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今疏通-행불유경(行不由徑)

‘행불유경’의 도 무너져 정신 황폐…어쩔 것인가?

글/이정랑(중국 고전 연구가) | 기사입력 2019/07/26 [10:49]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今疏通-행불유경(行不由徑)

‘행불유경’의 도 무너져 정신 황폐…어쩔 것인가?

글/이정랑(중국 고전 연구가) | 입력 : 2019/07/26 [10:49]

뒤안길 취하지 않고 정정당당 큰길로 나아가는 게 行不由徑
내로라 하는 거물급 인사들 ‘행불유경’ 집어치우고 邪道 택해
돈이 神이요 곧 신앙…돈이 전부이며 돈에 환장한 자 수두룩

 

미친 개가 짖어대듯 더러운 입을 벌려 하루가 멀다 하고 막말
사회 각계각층 양심적 지도자들부터 ‘행불유경’에 솔선수범을

 

행불유경(行不由徑). 정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는다.


“행불유경(行不由徑)이란! 샛길, 지름길, 뒤안길을 취하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큰길로 나아간다는 군자대로행(君子大路行)과 일맥상통하는 뜻이 있으며, 눈앞의 이익을 탐하여 얕은 꾀를 쓰지 않고 떳떳한 방법으로 일을 공평무사(公平無私)하게 처리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는 <논어>의 ‘옹야편(雍也篇)’에 있는 자유(子游)의 말로, 길을 감에 있어 지름길로 가지 않고 바른 길로만 다닌다는 말이다. 이 말은 자유가 노(魯)나라 무성(武城) 고을 장관(읍장)이 되었을 때 공자가 무성으로 가 자유에게, 물었다.


“네가 훌륭한 일꾼(인재)을 얻었느냐?”


그러자 자유가 답했다. 


“예, 담대멸명(澹臺滅明)이란 사람이 있는데, 길을 다닐 때 지름길로 다니는 일이 없고 공무가 아니면 제 방에 오는 일이 없습니다.”


행불유경은 자유의 대답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러니까 담대멸명은 공적인 사무가 아니면 사사로이 장관(읍장)의 방에 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는 그가 얼마나 자기 직분에 충실해 공명하고 정대한가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담대멸명으로서는 장관인 자유에게 사사로운 청을 하거나, 남이 알지 못할 비밀을 은밀하게 속삭일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공자는 그날부터 담대멸명을 제자로 삼았다. 그런데 그는 아주 못생긴 사람으로 제자 중에 가장 보기 흉한 추남이었다. 그러나 공자는 얼굴만 보고 사람을 평할 수 없다는 것을 담대멸명으로 하여금 터득했다.

 

▲ 이 나라 최고 통치자란 박정희·전두환·이명박(사진 오른쪽 두 번째)·박근혜(왼쪽)가 돈과 권력을 위해 저지른 행위를 보라!

 

보느니 편법이요 듣느니 부정


그렇다면 ‘행불유경’의 진정한 뜻은 무엇일까? 단순히 길을 걸을 때 지름길로만 가지 않으면 행불유경일까?


이도 물론 맞는 말이지만 보다 더 본질적인 뜻은 정도(正道)가 아니면 행하지 않음에 있다. 부언 하자면 올바르고 정당하지 않은 일은 이행하지 않는다는 이런 말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은 방법이야 어떠하든 목적만 달성하면 된다는 말로, 목적 달성을 위해선 어떤 방법(편법)도 상관없다는 이야기다. 서울을 가려면 바로(정도) 가야지 어찌하여 모로(편법) 가도 상관없다는 걸까? 이는 돈을 주고 벼슬을 사든 아첨을 해서 벼슬을 얻든 벼슬만 하면 된다는 논리와 다를 바 없다.


실제 우리는 또 이런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돈을 주고 직위를 사는 매관매직(賣官賣職)이며, 돈을 주고 작위를 사는 매관매작(賣官賣爵), 그리고 자기가 가장 정직하고 자기가 가장 양심적이라고 떠벌이는 정계(政界)·법조계(法曹界)·재계(財界)·체육계(體育界)·언론계(言論界)·교육계(敎育界)·학계(學界)의 내로라 하는 거물급 인사들! 알고 보면 가장 부정직하고 가장 비양심적인 위선자들이었다.


이들은 다 ‘행불유경’ 집어치우고 지름길을 택한 자들이요, 정도가 아닌 사도(邪道)로써 지름길을 걷는 자들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성공을 하고, 정직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보다는, 부당한 방법으로 성공을 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목적을 이루려는 사람이 더 많은 슬픈 우리 이 현실, 정치계가 그렇고,법조계가 그렇고, 재계가 그렇고, 관계가 그렇고, 교육계가 그렇고, 경제계가 그렇고 체육계와 언론계가 그렇고, 학계가 그렇다.


그러니 이걸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겠는가? 보느니 편법이요(지름길) 듣느니 부정이니 그저 어떻게 해서라도 땀 흘리지 않고 불로소득하려는 마음뿐이다.


그래서 아부 아첨을 하든 훼절 변절을 하든 출세만 하면 되고, 강도 절도를 하든 사기 공갈을 치든 일확천금으로 한 밑천 잡으면 그만이라는 생각뿐이다. 때문에 배금주의가 생기고 한탕주의가 생겨 사람을 죽여서라도 돈만 벌면 된다는 인명경시 풍조가 만연한 것이다.


이들은 돈이 신(神)이요 돈이 신앙이어서 돈만이 전부인 돈에 환장한 자들이다. 이들은 출세가 목표요 출세가 목적이어서 어떤 부도덕 어떤 비양심도 문제 삼질 않는다.


그렇다면 이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정신, 정신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정신이 썩었기 때문이다. 아니 웬 못된 바깥 돌이(퇴폐문화)가 굴러와 박힌 돌(미풍양속)을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웬 사나운 바깥 것이(문물, 주로 물질문명) 홍수처럼 밀려와 아름답던 인(仁)과 의(義)와 덕(德)과 충(忠)과 신(信)을 송두리째 짓밟았기 때문이다. 압살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나마 우리가 지탱할 수 있는 것은 바깥 것에 치어 안의 것이 빈사(瀕死)의 사경을 헤매면서도 인과 예와 덕과 충과 신을 외친 이가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 안 가리는 이 타기할 풍조.


출세와 권력을 위해서라면 중상모략도 불사하는 이 더러운 풍토.


돈을 위해서는 아비 어미 자식들까지 무자비 하게 살육하는 세태.


돈이 아무리 좋은들 인명한 하고 권력이 아무리 좋은들 인간만 하라!!

 

안 될 일 삼가며 올바로 살자


“세상에 무엇이 값지다 해도 인명만큼 값진 게 없고, 세상에 무엇이 귀하다 해도 사람만큼 귀한 게 없다. 세상을 다 준들 어찌 인명을 살 수 있을 것이며, 우주를 다 준들 어찌 사람을 살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지난날(공화당 시절) ‘하면 된다’는 시대를 산 일이 있었다. 그리고 ‘잘살아 보자’는 구호를 들으며 산 일도 있었다. 이는 물론 하면 안 될 일이 없으니 용왕매진(勇往邁進)하자는 뜻이요, 하도 배 곯고 살았으니 어떻게 해서라도 배 좀 채우고 살아보자는 뜻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전자는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세 글자가 없다’는 나폴레옹 식 발상이요, 후자는 진저리나는 가난을 유산처럼 이어왔으니 어떡하든 이 가난을 물리쳐 보자는 절규임에 틀림없었다. 때문에 이 두 슬로건이나 좌우명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져 일부 국민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래서 소기의 목적을 어느 정도는 달성했다.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뜻은 완전히 달라진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우선 ‘하면 된다’가 그것인데 사람에겐 하면 안 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이럼에도 ‘하면 된다’는 건 결국 목적을 위해서는 어떤 수단 방법도 관계없다는 논리와 직결된다. ‘잘살아 보자’는 말도 이와 같아 배를 채우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예컨대 양심과 도덕을 저버려서라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되는 셈이다.


당장 먹기엔 곶감이 좋을지 모르지만 원대한 국가 장래와 국민 덕성의 윤리를 생각했다면, 하면 된다는 것을 ‘안 될 일은 하지 말자’로 해야 했고, 잘살아 보자는 ‘올바로 살자’로 했어야 옳았다.


하기야 뭐 언제 구호가 나빠서 실패했는가?


저 5공(제5공화국) 때의 구호는 기막히게 좋아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사회 건설’이 아니던가.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사회 건설, 이 얼마나 기막히게 멋진 말인가. 모르긴 하되 이 지상에 존재하는 나라치고 이처럼 멋진 구호를 가진 나라는 없을 것이다. 전국 방방곡곡 면면촌촌 어딜 가나 관공서 현판에 붙어 있던 이 구호.


그런데, 이 멋진 구호가 왜 실패했는가?


이유는 간단하다.


‘행불유경’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 구호를 만든 사람들이, 그리고 이 구호를 써 붙인 사람들이 ‘행불유경’을 하지 못한 채 지름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국민이 ‘행불유경’을 하지 못하고 지름길 걷는 거야 당연한 일 아닌가?


국민이야, 백성들이야 바람 앞의 풀과 같아 바람이 이리 불면 이리 쏠리고, 저리 불면 저리 쏠린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지, 윗물이 흐린데 어떻게 아랫물이 맑을 수 있겠는가. 이를 우리는 상탁하부정(上濁下不淨)이라 하여 꼭 뒤에 부은 물이 발치까지 내려감에 비유한다.

 

군자는 그릇 만들지 말라 했거늘


<논어>에는 ‘군자불기(君子不器)란 말이 있다. 군자는 그릇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군자는 그릇을 만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세태는 어떠한가?


하나같이 그릇을 만들려고 아우성치지 않는가. 그릇을 만들기 위해 전쟁을 하고 있지 않은가. 내 아들, 내 딸만은 일류대학, 명문대학에 보내 좋은 그릇을 만들려 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효충과 신의와 예지를 가르쳐 인간을 만드는 일이지, 남을 거꾸러뜨려서라도 일류대학 나와 입신출세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진작부터(초등학교 때부터) 효충, 신의, 예지의 인간 교육만 제대로 시켰다면 오늘과 같은 지름길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


물은 트는 대로 흐르는 법이요, 바람은 막는 대로 부는 법이어서 심성이 형성될 초등학교 때부터 효충, 신의, 예지의 인간 교육을 시켰다면 이 아이들이 절대로 지름길로 가지 않으며 좀 더 자란 후(중, 고등학교) 인간의 최고 가치는 정신(공존·공생)에 있다고 가르쳐 보라! 그러면 이들이 성인이 된 다음에도 가정은 물론 사회와 국가에 훌륭한 사람으로 이바지 해 정도(正道)만 걷는 ‘행불유경’의 실천자가 될 것이다.  


한데도 이 쉬운 이치 하나 깨닫지 못한 채 백 날 천 날 비인간화의 교육(敎育) 아닌 사육(飼育)만 시키니 이 아이들이 자라 무엇을 할 것인가. 남을 속이고 짓밟고 거꾸러뜨려서라도 자기만 잘살고 출세하면 그만이라는 극도로 야비한 이기주의만 팽배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이뿐인가?


자기를 낳아준 부모, 자기가 낳은 자식들까지 돈을 위해 속이고 짓밟고 거꾸러뜨려서도 직성이 안 풀려 폭력을 휘두르고 살육까지 자행한다.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가 된 것이다.

 

행불유경의 道 무너지고…


이 나라 최고 통치자란 박정희·전두환·이명박·박근혜가 돈과 권력을 위해 저지른 행위를 보라!

 

그리고 사법부 최고 수장이라는 양승태를 보라. 우리는 그들과 그들의 하수인들, 숭일 매국(崇日 賣國)의 독재 잔당(獨裁 殘黨)이 한 통속이 되어 저지르고 있는 맘몬이즘(mammonism)과 아베이즘(abeism)의 중병이 도져 미친 개가 주인에게 짖어대듯 더러운 입을 벌려 하루가 멀다 하고 막말을 쏟아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이들 패악집단은 만고무이(萬古無二)한 패악도 모자라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반역으로 일제의 충견이 되어 주인을 물고 뜯는 상처 내기에 더욱 혈안이 되어 광분하고 있다. 참으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이는 또 무엇 때문인가?


인간 교육, 다시 말해 인성 교육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빨리 돈을 벌고, 좀 더 빨리 출세하여 권력을 잡기 위해 저지르는 짓거리다. 그러므로 이는 정신이 황폐해진 까닭이요, 심성이 악랄해진 까닭이다. 요컨대 절대가치의 그 높은 ‘행불유경’의 도가 무너진 까닭에서다. 어쩔 것인가?


진정 어찌할 것인가?


우리는 오늘부터라도 ‘행불유경’의 참된 의미를 되새기고 실천해 나가는 길밖에 딴 도리가 없다.


지금 바로 이 나라를 이끌고 있는 사회 각계각층의 양심적인 지도자들부터 ‘행불유경’에 솔선수범하라! 국민들이 이를 따라 같이 가면 우리는 분명 일등국가, 일등국민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며 문화민족으로 우뚝 서서 세계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분명 그러해야 할 것이다!!

흰구름 23/02/19 [13:54] 수정 삭제  
  똑같은 글을 여기저기 써먹고 다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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