한다(월요일 제외).


풍산읍에 자리한 체화정은 배롱나무꽃이 피는 여름부터 초가을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붉은 꽃이 눈부신 배롱나무가 정자와 한몸같다. 정자 앞 연못에 배롱나무꽃이 그림자를 드리우면 멋이 배가 된다. ‘체화정’ 현판 뒤쪽의 ‘담락재’ 현판은 단원 김홍도가 썼다고 한다. 김홍도가 안기찰방으로 있던 시절, 체화정에 반해 자주 찾았다는 소문이다.

 

<글·사진/유은영(여행작가)>

 

2. 영주 소수서원


영주 소수서원(사적 55호)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최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가운데 하나다.

 

1543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이 쇠락하자, 퇴계 이황이 1549년 경상관찰사 심통원을 통해 조정에 편액과 토지, 책, 노비를 하사하도록 건의했다.

 

명종이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친필 편액을 내렸으니, 조선에서 처음이다. 대제학 신광한이 왕명으로 서원 이름을 지을 때, 기폐지학소이수지(旣廢之學紹而修地: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 닦게 하다)라는 말에서 ‘소수(紹修)’를 가져왔다.


나라에서 세운 향교는 지금으로 보면 국립대학, 각 지방의 유림이 세운 서원은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다. 사액서원은 나라에서 지원하는 사립대학인 셈이다.

 

▲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액을 받은 소수서원 전경.    

 

서원은 대개 자연 풍광이 빼어난 곳에 터를 잡았으며, 원리 원칙을 중시하는 향교에 비해 자유로운 분위기가 특징이다. 입학하는 데 생원이나 진사 같은 자격을 두지만, 수업료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학문을 하려는 이들에게 열린, 진정한 무상교육이다.


족히 한 아름은 될 법한 소나무들이 소수서원 입구를 지킨다.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해보니, 평소 존경해온 안향이 태어난 곳이다. 안향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이다. 주세붕은 안향을 기리면서 숙수사 터에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소나무 1000여 그루를 심었다. 그 가운데 150여 그루가 아직 남아 있다.

 

▲ 소수서원 들어가는 길에 솔숲이 넓다.    

 

솔숲이 끝날 무렵,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보물 59호)가 보인다. 통일신라 때 창건된 숙수사는 단종 복위 운동 실패로 순흥도호부가 없어질 때 불타고, 당간지주만 남았다. 주세붕은 어진 목민관으로 칭송 받았는데, 백성이 산삼 공납으로 힘들어하자 소백산에서 산삼 종자를 채취해 인삼 재배에 성공한 인물이다.


소수서원 정문인 사주문으로 들어서면 강학당이 나온다. 유생이 모여 스승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던 강당이다. 정면에 ‘백운동’, 내부에 ‘소수서원’ 현판이 걸렸다. 소수서원 시작에 백운동서원이 있음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 영주 소수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학당.    

 

강학당은 사면에 툇마루를 두르고, 배흘림 양식으로 기둥을 세웠다. 문을 연 다음 들어 올리면 삼면이 트여 안팎의 구분이 없어진다. 자연을 고스란히 품어 하나 된 기분이랄까.


강당은 일반적으로 가로가 길고 뒤에 사당을 세우는데, 강학당은 특이하게 세로로 긴 형태에 사당인 문성공묘를 서쪽에 배치했다. 문성공묘에는 안향, 안축, 안보, 주세붕을 모신다. 선현에 제사를 올리고 유학을 공부하는 것이 서원의 기본이다.


강학당 뒤에는 유생을 가르치는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와 일신재가 있고, 그 옆으로 유생이 기거하는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다. 스승의 거처보다 낮고, 작게 만든 유생 기숙사에서 스승에게 예를 다하는 당시의 철학이 엿보인다.


강학당 옆 아담한 건물은 책을 보관하는 장서각이며, 장서각 앞 돌기둥은 밤에 가로등 역할을 한 정료대다. 관솔 가지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혔다. 제사용 그릇을 보관하고 제물을 마련한 전사청, 안향과 주세붕 등의 초상을 모신 영정각, 소수서원에 관한 자료를 전시한 사료관 등도 경내에 있다.


소수서원은 소백산에서 흘러내린 죽계천 옆 평지에 터를 닦았다. 사주문 오른쪽에 있는 경렴정은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운 이듬해 동쪽 물가에 지은 정자다. 은행나무 고목이 정자에 드리워 가을이면 노란 물결이 장관이다. 개울 건너 바위에 붉은 글씨가 보인다. 주세붕이 유교 사상을 한 글자로 표현해 ‘경(敬)’ 자를 새긴 바위다.

 

그 옆으로 소나무 아래 놓인 정자는 퇴계 이황이 ‘취한대’라 이름 붙였다. 취한대 마루에 앉아 소나무 가지 사이로 바라보는 소수서원 풍광이 볼 만하다.


소수서원에서 백운교나 죽계교를 건너면 소수박물관, 선비촌으로 이어진다. 소수박물관은 성리학과 선비 문화를 조명한 곳으로, 소수서원에서 보관하던 유물을 전시한다. 선비촌은 영주 지역의 선비들이 살던 공간을 그대로 재현했다. 두암고택, 인동장씨종택, 김세기가옥, 김뢰진가옥, 해우당고택, 만죽재, 옥계정사 등 주요 고택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숙박 체험도 가능하다.


영주를 ‘선비의 고장’이라 부르는 데는 소수서원이 길러낸 숱한 선비와 거기서 비롯된 선비 정신이 이후 독립운동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 흔적을 따라 대한광복단기념관을 찾았다. 대한광복단은 1913년 채기중, 유창순, 유장열 등이 풍기에서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다.

 

채기중은 1915년 대구에서 박상진의 조선국권회복단과 통합해 대한광복회를 결성하고, 좀 더 조직적으로 일본에 맞섰다. 대한광복단기념관은 조직 결성 과정과 활동, 주요 인물, 영주의 독립운동사에 관해 전시한다.


소백산 비로봉에서 발원해 풍기 읍내를 지나 서천에 합류하는 금계천은 아담한 하천인데, 금계리에 이르러 제법 계곡 분위기를 띤다. 기암괴석에 키 큰 소나무가 우거진 곳에 금선정이 있다. 정면 2칸에 측면 2칸으로, 벽체 없이 사면이 개방된 소박한 형태다. 풍기 사람도 아는 이가 드물 정도로 숨은 명소다.

 

정자 마루에 앉으면 계곡 물소리가 시원하고, 솔숲 사이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하다. 그 옛날 선비들이 와서 시를 쓰곤 했다는데, 지금은 여름철 물놀이하러 알음알음 찾는다. 느긋하게 앉아 책 한 권 읽고 싶어지는 풍경이다.


영주 무섬마을(국가민속문화재 278호)은 내성천 물줄기가 마을을 감싸고 있어 마치 물에 뜬 섬 같다 해서 이름 붙었다. 마을에 오래된 기와집이 많다.

 

1666년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향조 반남박씨가 지은 만죽재고택을 비롯해 해우당고택, 김뢰진가옥, 김규진가옥 등 오랜 역사와 이야기를 품은 문화재가 즐비하다. 일제강점기에 마을의 교육기관이자 독립운동의 거점이 된 아도서숙은 터만 남은 것을 몇 해 전 복원했다.


무섬마을의 명물은 마을 앞 내성천에 놓인 외나무다리다. 과거에 마을과 바깥세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였으나, 장마나 태풍으로 떠내려가 해마다 새로 놓아야 했다. 지금은 아름다운 풍광을 눈에 담으며 독특한 체험을 하려는 이들이 일부러 외나무다리를 건넌다.

 

<글·사진/김숙현(여행작가)>
<콘텐츠 출처=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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