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광주항쟁 & 의미심장 증언들

“전두환 당시 광주 내려와 사살명령…공수부대는 성폭행”

김혜연 기자 | 기사입력 2019/05/17 [13:25]

다시 보는 광주항쟁 & 의미심장 증언들

“전두환 당시 광주 내려와 사살명령…공수부대는 성폭행”

김혜연 기자 | 입력 : 2019/05/17 [13:25]

본지가 5월18일로 창간 22주년을 맞았다. 타블로이드 판형의 시사종합 주간지 <주간현대>가 1997년 5월18일자로 창간호를 낸 것은 한국 현대사에 크게 기여한 광주 민주화 운동 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주간현대> 제1호 지면에는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시민의 증언과 아픔을 담으려 노력했고, 5·18 당시 군부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진압작전을 고발하하는 사진도 실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정치운동가이자 철학자 에이브럼 노엄 촘스키는 일찍이 “1980년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일어난 광주민중항쟁은 놀라웠다. 군부의 잔인하고 야만적인 진압은 한국 현대사에서 매우 중대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광주항쟁은 혹독한 독재정권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풍요로운 민주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한국인들이 용감하게 투쟁의 발걸음을 내디딘 사건이다”라고 진단했다. 세월은 22년이나 흘렀지만 광주항쟁을 둘러싼 한국사회의 논란은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5·18 민주화 운동을 둘러싼 왜곡과 폄훼는 여전하며, 제1 야당 소속 정치인들이 객관적·역사적 사실마저 송두리째 부인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다행히 최근에는 피지에 살고 있는 주한미군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씨가 국내에서 기자회견을 여러 차례 열어 “전남도청 앞 집단발포 즈음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갔다”는 의미심장한 증언을 내놓아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김용장씨 등의 증언을 시간대별로 중계한다.

 


 

주한미국 정보요원 출신 김용장씨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
“계엄군 첫 발포 직전 광주 방문해 시민들에 사살명령 내린 듯”
“보안사 부대원들 사복 차림으로 광주 내려가 시위대 위장공작”

 

“5·18 항쟁 당시 공수부대 성폭행…미국 국방부에도 보고했다”
“미국, 전두환으로부터 광주항쟁 사전보고 받고 사후에는 묵인”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 “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에서 시신 소각”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관이 계엄군의 첫 발포(5월21일) 직전 광주를 방문해 시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전직 미 육군 정보관이 증언해 파장이 일고 있다.


김용장 전 주한미군 정보요원은 5월1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두환씨의 당시 광주 방문과 사살명령, 헬기 사격, 북한군 개입 등 5·18 민주화 운동의 진상에 대해 증언했다.


김씨는 미국 육군의 501여단 소속 정보요원으로 25년 동안 근무했고, 5·18 당시 광주 상황을 담은 보고서 수십 건을 작성해 미군정보보안사령부에 보냈다.

 

▲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전두환 당시 계엄사령관이 계엄군의 첫 발포(5월21일) 직전 광주를 방문해 시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고 미 육군 정보관 출신의 김용장씨(왼쪽)가 증언해 파장이 일고 있다.    <뉴시스>    

 

◆김용장씨 국회 기자회견


남태평양 피지에 사는 그는 이날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5·18은 계획된 시나리오였다'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통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씨의 광주 방문 사실을 확인하고 상부에 보고했다”고 밝히면서 “전두환은 광주를 방문했다. 내가가 보고한 내용이다. 5월20일 전후로 헬기를 타고 K57 비행장에 왔고, 오자마자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다”고 증언했다.


김씨에 따르면 전두환씨는 집단 발포가 있었던 1980년 5월21일 점심 12시를 전후로 K57(광주 제1전투비행단, 광주비행장)에 갔다는 것. 전두환씨는 광주비행장에 도착하자마자 K57 비행단장실에서 회의를 열었으며, 이날 회의 참석자는 정호용 특전사령관과 이재우 505보안부대장, 불상자 1명 등 4명가량이라고 한다.


김용장씨는 “5·18 당시 광주에 파견돼 대략 40건의 첩보를 상부에 보고했다”면서 “이 가운데 5건이 백악관으로 보내졌으며 지미 카터 당시 미국 대통령이 3건을 직접 확인했다”고 소개했다.


김씨는 “당시 광주 회의에서 전두환씨 등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모른다”면서도 “방문 당일 오후 집단사살이 이뤄졌고, 이를 감안하면 전두환의 방문 목적은 바로 사살명령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회의에서 사살 명령이 전달됐다는 것이 합리적인 추정이다”라고 설명했다.


전두환씨의 광주 방문이 시민들에 대한 사살명령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


그는 일부 언론에서 ‘발포명령’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발포와 사살은 완전히 다르다. 발포는 방어 차원에서 대응하는 개념이다”라고 지적하기도.


김용장씨는 진술의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전두환이) 헬기를 타고 왔기 때문에 플라이트 플랜, 즉 비행계획서가 분명 공군에 남아 있을 것”이라고 귀띔하면서 “당시 공군 보안부대원 중에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 분들이 있다”고 덧붙였다.


허장환 전 국군보안사랑부 특명부장도 이날 기자회견에 동석해 “그 사격을 제가 직접 목도했다. ‘앉아쏴 자세’의 사격은 절대 자의적 구사(발포)가 아니었다. 그건 사살이다. 전두환은 사살명령을 내린 것이다”라고 증언했다.


김용장씨가 당시 미군 상부에 보고한 내용 가운데는 시민군으로 섞여든 남한특수원, 편의대에 대한 이야기도 포함됐다.
김용씨는 이에 대해 “일명 편의대라 불리고 시민 행세를 하던 사법군인들이 실제 존재했다. 5월20일경 K57 비행장에 30~40명이 성남비행장에서 수송기를 타고 왔다고 보고했다. 첩보를 입수한 이후 격납고로 찾아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김용장씨에 따르면 이들 사법군인들은 20~30대로 구성됐고, 신분을 감추기 위해 일부는 엉성한 가발을 쓰고 있었다. 그중에는 거지행세를 위해 넝마를 걸치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김용장씨는 또한 추론을 전제로 “당시 방화, 총격, 군 수송차량 탈취는 일반 시민이 했다고 보기 어려운 행위였다”며 “남한 특수군이 시민들을 선봉에서 유도했거나 직접 벌인 소행으로 추정된다. 광주시민을 ‘폭도’로 만든 후 강경진압의 빌미를 만들기 위해 전두환 보안사령부가 고도공작을 펼친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용장씨는 일부 우익단체가 주장하는 ‘북한군 침투설’에 대해서는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다”고 일축하면서 “당시 한반도 상공에는 2대의 군사첩보 위성이 떠 있었고 북한과 광주를 집중 정찰했다. 북한군 600명이 미군의 첨단 감시망을 피해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북한군 침투설은 터무니없는 사실이라 보고거리조차 되지 않았다”면서 “특히 북한군 600명이 광주로 오기 위해서는 적어도 30척의 잠수정이 필요한데 당시 북한은 그 정도의 잠수정을 보유하지도 못했다”고 설명했다.


김용장씨와 허 전 부장은 5·18 당시 자행된 시신유기와 성폭행 의혹 등에 대해서도 자세히 증언했다.


김씨는 “5공 청문회 당시 정호용 전 특전사령관이 ‘시체 가매장은 있었지만 암매장은 없었다’고 대답했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군은 가매장한 시신을 재발굴해 일부는 광주통합병원에서 소각했고, 최근 언론 보도대로 일부는 김해공항 등으로 수송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군 내부에 있었던 허 전 부장은 “시민군이 평정된 뒤 시민 사살자 중 간첩이 있을 수 있으니 엄중히 가려내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특전단은 가매장 위치를 좌표로 표시해 보고했다. 가매장된 시신을 다시 발굴한 것은 지문을 채취하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지문 채취를 마친 시체들은 광주통합병원으로 옮겨 소각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 유기했다”면서 “하루에 20구씩 열흘간 최대 200구가 소각됐을 수 있고, 당시 병원장이 국가 훈장을 받은 것은 이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용장씨는 “군에 의해 자행된 성폭행 등에 대한 첩보도 상부에 보고했다”고 증언하면서 “첩보보고는 길게 쓰지 않는다. 성적 학대(Sexual Harassment)나 성적 폭력(Sexual Violence)이 이뤄졌다고 보고했다”고 설명했다.


한편, 이날 특별기자회견은 더불어민주당 박광온 의원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김용장씨와 허장완 전 보안사 특명부장 이외에도 고(故) 홍남순 변호사의 아들 홍기섭씨, 이철우 5·18기념재단 이사장 등이 참석했다.


박광온 의원은 “오늘 39년 만에 공개된 증언은 전두환을 비롯한 정권찬탈세력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라며 “진상을 밝혀내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고, 5·18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의 강력한 동력을 만들어내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용장씨는 이날 저녁 JTBC <뉴스룸>에도 출연해 “미 국무성 보고서들은 한국 정부에서 미국 정부에 요청하면 원문 그대로 보내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밝히기도.


김씨의 증언을 들은 손석희 앵커가 “과장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된다”고 평하자 김용장씨는 “그것은 손석희 앵커께서 몰라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데 미 육군정보요원들은 여기서 밝힐 수 없는 그런 시스템이 있다. 절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시스템이 있다”고 강조했다.

 

◆김용장·허장환 광주 기자회견


김용장씨와 허장환 전 보안사 특명부장은 다음날인 5월14일 광주로 내려가 다시금 5·18을 둘러싼 진실에 대해 증언했다.


두 사람은 광주 서구 5·18기념재단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1980년 5월 당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의 ‘사살명령’ 지시와 정권 찬탈 계획의 일환으로 광주를 무력 진압한 정황 등에 대해 자세히 증언했다.


다음은 김용장·허장환 두 사람의 일문일답.


-사살 명령 전 전두환의 광주 방문 사실이 다른 정보요원의 보고 등으로 교차검증이 가능하나.
▲김용장: 정보기관은 정보원(Informer)을 기록, 체계적으로 관리한다. 첩보를 제공한 정보원은 모두 광주지역에 사는 다른 정보기관 근무자로, 믿을 만한 것이었다. 첩보는 본부·미군 정보보안사령부의 검증을 거쳐 국방정보국(DIA)에서 완성된 첩보를 정보로 가공해 하급기관에 다시 배포한다. 따라서 믿을 만하다.
▲허장환: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5월21일 광주 방문 이튿날, 상관으로부터 ‘곧 사살명령이 떨어질 것’이라며 사령관 지시사항과 지휘관 회의 논의 내용들을 전달했다.


-김용장씨가 상부에 보고한 40건 중 미 백악관에 전달된 5건의 내용은 무엇이었나.
▲김용장: 백악관과 대통령에 어떤 보고서가 전달됐는지 모른다. 아마 전두환의 광주 방문, 시민군 사체 소각, 헬기 사격 등이 전달됐을 것으로 짐작한다.


-‘발포명령’이 아닌 ‘사살명령’으로 표현한 근거는.
▲허장환: 군인 복무규율 상 ‘발포’는 명령이 없어도 초병이 신체 또는 군 시설물에 대한 위해가 있다고 판단해 (사격을 할 경우) 쓰는 단어다. 5·18 당시 상황에서는 ‘발포’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광주역과 전남도청 앞에서의 군 사격 행위는 ‘사살’이었다.


-편의대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

▲허장환: 편의대는 유언비어 유포, 장갑차 등 무기 탈취를 벌였다. 당시 아세아자동차는 방산업체로서 ‘보안목표’로 지정, 특별 방호시설을 갖췄다. 아무런 제지 없이 시민들이 장갑차를 탈취할 수 없다. 또 시제품이었던 APC(병력수송) 장갑차를 몰 수 있는 시민은 아무도 없다. 북한군도 못한다. 장갑차를 몰 수 있는 것은 헬기·전차 등 각종 장비의 운용능력을 훈련한 특전부대, 편의대뿐이다.
▲김용장: 편의대 30~40여 명이 5월20일 전후로 K57(광주) 비행장에 들어왔다. 그중 두 남성을 우연히 봤는데 한 명은 머리카락이 짧고 햇볕에 얼굴이 많이 탄 20대 후반 안팎이었고, 다른 한 명은 행색이 초라한 넝마주이였다. 당시 미 정보당국에 올린 보고서에는 편의대 존재에 대해 3~4줄가량만 썼다.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군의 이동·작전은 미국의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김용장: 미국은 국익이 최우선인 나라다. 미국은 당시 광주항쟁에 대해 전두환으로부터 사전 보고를 받았고 사후에는 묵인했다. (반미 호메이니 정권 수립) 이란의 교훈 때문에 카터 행정부가 결과적으로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것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정통성 없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어 편하다.


 -희생자 사신 소각에 대해 구체적 증거 등을 설명해 달라.
▲허장환: 5·18이 끝난 뒤 ‘광주에 간첩이 침투했는지 엄중 색출하라’는 지시가 있어 당시 경찰과 함께 매장됐던 희생자의 지문을 모두 채취한 뒤 주민등록과 대조했다. 이후 다시 재매장할 곳이 없어 국군통합병원에서 처리했다. 한계가 있으니 화장을 한 유골은 비닐에 포장해 광주 인근의 모처에 매장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당시 동료들이 한창 사체 처리의 고충을 이야기 했었다. 5·18 이후 훈·포장을 수여하는데 통합병원장이 서열이 4번째로 높은 훈장을 받았다. 또 통합병원 보일러실이 보안 목표로 지정돼 있다. 지정 이유가 없다. 굴뚝 높이나 규격 등을 볼 때 건물 난방 용량을 초과하고 주변에 3중으로 철조망과 각종 방호시설이 있다. 굴뚝을 변조해 시신을 소각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한다.


-보안사가 1996년 일괄 자료를 폐기했는데, 비행기록 일정 등은 남아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얼마나 자료가 남아 있다고 보는가.
▲김용장: 비행장에서 헬기가 이륙할 때 조종사의 비행계획서가 지휘소를 거쳐 관제탑으로 보내진다. 이후 목적지까지의 거리, 도착 예정시간, 착륙 주기장 유도과정 등을 관제탑과 조종사가 수시로 교신한다. 전두환의 방문 사실은 비행계획서, 교신 내용으로 확인할 수 있다. 40여 년이 지나 기록이 파기됐을 수도 있고, 고의로 파기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육군본부·국방부에는 자료가 남아 있을 것이다.


◆국군통합병원 현장 증언


김용장씨와 허장환 전 부장은 5월15일 광주 서구 505보안부대와 국군통합병원을 직접 찾아 1980년 5월 계엄군의 만행에 대해 증언했다.

 

▲ 5·18 민주화 운동 당시 505 보안부대 수사관(전남북 비상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국보위 특수부 부장)으로 활동했던 허장환씨가 5월15일 오후 광주 서구 국군통합병원 옛터에서 5·18 희생자 시신이 소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원 보일러실의 '보안목표'를 가리키고 있다. <뉴시스>    


특히 허장환 전 부장은 1980년 5월 자신이 근무했던 보안부대 위병소 왼편에 위치한 건물을 가리키며 “이곳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 특명반 사무실”이라면서 “전두환씨와 그의 보안사가 5·18 항쟁 기간 광주 진압 시나리오를 만들고 공수특전여단에 직접 지령을 내린 방“이라고 증언했다.


아울러 그는 “이곳에서 많은 민주인사가 고초를 겪었다”고 전한 뒤 1980년 5월16일부터 신군부의 시나리오가 본격 기획·실행됐다고 밝혔다. 


허 전 부장은 1980년 5월16일 서남의 대공과장이 대공처장으로부터 광주진압 지시를 받고 부대에 복귀해 예비검속자 명단을 공개하며 수사 회의를 진행한 상황, 대공·수사계에서 열흘간 진압 계획을 기획한 상황 등을 증언했다. 특히 부대 본관동 2층 부대장실 옆 부사관실을 ‘보안사령부가 광주의 참혹한 역사를 만들어낸 방’이라고 규정했다. 


허 전 부장은 광주시내 전도, 공수부대 배치도와 탁자가 놓였던 위치를 설명한 뒤 “이곳에서 수사국(초대 국장 최예섭·이후 최경조)이 보안사령부 지침에 따라 (3·7·11)공수특전여단 지휘관들에게 지령을 단독으로 내렸다”면서 “(505보안)부대원들이 모르게 정호용 특전사령관·최세창 3공수여단장 등에게 직접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이어 그는 “홍성률 대령이 보안사령부가 구상·실행했던 광주 진압 과정을 감독하며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보고했고, 정호용 사령관도 광주를 내왕해 지휘·보고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전두환씨가 광주를 찾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20일 “사살명령(전투교육사령부 회의에서 결정)이 떨어진다는 지침이 내려왔고, 같은 날 505보안부대 통신실에서 ‘자위권 구사 발포 사살 합의’라는 보고 전문을 직접 봤다”고 증언했다.


허 전 부장은 △전두환씨가 최세창 3공수여단장을 신임했던 사례 △시민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엮으라는 부당한 지시 △보안사(505 보안부대 내 615통신보안부대 등)가 신군부 유력 인사들을 도청·감청해 보고한 사례 등을 강조하며 “보안사 기록물을 찾아야 한다”고 힘 주어 말했다.


그는 5·18 당시 시민과 민주인사를 무차별 고문했던 505 보안부대 지하실로 들어가는 경로(수사관 출입 통로와 다름)와 연행 방법(두건 씌움)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뒤 “자기 발로 걸어서 나온 사람은 없다”고도 증언했다.


허장환 전 부장과 김용장씨는 이어 국군통합병원 보일러실을 찾아 5·18 당시 사라진 희생자들이 이곳에서 소각됐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문제의 보일러실(출입문 위쪽엔 자재창고로 명시) 기계 오른쪽 공간엔 화덕과 전기장치가 설치돼 있었으며, 화로는 굴뚝·기름 보급 탱크와 연결됐고, 보수공사를 한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벽으로 기계와 시신 소각 추정 장소가 나뉘어 있었다. 특히 보일러실 입구 쪽에만 ‘보안 목표’ 지정 안내문이 붙어 있었는데, 월 단위 지침(추정)에서 ‘비밀 문건 정리하기’라고 적혀 있었다. 


두 사람은 △병원 건물 중 보일러실만 유일하게 보안 목표로 지정된 점(5·18 항쟁 평정 이후 보안사 지정, 목표 설정 근거가 없음) △인가를 받은 군인만 출입할 수 있고 굴뚝 주변에 삼중 철조망·사격구가 설치된 점 △방호시설로 보기 어려운 굴뚝을 군인이 방호한 점 △소각시설과 연결된 굴뚝이 병원 전 지역 난방 용량을 초과하는 점 등을 이유로 들었다.

  
△보일러실 옆 벙커씨유 탱크와 연결된 화덕·벽돌 보수공사 흔적 △보일러실 주변을 벽으로 막아둔 점 △시신 거치대로 추정되는 시설이 보존돼 있는 점 △병원 관계자들이 알 수 없게 은폐한 점 △보안부대 파견 사무실 2곳이 병원에 위치한 점 △굴뚝으로 냄새를 감췄지만, 주변 민가에서 그을음으로 인한 불편을 겪었다는 증언 등도 굴뚝·보일러실을 변조해 시신 소각 장소로 활용한 것으로 추정했다.


두 사람은 “전두환씨가 정권 찬탈용으로 시국 수습방안을 기획·설계해 광주시민을 무력 진압하고 사살 명령을 내린 정황, 시신 소각 경위 등을 낱낱이 밝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홍성택씨 “나는 편의대였다”


김용장씨와 허장환 전 부장의 증언을 계기로 군인들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시민들 사이에 침투해 선동하고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일을 했던 ‘편의대’에 관한 증언도 나왔다.


자신을 박정희 정권 말기 부마항쟁 당시 편의대로 활동한 사람이라고 밝힌 홍성택씨가 5·18 광주항쟁 외에 1979년 부마항쟁에서도 편의대가 있었다는 양심고백을 하고 나선 것.


김용장씨의 증언을 전날 방송에서 접한 홍씨는 5월15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나는 부마사태의 편의대였다”면서 “경남대학에서 한 달여 머무는 동안 편의대로 학생들에게 접근하여 대화하다가 11월3일 데모 이야기가 나오면 따라다니던 형사들에게 말해서 체포해 가고는 했다”고 증언했다.


홍씨는 편의대원이 된 과정과 관련해 “1978년 8월 입대해서 특전사라는 곳에 차출돼서 공수 훈련을 받고 부마항쟁, 광주 민주화운동 때는 서울에서 계엄군으로 일을 했고 1980년 5월에 제대를 했다”고 소개한 뒤 “부대에서 ‘오늘 사복 입고 나가라, 가서 학생들 데모를 어떻게 하는지 들어봐라’고 했다. 형사들이 항상 내 뒤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아울러 그는 “다방에 있었던 몇몇 학생들에게 가서 ‘나는 서울에서 온 누구인데 11월3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내가 (형사들에게) 신호를 했고 학생들이 잡혀갔던 걸로 기억된다”면서 “오른손을 들면 형사들이 와서 그들을 데리고 갔다. 이 같은 일을 세 번 했다. 버스가 와서 학생들을 실을 때 같이 탔는데 그 안에 학생들이 굉장히 많이 있었다. 그 일을 나 혼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홍씨는 또한 “나도 그 학생과 같은 줄 알고 군인이 나를 때려서 공수부대 군인이라고 했던 기억이 있다”면서 “이후 편의대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항상 남아 있다. 이런 프락치 역할을 하는 게 편의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끝으로 그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몽둥이로 막 후려쳤던 것이 지금도 굉장히 마음이 아프다. 안 때리면 내가 맞으니까. 당시 그분들이 아주 미웠고 저들 때문에 내가 고생하니까 빨리 저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고 고백하면서 “그 학생들에게 너무 미안하다. 평생 미안해하면서 살았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애국하는 일인 줄 알았다”고 덧붙였다.


홍씨는 “1979년 10월26일로 그 일이 끝났지만 지금도 마산 사람들께 죄송하다”면서 자신의 편의대 활동을 뒷받침할 만한 사진과 특전사령관 명의의 ‘공수 휘장증’ 등을 <김현정의 뉴스쇼> 제작진에게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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