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에 놓치기 아까운 여행지...세계유산 주목받은 한국의 서원

조각보처럼 예쁜 ‘도동서원’ 기단은 소박한 멋의 진수

김수정 기자 | 기사입력 2019/10/11 [10:38]

10월에 놓치기 아까운 여행지...세계유산 주목받은 한국의 서원

조각보처럼 예쁜 ‘도동서원’ 기단은 소박한 멋의 진수

김수정 기자 | 입력 : 2019/10/11 [10:38]

서원은 인재를 키우고 선현을 모시며 시정 비판의 기능도 담당하던 조선시대 대표적인 지역 교육기관이었다. 그런 만큼 서원에는 명망 높던 유학자들의 역사와 인간적인 자취가 오롯이 배어 있다. 한국의 서원은 유생들에게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삶을 가르치고자 했다. 그리고 제향자의 정신을 건축으로 구현해 유생들이 공간 속에서 그의 삶과 사상을 체험하게 했다. 얼마 전 유네스코에서도 도동서원,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옥산서원, 남계서원, 돈암서원, 무성서원, 필암서원 등 한국의 서원 9곳을 자연생태와 인문생태의 관점에서 분석한 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성리학의 가치를 온전히 담고 있는 한국의 서원에는 선현들의 사상과 숨결이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한국관광공사에서는 ‘10월에 가볼 만한 여행지’로 국가문화재를 넘어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난 한국의 서원들을 꼽고 있다. 우리 선현들의 사상을 공간에 녹여낸 달성 도동서원과 안동 도산서원의 이모저모를 소개한다.

 


 

오른쪽 낙동강 흐르고 왼쪽 언덕 따라 서원…배산임수 몰라도 편안
크기·색깔·모양 제각인 돌 쌓아올린 중정단 보는 순간 심장 멎는 듯


퇴계 이황이 꿈꾼 유교적 이상향…스승과 제자가 시대 달리하며 완성
마루와 방 사이 기둥에 걸린 현판은 퇴계 선생이 직접 써서 더 심오

 

1. 달성 도동서원


달성 도동서원(사적 488호)은 동방5현 중 가장 웃어른인 김굉필을 모시는 곳이다. 서원이 딱딱하고 권위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다. 도포 자락 여미고 겨우 오를 수 있는 계단과 고개를 숙여야 들어설 수 있는 문이 소박하고 사랑스럽다.

 

▲ 달성 도동서원 강학 공간인 중정당 마루에서 본 풍경.    

 

동입서출의 규칙에도 귀여운 다람쥐가 등장한다. 12각 돌을 조각보처럼 이은 기단 앞에 서면 심장이 멎는다. 지루한 강학 공간에 보물처럼 숨겨진 장치를 하나하나 소개한다.


도동서원으로 향할 때는 낙동강을 끼고 한적한 길을 달리다가 다람재를 넘는다. 다람재는 도동서원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이다. 오른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왼쪽 나지막한 언덕을 따라 서원의 기와지붕이 모여 앉았다. 배산임수를 몰라도 절로 편안해지는 풍경이다.

 

▲ 다람재에서 내려다본 도동서원과 낙동강.    


주차장에 차를 멈추면 거대한 은행나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400여 년 세월 동안 도동서원을 지켜온 수문장으로 ‘김굉필나무’라 불린다. 어른 6명이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을 정도로 굵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의 학문과 덕행을 추앙하기 위해 세웠다. 건립을 주도한 이는 외증손자인 한강 정구다. 은행나무 역시 그가 서원 중건 기념으로 심었다고 한다. 하늘마저 가린 무성한 초록빛 사이로 수월루가 보인다.

 

▲ 배롱나무꽃이 그늘을 드리운 수월루.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수월루 앞은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붉은 꽃이 그늘을 드리운 외삼문으로 들어서면 사방 담장으로 막힌 좁은 공간에 가파른 돌계단이 눈에 띈다. 계단은 한 사람이 겨우 오를 정도로 좁고 소박하다. 도포 자락 단단히 여미고 더듬어 올랐을 계단. 이 앞에서 포기하고 돌아간 선비도 더러 있었으리라. 심호흡을 하고 계단을 디디려는 찰나, 초입 난간 소맷돌에 조각된 꽃봉오리가 보인다. 긴장한 와중에 꽃향기가 사르르 퍼진다.


계단 끝에서 만나는 환주문은 배움터인 중정당으로 들어서는 문이다. 높이가 1.5미터에 불과해 어른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숙여야 한다. 갓 쓴 선비야 오죽했을까. 자신을 낮추는 선비의 마음을 갖춰야 배움이 허락됐다.

 

환주문에는 문지방 대신 꽃봉오리 모양 정지석이 있다. 문 닫을 때 고정하는 정지석에 소박한 멋을 담았다. 배움터로 들어서는 마지막 발걸음에 놓인 돌부리가 엄중하면서도 부드럽다.


중정당은 강학 공간이다. 중정당 마당에 기숙사인 거인재와 거의재가 마주 보고 있다. 마당 한가운데 돌판 깔린 길이 놓였고, 길 끝에 돌 거북 한 마리가 머리를 불쑥 내민다. 눈을 부릅뜨고 송곳니를 드러낸 채 무섭게 노려본다. 중정당으로 오르는 길에 눈곱만큼이라도 딴생각을 하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랄 것이다. 화재 같은 액운을 막기도 하지만, 배움의 품으로 들어설 때 잡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하라는 경고이리라.


도동서원 소박한 멋의 진수는 중정당 기단이다. 보는 순간 심장이 멎는다. 크기와 색깔, 모양이 제각각인 돌을 쌓아 올린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전국의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저마다 마음에 드는 돌을 가져온 것이라 한다. 페루에 잉카제국의 12각 돌이 유명하다는데, 중정당 기단에도 12각 돌이 있다. 4각에서 12각까지 틈새 없이 쌓은 모양이 조각보처럼 곱다.


기단에는 용 네 마리가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곳에서 공부한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해 용이 되라는 기원이 담겼다. 중정당 계단 옆에 다람쥐가 새겨졌다. 오른쪽은 올라가는 모습이고, 왼쪽은 내려오는 모습인데 너무나 귀엽다. 동입서출의 딱딱한 규칙을 사랑스럽게 표시한 마음이 전해온다.


중정당 굵은 기둥 위에 흰 종이(상지)를 둘러놓은 것이 눈에 띈다. 상지는 국내 서원 650여 곳 가운데 도동서원에만 있다고 한다.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동방5현으로 꼽는데, 그 가운데 가장 웃어른을 모신 곳이라는 표시다.

 

한훤당 김굉필은 평생을 학문으로 살다 갔다. 김종직에게 <소학>을 배워 수제자가 됐고, 조광조를 비롯해 수많은 후학을 가르쳤다.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으로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제자인 김굉필 역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는다. 1610년(광해군 2) 조광조에 의해 동방5현의 최고봉으로 복원된다. 퇴계 이황은 김굉필을 두고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며 칭송했고, 이는 서원의 이름 ‘도동’이 됐다.


도동서원 담장은 중정당, 사당과 함께 보물 350호로 지정됐다. 진흙 사이에 암키와를 엇갈리게 쌓고, 중간중간 수막새를 넣은 솜씨가 단정하면서도 멋스럽다. 담장을 따라 중정당 뒤쪽으로 돌아가면 사당이다. 사당에 오르는 계단 역시 좁고 투박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여쁘다.

 

돌계단 들머리에 태극 문양, 난간에 새긴 꽃봉오리, 계단 한가운데 튀어나온 양두석 등 꼼꼼히 보지 않으면 놓치기 쉬운 장치가 곳곳에 있다. 특히 내삼문 앞 계단 바닥에 꽃 한 송이가 새겨졌다. 김굉필을 모신 사당 앞에 사철 지지 않는 꽃 한 송이 피워 올린 제자들의 마음이 꽃 같다.


도동서원 옆에 대니골 등산로가 있다. 솔밭 사이로 난 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김굉필 묘가 보인다. 솔향기, 바람 소리와 함께 겉치레보다 마음가짐을 중히 여기던 옛 선비의 정신을 곱씹으며 걷기 적당한 길이다. 은행나무 노랗게 물드는 가을에, 사당 앞 모란이 피는 고운 봄날에 다시 와도 좋을 도동서원이다.


도동서원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한훤당고택이 있다. 김굉필 사후 11대손 김정제가 터를 잡고 300년 넘게 대를 이어온 종택으로, 최근 몇 년 새 예쁜 한옥 카페로 이름났다. 품격 높은 고가에서 만든 전통차와 유기농 커피를 즐기며 특별한 시간을 누려보자. 한옥스테이도 운영한다. 금계포란형 명당이라니 하룻밤 묵어가도 좋겠다.

 

▲ 도심 속 한옥마을,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남평문씨본리세거지(대구민속문화재 3호)는 도심 속 한옥마을로 유명하다. 흙담이 둘러싸인 마을에 수봉정사, 광거당 등 멋스런 고가가 줄을 잇는다. 옛 골목에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필 때면 전국에서 사진작가들이 몰려든다. 5분 거리에 벽화인지 진짜인지 구별하기 어려운 마비정벽화마을이 있어서 함께 둘러볼 만하다.


호젓한 여행지로 사문진나루터와 화원동산을 추천한다. 우리나라 최초로 피아노가 들어온 곳으로 알려진 사문진나루터가 휴식 공간으로 복원됐다. 옛날 보부상이 허기를 달래던 주막촌은 소고기국밥 맛이 기가 막히다. 국밥 한 그릇 먹고 화원동산 숲길을 거닐면 금상첨화다. 화원동산은 화원이라는 이름답게 계절 따라 다양한 꽃이 피어 꽃동산을 이룬다. 전망대에 서면 금호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 풍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달성 하목정(대구유형문화재 36호)은 SNS 사진 명소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종문이 세운 지 400년이 넘었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머무른 인연으로 하목정이라는 이름을 직접 써준 것이라고 한다. 배롱나무꽃이 피는 계절이면 인생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2. 안동 도산서원


퇴계 이황의 제자들은 스승이 돌아가시고 딜레마에 빠졌다. 스승을 모실 사당과 서원을 지어야 하는데 스승이 세운 도산서당을 허물 수도 없고, 다른 곳에 터를 잡자니 스승이 〈도산십이곡〉을 지어 부를 만큼 아낀 곳을 외면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고심 끝에 도산서당 뒤쪽에 서원 건물을 지어 서당과 서원이 어우러지게 했다. 도산서당과 농운정사, 역락서재 등 앞쪽 건물은 퇴계의 작품이요, 전교당과 동·서광명실, 장판각, 상덕사 등은 제자들이 지었다. 퇴계가 꿈꾼 유교적인 이상향인 안동 도산서원(사적 170호)은 이렇듯 스승과 제자가 시대를 달리하며 완성한 의미 있는 공간이다.

 

▲ 퇴계가 설계한 도산서당은 3칸 규모로 아담하다.    


도산서원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을 흠모하는 제자들이 세웠으나, 그 출발은 퇴계의 도산서당이다. 퇴계는 1501년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나 중종·인종·명종·선조 등 네 임금을 섬겼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단양군수와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됐다. 관직에 140회 이상 임명됐으나 절반은 고사했는데, 스스로 지은 호 퇴계(退溪) 역시 ‘물러남’이라는 뜻이 있다.


이황은 1557년 도산서당을 열기로 마음먹고, “도산에 안식처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만년에 가장 기쁜 일”이라며 친구에게 편지를 쓸 정도로 좋아했다. 뒤로 야트막한 산을 두르고, 앞으로 낙동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이다.

 

명종의 부름으로 한양에 머무르느라 서당을 짓는 데 4년 가까이 걸렸으나, 도산서당에는 퇴계의 꼼꼼한 설계와 철학이 담겼다. 도산서당은 방과 마루, 부엌이 모두 단칸이다. 선생의 소박함이 그대로 드러난 대목이다. 최소한의 공간에서 독서하고 수양하며, 저술하고 교육했다. 마루와 방 사이 기둥에 아담하게 걸린 ‘도산서당’ 현판은 퇴계가 썼다.

 

▲ 퇴계의 당당한 필체가 인상적인 ‘도산서당’ 현판.    


농운정사는 도산서당을 세운 이듬해에 지은 건물로, 유생이 머무르던 기숙사다. 공부에 열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공(工) 자형’으로 지었고, 하루 종일 어느 한 곳은 반드시 해가 들도록 설계했다.


도산서당, 농운정사를 지나 계단 위쪽은 도산서원 영역에 해당한다. 길을 중심으로 좌우 건물이 대칭을 이룬다. 도서관인 동광명실과 서광명실이 마주 보고, 유생 기숙사인 박약재와 홍의재가 마주한 형태다.

 

도산서원의 핵심 건물인 전교당(보물 210호)은 유생이 모여 공부하던 강당이다. 선조가 하사한 ‘도산서원’ 사액 현판이 이곳에 걸렸다. 명필 한석봉의 글씨인데, 당시 선조가 마지막 글자부터 쓰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 전교당은 올 연말 완공 예정으로 공사 중이다. ‘도산서원’ ‘도산서당’ ‘농운정사’ 현판 원본은 한국국학진흥원 내 유교문화박물관에 있다.


도산서당을 완공한 때는 1561년, 이황이 타계한 해는 1570년, 도산서원을 지은 것은 1574년이다. 정조는 평소 흠모하던 퇴계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고자 1792년, 어명으로 ‘도산별과’를 실시했다. 한양이 아닌 곳에서 과거를 치른 유일한 경우다.

 

팔도에서 7228명이 응시했고, 서원 내에 수용할 수 없어 낙동강 변 솔숲에서 과거를 치러 11명을 선발했다. 그때 과거를 본 시사단(경북유형문화재 33호)이 강 건너편에 봉긋 솟은 언덕이다.

 

▲ 강 건너편 시사단은 조선 시대 유일하게 지방에서 과거를 본 흔적이다.    


안동댐 건설로 시사단이 잠길 것을 우려해 높이 10미터 단을 쌓았다. 서원 앞 너른 공터에 고목이 늘어서, 나무 그늘에 앉아 시사단과 낙동강 경치를 감상하기 좋다. 퇴계 유물 전시관인 옥진각에서는 매화연(벼루)과 연적, 별자리를 관측하는 혼천의 등 선생의 유품과 일대기, 펴낸 책 등을 볼 수 있다.


도산서원에서 5분 거리에 이육사문학관이 있다. “내 고장 칠월은/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청포도〉는 이육사가 1939년에 발표한 시다. 본명은 이원록인데 수인 번호 264를 필명으로 썼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어릴 때는 한학을 배웠고, 일본 유학 후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에 가입하는 등 혁명가의 길을 걷다가, 1944년 1월 베이징에서 옥사했다.


이육사문학관에서는 시인 이육사와 인간 이원록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특히 그가 쓴 시가 발표된 문예지, 시집, 이육사 관련 서적 등으로 빼곡히 채운 ‘이육사 서재’가 인상적이다. 이육사문학관은 2017년 증축과 더불어 전시물을 교체하고 다시 개관했으며, 야외에 이육사 생가를 재현했다. 문학관 뒷산 언덕에는 베이징, 미아리공동묘지를 거쳐 온 이육사 묘소가 있다.


서부리는 1970년대 중반 안동댐 건설로 수몰될 예안면 서부리를 옮겨 온 마을이다. 몇 년 전부터 옛 건물을 갤러리, 한옥 카페, 인포메이션센터로 꾸미고 마을 곳곳에 예술적인 손길을 더해 ‘예(藝)끼마을’로 부른다.


예끼마을에서 안동호반자연휴양림까지 이어진 선성수상길은 안동호에 놓은 부교다. 주변 풍광이 그림 같아 1km 남짓한 선성수상길이 짧게 느껴진다. 중간에 마련된 쉼터에 수몰된 예안국민학교 관련 조형물이 인상적이다.


2019년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안동 임청각(보물 182호)은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생가다. 석주는 가산을 모두 처분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 식솔 5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초대 국무령을 지내는 등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임청각은 석주를 포함해 독립운동가 9명이 태어난 고성 이씨 종택이다. 임청각 군자정에는 퇴계를 포함해 선비들의 글씨가 가득하다.


임청각에서 철길을 따라 100미터 정도 가면 난데없이 높은 탑이 나타난다. 통일신라 때 조성된 안동 법흥사지 칠층전탑(국보 16호)이 있다. 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높이 17미터 전탑만 남았는데, 우리나라 전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됐다.


안동의 밤은 월영교가 책임진다. 해가 지면 다리와 주변 산책로에 조명이 들어와 운치 있다. 선선한 강바람을 느끼며 가볍게 산책하기 좋다. 조금 높은 곳에서 감상하고 싶다면 월영교 입구에 자리한 안동물문화관 전망대로 향하자. 월영교 야경 사진을 찍는 포인트다.

 

<콘텐츠 제공=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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