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2부 <5> 블루문

“어차피 몸 팔아 먹고사는 처지에 새침 떨 건 없잖아?”

글/김영권(소설가) | 기사입력 2019/08/30 [11:49]

김영권의 장편소설 ‘몽키 하우스’ 제2부 <5> 블루문

“어차피 몸 팔아 먹고사는 처지에 새침 떨 건 없잖아?”

글/김영권(소설가) | 입력 : 2019/08/30 [11:49]

미군은 마음에 드는 여자 골라 미약 마신 채 춤을 추고…
기도 녀석이 잔뜩 폼 잡고 서서 양공주들의 보건증 검사

 

섹스 천국 아메리카 뒷골목에서 놀던 놈들 몸속에 성병균 잠복
각종 성병균은 한국 여성 자궁 속에서 독버섯 피우며 점점 창궐

 

▲ 상국은 미군 기지촌 여성을 통해 그곳의 감춰진 진실과 맞닥뜨리게 되는데. 사진은 영화 ‘아메리카 타운’ 한 장면. 

 

다시 번다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청운의 하루는 일반인들과 달리 새벽 2시쯤부터라고 할 수도 있고 오후 3시부터라고도 할 수 있었다. 클럽의 시간은 미군들의 생활 조건에 맞춰져 돌아갔다. 그들의 군영 업무가 끝나는 오후 5시 무렵에 문을 열기 때문에 그 전에 일어나 준비할 일이 많았다.

 

홀 바닥을 깨끗이 닦은 후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의자를 내려 정리하는 건 기본이고, 주방을 청소하고 당일 필요한 각종 식료품들을 제자리에 비치해 놓아야 했다. 칼도 새파란 빛이 날 정도로 잘 갈아 놓아야 했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엔 주방장이 ‘이래서는 파도 송송 썰지 못하겠군. 시험적으로 한번 찔러 볼까?’ 하고 빙글빙글 웃으며 칼날을 청운의 복부에 들이댔다.


준비가 끝나면 모두 홀 지배인 앞에 부동자세로 서서 일일 훈시를 들었다.
가능한 친절하게, 속임수가 아니라 달콤함으로, 매상은 최고로!


홀 보이에 비해 카운터 보는 여자나 바텐더와 기도(문지기)는 나름 좀 자유로운 태도를 보였다.


홀 천장에 장치된 무지갯빛 유리 공이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하면 들뜬 환락의 하루가 문을 연다. 그건 고락(苦樂)과 같은 것이다. 쾌락을 얻기 위해서는 한 개인 속에서도 고통이 따라 생기듯, 어떤 사람들이 즐겁기 위해서는 어떤 다른 사람들의 고생이 소비돼야 한다. 고락 총량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혹은 고통 총량의 법칙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고통의 양은 같다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미국과 여자, 그리고 요지경


널따란 홀은 서구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듯한 긴 목로 앞엔 분홍색 의자가 놓였고, 카운터 뒤쪽으로 설치된 투명한 유리 진열장엔 양주와 맥주 그리고 콜라를 비롯한 각종 음료수 외에도 스낵류와 아몬드 봉지 따위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쪽 구석에 설비된 음악실로 장발에 낯빛이 흰 디스크 자키가 들어가면 양쪽 벽에 붙은 오디오에서는 감미로운 팝송이나 재즈가 흘러나왔다. 그건 쾌락을 갈구하는 육체와 혼백을 부르는 듯이 느껴졌다.


그때쯤이면 진한 화장으로 일상과 과거를 감춘 여자들이 슬슬 홀 안으로 기어들었다. 그녀들 중 일부는 클럽 건물 위층의 방에서 기거했고, 일부는 옆에 붙은 별채에서 마마상(포주)과 함께 생활하거나, 아예 외부에 방을 얻어 살아가기도 했다. 그런 독립 여자들은 미군과 일정기간 계약을 맺고 동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윽고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미군들이 밀려들기 시작하면 이국적인 체취는 한결 짙어지고 음침한 색전등들이 반짝이며 홀은 점점 몽환적인 요지경(瑤池鏡) 속으로 변해 갔다.


마치 저 멀리 밀림에서 온갖 동물들이 짝짓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다르다고 할까, 미군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여자를 골라 미약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무지갯빛 미러볼이 천장에서 환락의 신(神)의 눈처럼 빙글빙글 천천히 돌며 요염스런 빛을 비추는 동안 이국 남녀들은 그 인조 유리궁전을 맴돌며 찰나적인 요지경의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청운은 문득 숨이 막힌 듯 답답해지며 왠지 모를 허망감에 가슴속이 메슥거릴 때가 있었다. 그러면 잠시나마 홀 밖으로 나가 선 채 차가운 겨울바람을 들이마셨다. 아무데도 내가 살 곳은 없구나. 이젠 돌아갈 고향도 모르고….


청운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겨울 하늘에 떠서 떨고 있는 별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곧 눈물이 솟을 듯해 고개를 숙였다.

 

▲ 아버지의 빚에 쫓겨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혼자 한국에 오게 된 엘베는 미군 클럽에서 일하고 있다. 사진은 영화 ‘성난 화가’ 한 장면.    

 

악명 높은 낙검자 수용소


입구에서는 기도 녀석이 천국 또는 지옥의 문지기인 양 잔뜩 폼을 잡고 서서 양공주들의 보건증(성병 검진증)을 검사하고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보건소에 가서 음부를 벌린 채 보건소 남자 의사의 진찰을 받는다는 건 아무리 몸 팔아 먹고 사는 여자일지언정 수치스럽고 괴로운 일이었으리라. 차라리 인간임을 포기하고 생각도 감정도 없는 일개 나무 인형으로 변하길 바라지 않았을까. 그래도 살아가기 위해서는 국가의 시책에 순종해야 할 뿐이다. 나라에서 인정하지 않는 인권을 주장한다는 건 범죄이기에 어긴다면 지옥 같은 감옥과 죽음이 기다리는 엄혹한 독재 시대였다.


성병에 대한 방비는 당연한데, 문제는 한국 여자들만 강제적으로 단속할 뿐 미군은 그저 자유방임한다는 점이었다. 섹스 천국인 아메리카 뒷골목에서 깜냥껏 놀던 놈들이 몸속에 잠복시킨 채 지니고 온 강력한 각종 성병균들은 한국 여자의 자궁 속에서 독버섯을 피우며 점점 더 창궐할 수 있는데도, 미군 당국과 그들의 하수인 격인 한국 정부는 오직 힘없는 여자들만 닦달했다.


기도 녀석에게 걸리면 클럽 출입을 금지당할 뿐이지만, 만일 재수 없게 미군 헌병에게 붙잡히는 날이면(성병에 걸렸든 걸리지 않았든) 일단 감옥으로 끌려가야 했다. 그 감옥은 바로 악명 높은 낙검자 수용소인 몽키하우스란 곳이었다.


들고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져서 청운은 급히 홀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본격적인 유흥 시간인 것이다. 생음악을 연주하는 캄보밴드가 로맨틱하면서도 격렬한 곡조를 흘려내는 동안 청운은 부지런히 어지러운 빈 테이블을 치우고 좌석을 정돈했다. 그리고 눈치 빠르게 물걸레로 지저분한 바닥을 닦아냈다.


물론 힘든 일이긴 했지만 그는 고생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닥치는 모든 일을 가능한 잘 겪어 두면 나중에 의외로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조금쯤 알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겪었던 참혹한 일들을 회상하면 그 정도는 충분히 견딜 만했다.


오히려 일보다는 인간관계가 더 힘들 경우가 많았다. 지배인은 클럽 여주인의 8촌 오빠이자 정부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는 쿠데타로 집권해 독재 철권통치를 계속하는 박 대통령을 위대한 영도자로 찬미하며, 자신도 그런 식으로 종업원들에게 권력을 휘둘렀다. 눈에 거슬리면 위협과 폭력을 다반사로 행사하는 한편 당근을 써서 구슬리기도 했다. 동두천 최대 수준인 블루문에서 쫓겨나면 다른 곳에도 들어가기가 어려우므로 다들 쉬쉬하며 참아 넘겼다.


청운은 자신이 무담시 욕설을 듣고 인격 모욕을 당하는 것도 괴로웠지만, 왠지 다른 사람들이 부당한 처사를 받는 것 또한 마치 자기가 그런 더러운 토악질 앞에 선 듯해 고통스러웠다. 그래도 소개해 준 피에로 형을 생각하며 꾹 참았다.


‘내가 죽는 건 겁나지 않지만, 그 형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되지.’


그러면서 씩 웃곤 했다. 어쨌든 자신이 말끔히 정돈한 자리에 새 손님이 앉아 가져다 준 술을 음미하며 뭔지 모를 얘기와 함께 미소 지을 땐 잠깐이나마 노동의 흐뭇함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어디에나 지옥의 구덩이는 있는 법이었다. 청운에게 가장 괴로운 시간은 주방에 들어설 때였다. 그것도 밤 11시가 넘어 손님도 대부분 눈맞은 여자와 함께 팔짱을 낀 채 사라지고 한가한 시간이었다. 미군들은 술은 많이 마시지만 안주는 별로 대단한 걸 시키지 않기에 평소에도 주방은 비교적 한가로운 편이었다.


스물 네댓 살쯤 돼 보이는 주방장은 지배인보다 더 심한 박통 숭배자이자 극단적인 친미주의자였다. 늘 걸치고 다니는 하얀 야구 모자와 티셔츠엔 양키 팀 마크와 미국 성조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한 번씩 꼭 미친 듯이 미국과 미군을 향해 욕을 퍼붓곤 했다. 그럴 때면 입가엔 허연 침거품이 풀풀 생겨났다. 물론 자신의 아방궁인 작은 주방에서 소리는 잔뜩 억누르고 증오심은 펄펄 끓이며 쥐새끼처럼 내는 소음이라 바깥에 들키진 않았지만…과연 그가 친미주의자인지 미친(美親) 녀석인지 종잡을 길이 없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곱슬머리에 피부가 약간 가무잡잡한 것을 보면 조금쯤 트기 같기도 한데 본인은 퍼머 머리라고 주장한다. 혹시 미군 아비가 어린애에게 달콤한 약속을 속삭이다가 상처와 배신감만 남긴 채 아메리카로 줄행랑쳐 버린 건 아닐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청운이 안으로 들어서자 주방장은 불그죽죽한 입술 새로 징그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개새끼… 암캐 엉덩이나 쫓아다니는 양키 놈들… 흥, 그래봤자 흰둥이나 검둥이나 결국 같은 짐승일 뿐이야. 킬킬….”

 

청운은 설거지를 하려고 했다.


“어이, 씨발… 너무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 좀 쉬라구.”


아마도 또 찬장 속에 숨겨둔 시바스 리갈을 이따금 꺼내 찔끔찔끔 마신 모양이었다. 지배인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놈이 청운에겐 마치 주방이라는 소궁궐의 왕처럼 군다.


“씨발, 인생이 도대체 뭐야?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왜 막느냔 말이야, 응? 내가 뭐 아주 대단한 걸 원하는 것도 아닌데 말씀이야… 낄낄, 대체 넌 무슨 재미로 사는지  꽤 궁금해. 인생엔 목적이 있어야지, 낄낄….”


“주방장 형은 그 뭐… 이상스런 목표를 향해 잘 나가고 있나요?”


“후후, 그럼… 오늘도 또 한 년 조질 거야. 야, 너도 한번 껴 볼래?”


청운은 씩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짜식, 꺼벙이 같으니….”


청운이 그동안 살펴본 그는 변태성이 농후했다. 미식가에다 찰나적인 향락주의자로 사는 건 자유라 치더라도, 여자들의 속옷을 훔쳐 냄새를 맡다가 갈기갈기 찢는다거나, 화장실 문 밑의 틈새로 상체를 잔뜩 구부린 채 훔쳐보며 악마적인 미소를 짓는 꼴을 보면 만정이 다 떨어졌다.


그의 원대한 목표는 평생 동안 여자를 1000명 이상 따먹는 것이었다. 그 실적을 표시하기 위해 자그마한 스크랩북에 공략한 여자의 음모를 한 올씩 수집해 넣고 관련 사항을 메모해 둔 것을 청운에게 비밀스레 보여주며 자랑스레 낄낄거리기도 했다.

 

똘마니 정보원들의 음모


갑자기 기도 놈이 들어서며 호들갑을 떨었다.


“아 좆나게 배고프네. 형, 라면이나 하나 끓여 주슈.”


“얌마, 내가 니 종이냐? 쟤한테 고개 꾸벅 숙이고 부탁해 보렴.”


“쓰벌, 형이 약을 탔는지 이젠 중독돼서 형이 끓인 라면이 아니면 못 먹겠어.”


“미친 새끼….”


그러면서도 주방장은 냄비를 불 위에 올려놓았다. 청운은 개수대에 쌓여 있는 그릇을 씻기 시작했다.


“형, 수고스럽지만… 일단 면을 삶아서 국물을 버린 다음에 스프와 고추장을 넣어 좀 비벼 줘.”


“왜?”


“일단 그렇게 좀 해줘. 기름기가 몸에 안 좋다니까 뭐.”


“조 새끼, 또 좆에 감기 걸렸구만. 야. 청운아, 잘 알아둬라. 저런 놈은 삶을 요리해 먹는 게 아니라 인생의 음부에 먹히고 있다는 사실을….”


청운은 대꾸하지 않고 설거지만 묵묵히 계속했다.


“형, 기뻐해. 오늘 밤 그 년이 독수공방이라는 정보를 알아냈어.”


“음, 그런데 독종인데 잘 될까?”


“까짓것, 제 아무리 도도한 년이라도 주사 한 방이면 땡이지 뭘.”


“음, 헌데 난 잠든 공주를 그러긴 싫단 말야. 반항하다가 할딱거리는 맛이 있어야지. 흐흥….”


“아따, 그건 그때 가서 또 조치를 하면 되지 뭘 그래.”


“음, 하긴 맛난 걸 먹으려면 목숨이라도 걸고 모험을 해야겠지.”


“그럼, 닳고 닳은 일반 양갈보가 아니라 붕장어같이 싱싱한 댄서인걸.”


“근데… 니 좆이 독감에 걸렸으니 난 사실 좀 꺼림칙해.”


“그게 뭔 대단한 걱정이야. 정 겁나면 형이 먼저 꽂으면 되잖아.”


“하긴 뭐… 아무튼 감쪽같이 끝내야 해… 그런데 그 년은 왜 하필 빨강색을 그렇게 좋아한다니?”


“정열적이고 좋은데, 왜?”


“두어 가지 의미가 있지. 열정뿐만 아니라 피와 살인….”


“걱정 마. 벗겨 놓으면 하얀 알몸뚱이가 한결 요염할 테니까.”


청운은 귀를 곤두세웠다. 놈들이 공모해서 무슨 나쁜 짓을 저지르려는 성싶었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어떤 여인을 해치거나 죽이는….


그때 주방장이 슬그머니 다가서더니 날카로운 회칼을 마치 서부영화의 주인공이 권총을 돌리는 듯 휘리릭 내돌린 후 청운의 복부에 갖다 댔다.


“만약 좀전에 한마디라도 들은 말이 있다면 잊어버리고, 없다면 아예 상상하지도 마. 까딱 씨부렸다간 확 쑤셔 버릴 테니까.”


놈은 눈알을 부라리며 입술로만 히죽 웃었다. 청운은 한숨을 쉬곤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식을 조리하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기도 녀석과 주방장 놈은 미군들에겐 슬슬 기면서도 클럽의 동족인 종업원이나 여자들에겐 은근히 위세를 떨었는데, 그건 그들이 지배인의 조종을 받는 똘마니 정보원이기 때문이었다.

 

“여관 구석 밀실에 살다니”


디스크 자키의 영업 종료 방송에 이어 작별의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잠시 후 기도 놈이 휘파람을 불며 주방 안으로 들어갔다.


청운은 재빨리 청소를 하는 한편 신경을 곤두세워 주방 쪽에 주의를 집중했다. 빈 접시와 컵을 들고 가 작은 구멍으로 밀어넣으면서 슬쩍 주방 안쪽을 살펴보니 두 놈은 노란 양주를 마시며 키득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놈들이 뭔지 쑥덕거리며 홀로 나오더니 바람처럼 재빨리 사라졌다. 청운은 하던 일을 놓아두곤 곧장 뒤쫓았다. 며칠 전에 들어온 상철이란 애한테 미안하다는 듯 손을 흔들곤….


청운은 길가로 나서서 두리번거렸다. 이미 자정을 넘어 네온사인이 거의 다 꺼져 버린 거리는 어둠에 묻혀 있었다.


청운은 문득 가만히 눈을 감곤 귀를 기울였다. 북파공작원 훈련 시절에 익힌 감청 비법을 사용해 보기 위해서였다. 일반 군인보다 열 배 이상 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혹독한 훈련….


국가 정보부에서 파견된 물색관에 속아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붉은 모자를 쓴 조교들은 옷을 모조리 벗겨 놓곤 몽둥이 타작을 시작했다. 그리고 사흘 동안 밥을 전혀 주지 않았다. 사회에서 찐 헛살을 뺀다는 명분이었다.

 

하루 이틀이 지나자 몰골 처연한 대원들의 눈에 문득 파란 불이 켜졌다. 훈련 도중 주어진 시간 안에 험한 산속을 헤매며 풀뿌리를 캐먹고 뱀을 잡아먹었다. 배가 지나치게 고프면 인육이라도 먹고 싶어질 터였다.

 

사흘째 되던 날, 기진맥진해 쓰러진 동료의 허벅지를 베어 먹은 광란자 한 명이 총살되었다. 그건 헛살을 뺀다는 명분하에 사실상 인간성을 벗어난 독종 괴물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청운은 양쪽 귀를 한번 매만지고 나서 어두운 거리를 박쥐처럼 내달렸다. 가뭇가뭇 들려오는 구둣발 소리를 감지한 것이다. 골목길을 이리 돌고 저리 돈 끝에 이윽고 놈들의 모습을 포착했다. 두 놈은 어느 여관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청운은 슬금슬금 다가갔다. 놈들은 카운터에 앉은 뚱뚱한 아줌마와 얘기를 나누더니 돈을 지불하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청운은 급히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돈을 찾았다. 하지만 한푼도 없었다.


‘어떡한다? 곧장 들어가서 놈들과 동행이라고 말해 볼까? 아냐, 괜히 긁어 부스름 만들 건 없지. 저 뚱보 아줌마의 눈이 게슴츠레한 걸 보면 자다가 깬 게 틀림없어. 잠시만 기다려 보자.’


청운은 잔뜩 긴장한 채 생각했다. 그러곤 행인 흉내를 내며 이리저리 슬슬 거닐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뚱보 여자는 의자에 푹 기댄 채 고개를 떨구곤 졸기 시작했다.


청운은 삐걱거리는 출입문을 조심스레 열고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숙박부 옆에 놓인 볼펜을 슬쩍 집어들곤 발소리를 죽여 재빨리 계단을 뛰어올랐다. 복도 양쪽으로 방이 많았다. 놈들은 어디로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는지 흔적도 없었다.


청운은 다시 한번 귀를 잔뜩 곤두세운 채 방문 안쪽에 신경을 집중시켰다. 여러 가지 소리가 청각을 자극했다. 할딱거리는 소리, 쾌락에 겨운 신음소리, 기침소리, 웃는 소리, 우는 소리… 고통을 못 이겨 자지러지는 여자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방문을 벌컥 연 청운은 곧 닫고 말았다. 대머리 노인이 비디오 화면 속의 수간(獸姦) 당하는 여인을 보며 히득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청운은 맨 구석에 붙은 방문에 귀를 갖다 댔다. 분명하진 않았지만 굵은 남자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청신경을 집중하자 좀더 선명해졌다.


“까불지 말고 곱게 있어. 만일 지랄하면 이 시퍼럴 칼날로 고운 얼굴을 난도질하고 아예 춤을 못 추도록 발목 인대를 끊어 버릴 테니까. 흐흐….”


“아….”


“입주둥일 틀어막을 수도 있지만, 이런 여관에서 비명 소리가 난들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


“흐윽….”


“입을 다문 채 노려보니 더 매력적이구먼. 흐흣… 어차피 몸 팔아 먹고 사는 처지에 너무 새침떨 건 없잖아? 좋은 게 좋지. 만약 여기서 반항하거나 차후에라도 어디 가서 개소릴 지껄였다간 병신 꼴로 이 바닥을 떠야 할 거야. 흐흐흐….”


“붉은 색 옷을 입고 춤출 때도 섹시했지만, 이렇게 새하얀 순백의 잠옷을 걸치고 있으니 한결 더 매혹적이야. 안 그래?”


“흐흥, 그렇군여. 형, 너무 흥분하진 마.”


“난 이런 순간엔 목숨까지도 내걸고 싶으니까.”


“근데 요 쌍년이 어떤 양키 장교 놈과 동거한다는 소문이 돌더만,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을 뿌려 놓았던가 보군.”


“아니, 그건 왜?”


“그렇게 연막을 쳐놓으면 시러베 잡놈들이 쉬 넘겨보질 않거든. 여긴 양공주나 콜걸의 방이 아니라 마치 처녀 수녀님의 방같지 않수? 이런 여관 구석 밀실에 살다니… 혹시 이 년은 마타하리 같은 스파이가 아닐까 몰라.”


“북한에서 내려온 여간첩?”


“응.”


“그럼 더 재미나겠군. 일단 알몸뚱이로 만들어 놓고 음부 속을 탐색해 보면 서서히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겠지. 여자는 몸으로 말한다는 영화 대사도 있잖아. 흐흐….”


잠깐 짧게 여자의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다가 멎었다.

 

청운은 좀전부터 볼펜 뚜껑을 열고 스프링을 꺼낸 후 길게 늘여서는 다시 두 겹으로 접어 살살 매만지고 있었다. 그걸 열쇠구멍 속에 넣어 조심스레 이리저리 돌렸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이윽고 딸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좁은 틈새로 들여다보니 놈들은 여자를 강간하려고 잔뜩 열을 올리고 있었다. 여자의 허연 몸뚱이 위로 주방장 놈이 올라타는 중이었다. 여자가 고개를 비틀자 기도 놈이 잭나이프 칼날을 얼굴에 대곤 위협했다. 순간 청운은 흠칫 놀랐다.


‘역시 그녀였군. 위기 상황에 자꾸 얽혀서 나서는 건 별로 좋지 않은걸…. 늘 완전히 보호해 주지 못할 바엔 아예 이쯤에서 그만 물러서는 게 낫지 않을까? 하지만 일단 저런 상황을 눈앞에 보고도 외면할 순 없지. 복면이라도 하나 만들어 올걸 그랬군. 하긴 그럴 만한 틈도 없었지만…. 혹시 저 아가씨에게 내 얼굴을 보여주어… 정의의 기사로서 그녀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싶은 흑심은 없는 걸까?’


그러나 생각을 계속할 여유는 없었다. 새는 비명 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청운의 몸은 이미 방 한가운데 서 있었다. 기도 녀석도 보통내기는 아닌 듯 즉시 몸을 돌려 자세를 잡곤 시퍼런 칼을 내뻗었다.

 

<다음 호에도 ‘블루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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