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살인사건은 어떻게 수사하고 판결했을까?

조선시대 살인사건 보고서...檢案, 그때 그 사건 실화

정리/송경 기자 | 기사입력 2019/04/12 [10:47]

조선시대 살인사건은 어떻게 수사하고 판결했을까?

조선시대 살인사건 보고서...檢案, 그때 그 사건 실화

정리/송경 기자 | 입력 : 2019/04/12 [10:47]

100년 전 조선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사람을 죽였을까? 그리고 그에 관한 수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이를 생생하게 기록한 것이 바로 조선시대의 살인사건 보고서, ‘검안(檢案)’이다. 조선시대에는 살인사건이 일어나면 조사관이 현장에 출동하여 시신을 검시하고 관련자들을 취조한 뒤 상부에 보고했다. 역사학계에서는 드물게 조선 시대의 의학사 연구에 발을 들였고, 그와 관련된 조선의 과학과 사회를 연구하던 중 법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김호 교수의 책 <100년 전 살인사건>(휴머니스트)은 바로 이 살인사건 보고서 ‘검안’을 통해 100여 년 전 조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그 수사과정을 살피는 것은 물론, 살인이라는 사회적 일탈의 틈새에 묻어 있는 민중의 삶을 들여다본다. 검안에는 질투에 눈이 멀어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로 위장한 남편, 사람을 죽이고도 여우를 때려잡았다는 양반, 아이를 납치해 간을 빼먹은 나환자, 사위를 살해한 딸을 제 손으로 목 졸라 죽인 친정엄마 등 불륜과 폭력, 살인 같은 사회적 일탈 행위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인 행위들로 가득한 기록의 틈새에는 조선시대 보통 사람들의 일상 속 기쁨과 슬픔, 놀라움과 두려움이 묻어 있다. 죽은 자와 죽인 자의 부모와 형제, 이웃들이 그들의 삶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검안에 담긴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조선사회의 생생한 ‘일상’을 소개한다.

 


 

질투 눈멀어 아내 살해한 남편…사람 죽이고 여우 잡았다는 양반
불륜·폭력·살인·모함…조선시대에도 지금처럼 사회적 일탈행위 가득

 

100여 년 전 살인사건 조사에서도 법의학 증거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조선 후기 자살로 위장한 살인사건 늘면서 법의학 지식도 함께 발전

 

▲ 100년 전 조선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무슨 이유로 사람을 죽였을까? 그리고 그에 관한 수사는 어떻게 진행됐을까? 사진은 드라마 '별순검' 한 장면.    

 

그동안 한국의 역사학계는 다양한 분야로 연구의 범위를 확장해 왔다. 연구의 심도 또한 그와 함께 깊어졌다. 기왕에 사료로 활용되지 않았던 다양한 자료들이 새롭게 발굴되거나 재평가되어 한국사의 새로운 상이 만들어졌다. 지난 수십 년간 이루어진 사회사 및 사상사 연구는 전근대 향촌사회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했으며, 이를 토대로 지금은 사회의  세한 생활 부분으로 담구의 깊이가 더해지고 있다. 그동안 역사의 주인공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수많은 소민의 이야기가 펼쳐질 무대가 마련된 셈이다. 그러니 이제 그들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할 차례다. 소민들의 삶의 흔적은 어디에서 길어올려야 할 것인가?


그런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과 가톨릭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를 거쳐 현재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인 김호 교수가 매우 특별한 자료들을 제시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수백 건의 살인사건 보고서·검안으로 한 권의 책을 엮은 것.


“혹자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죽음을 둘러싼 기록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역사는 고조선 이래 삼국,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는 수많은 왕조의 흥망성쇠이며, 권력을 향한 임금과 신하의 암투나 외적과 싸워 나라를 지킨 애국자들의 공로 그리고 사상가들의 철학을 기억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인물도 세종이나 정조 혹은 이순신이나 허준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무언가를 이루어낸 위인을 주목하고 기억할 뿐. 아무도 부인이나 남편을 살해하고 한 장의 진술 공초만을 남긴 채 사라져버린 김씨 부인이나 옆집 이씨를 궁금해하거나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김호 교수는 “역사 그리고 역사 속 인물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역사 연구의 바탕이 라고 할 수 있는 사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면서 “역사학자를 포함하여 많은 사람이 역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로서 과거의 흔적을 그대로 담고 있는 유물·유적이나 <삼국사기>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같은 주요한 국가 기록 혹은 정치가들이나 경세가들의 철학과 사상이 담긴 문집을 떠올릴 뿐 검안에 남겨진 김씨나 이씨의 진술을 떠올리지는 못한다”고 지적한다.


“물론 역사는 공동체가 기억할 만한 것들을 중심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우리가 기억하려던 역사들, 기록하려던 과거들 가운데 필부필부를 위한 공간이 없었던 이유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100년 전의 소민들도 지금 우리들 각자가 그런 것처럼,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필부필부의 증언을 동해 역사를 재구성하고 싶었다. 한마디로 주목받지 못했던 무명씨의 이야기를 기억하려는 것이다.”


김 교수는 “100년 전의 조금은 특별하면서도 평범한 일상으로 들어가고 싶었다”면서 “소민들의 진술과 증언은 우리에게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의 ‘망딸리떼’와 문화의 심층을 보여준다”고 설명한다.

 

주목받지 못했던 무명씨 사연들


“부녀자의 부덕(不德)이 마을 회의에서 논의되고 소문이 법보다 강한 규제장치로 작동하는 현장과, 간통과 살해, 인륜에 깊이 침식된 힘없는 이들의 상상을 넘어서는 폭력은 기왕의 어떤 사료에서도 확인할 수 없었던 생생한 일상이다. 검안은 특별하고도 예외적인 자료임이 분명하다. 검안에는 폭력과 살인, 절도, 복수 같은 사회적 일탈행위들만 그득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검안을 동해 100여 년 전의 세상을 모두 읽어낼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다양한 사건과 빔죄에 주목하여 그 관련자들의 진술에 기댄다고 해서 지금 우리 사회를 온전히 그려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 검안에 전하는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양상을 살펴보면, 여성(혼자 사는 과부, 외지에서 왔거나 가난하여 남의 집에서 기식하던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사진은 드라마 '별순검' 한 장면.    


하지만 예외적이고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검안의 기록과 증언의 틈새에는 옛사람들의 일상이 묻어 있다. 부부싸움 끝에 살해된 남편이나 아내에 관한 장모와 시어머니, 이장이나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그들의 삶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검안은 사망한 사람의 시신을 검시하고 작성한 시체 검사 소견서, 즉 법의학적 판결문인 ‘시장(屍帳)’과 사건 관련자 심문 기록인 ‘공초(供招)’를 포함한 일체의 살인사건 조사 보고서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검안은 2000여 책에 달하고, 사건으로 치면 대략 500여 건이다. 대부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즉 100여 년 전에 작성된 기록들이다.


김호 교수는 역사학계에서는 드물게 조선 시대의 의학사를 연구에 발을 들였고, 그와 관련된 조선의 과학과 사회를 연구하던 중 법의학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20여 년 전 규장각 서고에 보관된 ‘검안’을 읽으면서 조선사회의 범죄와 그에 따른 처벌 등에 관심을 갖고 법치와 덕치, 정치와 윤리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민해온 결과를 <100년 전 살인사건>에 담았다고.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니었다고 해서 역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기록되지 않았다고 해서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아니다. 100년 전의 소민들도 지금 우리들 각자가 그런 것처럼,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들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에 필자는 앞으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필부필부의 증언을 통해 역사를 재구성할 생각이다. 한마디로 주목받지 못했던 무명씨의 이야기를 기억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조선 법의학


조선시대 살인사건은 어떻게 수사하고 판결했을까? 김호 교수는 지금껏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살인사건의 수사 기록을 자세히 파헤친다.


100여 년 전에도 살인사건 조사과정에서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과 용의자의 자백도 중요했지만 법의학 증거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시체를 검시하여 사인 분석에 참고했는데, 특히 조선 후기에는 자살로 위장한 살인사건이 많이 발생하면서 법의학 지식도 함께 발전했다. 조선 최고의 법의학 교과서인 <증수무원록언해>에 실린 여러 가지 수사기법이 수사의 나침반 역할을 했다.


“시체는 사건 발생 지역에 그대로 두고 검시했고, 부패가 빠른 여름철에는 신속한 조사를 위해 조사를 맡은 지방관의 출발과 도착 일정까지 상세히 보고했다. 살인사건은 통상 두 사례의 조사를 실시했는데 초검관과 복검관은 각각 조사를 지휘하고 상부에 보고했으며, 1?2차 조사의 내용이 같으면 사건을 종결했지만 의심이 가는 경우라면 3차 혹은 그 이상의 조사를 실시했다.”


한편, 검안을 구성하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검시 보고서 ‘시장’은 시체 상태에 대해 매우 상세히 묘사, 기록하고 있어서 당대 검시 방법이나 법의학적 지식은 물론 의복 등 민중들의 생활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런 연구의 결과는 드라마 〈별순검〉(2007~2010)에도 반영돼 대중에게 선보였다.


“조선시대의 검시는 지금처럼 시체를 해부하는 게 아니라 시체의 외상과 색(色)을 주로 살폈다. 사인에 따라 외상의 모양이나 색이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미 시체가 부패하여 검시가 불가능하거나 사대부 부녀자들의 경우처럼 시친(屍親, 죽은 사람의 친인척)이 죽은 사람을 두 번 욕보인다고 여겨 면검을 요청하는 경우에는, 검시를 생략하거나 시친의 면검 요청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살인사건이 관청에 접수되면 조사관은 아전들을 대동하고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사건현장을 찾아 시체가 놓인 장소를 세밀하게 묘사한 후, 시체의 옷가지를 하나씩 벗기면서 시체의 상태를 기록했다.”

 

조선시대 평범한 사람들 이야기


검안에는 ‘시장’과 함께 오늘날의 녹취기록에 버금가는 취조기록인 ‘공초’가 실려 있다고 한다. 살인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반드시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심문했는데, 아전들이 모든 진술을 구어체 그대로 기록해 사료적 가치가 높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당대의 많은 소민의 목소리가 아전의 손을 빌려 생생히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사건 관련자들을 소환하여 심문하고 이를 정리하여 보고했다. 이 과정에서 아전들이 모든 심문과정을 기록했는데, 특히 관련자들의 진술을 구어체로 그대로 받아 적었다. 사료적 가치를 고려할 때, 오늘날의 녹취 기록에 버금가는 이 취조기록, 즉 공초야말로 검안의 최대 장점이다. 자신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지 못했던 당대의 많은 소민, 나아가 부녀자들의 목소리가 아전의 손을 빌려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자신의 정절을 의심한 남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잡혀온 여인은 자신이 범인으로 밝혀지면 능지처사라도 달게 받겠다고 다짐한다.


“제가 남편 박용근과 바록 정식으로 혼인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산 지 어언 7~8년이나 되었고, 비록 일찍 죽었지만(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습니다. 사는 곳이 조금 멀어 한 달에 한두 번 왕래할 뿐이었지만 서로 만나기를 간절히 원해 다투는 일이 전혀 없었고 매양 웃는 얼굴로 맞이했습니다. 친가의 종손 봉주 형제가 제 집에 자주 드나들기는 했지만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마음에 전혀 거리낄 바는 없었으니, 남편 용근도 사람의 마음을 지닌 자로서 어찌 의심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겠습니까? 이제 저를 범인이라 의심하여 (저뿐만 아니라) 온 집안 형제들까지 옥에 가두고 가혹한 형벌을 가하여 억지로 진술하게 만드니 어리고 지각 없는 봉주가 막형을 견디지 못하고 엉뚱한 말을 지어낸 것입니다. 원컨대 명백히 조사하시어, 만일 인륜을 더럽히거나 살해를 모의한 자취가 드러난다면 제 친가의 형제와 종손이 모두 능지처참의 헝볕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받을 것입니다.”


남자의 꼬임에 넘어가 본부인을 무고했던 그의 첩은 남자가 죽자 모든 것이 돈밖에 모르는 그의 사주었다고 진술했다.


“저는 원래 남편이 있었는데, 타지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이미 2년째입니다, 가난하여 살아갈 방법이 없어서 노상에 살다가 이내영을 만나 간음하게 되었습니다. 내영이 저를 꾀며 ‘내 본처가 전문세와 간통하는 사이라고 말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내영의 부탁을 달게 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 살인의 변고가 발생했으니 후회막급입니다. 몽둥이 아래 죽는다고 해도 다시 드릴 말씀이 없으니 잘 살펴 처리해주십시오.”


이처럼 검안은 시체의 상태를 기록한 시장과 사건 관련자들의 진술을 기록한 공초로 구성되어 있다. 공초 부분은 당시 민중  목소리를 통해 과거를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현존하는 조선시대 사료 대부분이 주로 지배층의 목소리와 남성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데 비해 검안은 소민들의 이야기. 나아가 이중 삼중으로 억압받던 하층 여성들의 목소리를 들려주는 회귀한 자료다.


검안에 전하는 조선시대 살인사건의 양상을 살펴보면, 강도나 절도가 살인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다. 특히 여성(혼자 사는 과부, 외지에서 왔거나 가난하여 남의 집에서 기식하던 여성)이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물론 여성에 대한 폭력은 가장 내밀한 사회집단인 가정 내에서도 발생했다. 살인으로 비화된 폭력은 개인 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향촌의 양반 가문, 계나 두레 같은 평민들의 상호 부조 조직 등 다양한 이익 집단들 간에도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1904년 5월15일, 경상북도 문경의 군수 김영연은 관할지역인 신북면 화지리에 사는 양반 안도흠의 소장을 받았다. 하루 전인 5월14일 이웃에 사는 상놈 정이문이 저녁에 몰래 집에 들어와 며느리 황씨를 겁간하려다가 아들 안재찬에게 발각되자 도주했다는 내용이었다. 안도흠은 반상의 구별이 엄격하고 남녀의 유별이 분명한데 어찌 상놈이 반가의 여성을 겁탈할 수 있냐며 도주한 정이문 대신 그의 조부라도 체포하면 손자가 관아에 자수할 것이니 이를 기다렸다가 처벌해달라고 군수에게 요청했다. 그런데 취조과정에서 정태극은 자신의 손자가 이미 안도흠의 며느리 황씨와 5년 이상 불륜관계를 맺어왔다고 진술했다. 사건이 복잡해지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양반이 되려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자 박지원은 진정한 양반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했고, 정약용은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런데 ‘모두가 양반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아무나 양반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이들의 주장이었다. 양반이려면 ‘양반다움’을 갖추어야 하는데, 한마디로 그 지위에 걸맞은 품격과 책임감을 갖춰야 한다는 의미였다.


“충청남도 면천군 송암면 엄치리(현재 죽동리)에 기거하는 양반 조태원(19세)은 동네에서 소문난 난봉꾼이었다. 심지어 그에게 술을 팔아서는 안 된다는 말까지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조태원은 행동을 조심하기는커녕 오히려 가문의 권세를 믿고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지르고야 만다.”


“‘의옥’이란 ‘의심스러운 살인사건’을 말한다. 조사과정에서 관련자들의 진술이 번복되거나 용의자를 범인으로 특정할 만한 근거가 사라지는 등 의심스러운 점이 나타나면 ‘살인자는 목숨으로 갚는다’는 살인자상명의 원칙을 적용하기 어려웠다. … 살인사건이라 해도 의옥이 되면 용의자를 정범으로 특정하여 사형에 처하는 대신 속전을 받고 방면했다. 이는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심리한다는 흠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도리어 사건을 의옥으로 만들어 처벌을 피하려는 악의에 이용되곤 했다.”


“1899년 겨울, 전라북도 남원군 남생면에서 하루 사이에 두 사람이 싸늘한 주검으로 변했다. 김판술의 여섯 살배기 아들 김왜춘과 이웃에 사는 마흔세 살 이여광이었다. 발견 당시 두 사람은 모두 배가 갈린 채 간이 배 밖으로 나와 있었다. 모두가 경악할 만한 참혹한 죽음이었건만, 이 일로 관의 문턱을 넘은 사람은 없었다.”

 

사람답고자 하는 욕망 부추기다


검안 속 소민들의 진술과 증언은 무엇을 드러내는가?


김호 교수는 그들의 목소리에서 100년 전 조선 사람들의 ‘망딸리떼’와 문화의 심층을 읽어낸다. 그 핵심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군자를 욕망하라’는 정조의 ‘소민군자론’이 끼친 영향과 성리학의 세속화에 주목해야 한다.


성리학의 군자론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도덕적인 삶을 추구할 자질을 갖추고 있으며,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소민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서 도덕적인 삶이란 곧 인간다운 삶이었다. 이들은 인간답고자 하는 명예심으로 충만했다.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소민들의 의지는 정조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난 19세기 말에도 사라지지 않았고, 도리어 더욱 확대되었다.


성리학의 가치관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거의 모든 인민의 마음속에 ‘감정의 체제’로 자리 잡았다. 수많은 필부필부는 ‘인간의 조건’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러나 성리학의 군자와는 거리가 멀었던 하층민들, 특히 여성들은 인간이 되기 위해 더욱 강한 열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김조이의 친정어머니는 남편을 섬기는 여성이어야 비로소 사람답다고 하는 지배이념의 신봉자였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았던, 그래서 결혼생활을 끝내고 싶었던 딸은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고, 그런 딸을 친정어머니는 용서하지 않았다.”


“강진에 살았던 김은애는 1789년 자신이 음탕하다는 소문을 퍼뜨린 노파를 여러 차례 칼로 찔러 살해한 후 관아에 자수했다. 그리고 이를 본 모든 사람이 그녀의 정렬(貞烈)을 장하게 여겼다. 당시 강진현감 박재순 역시 정상을 참작하여 그녀를 풀어주려고 했다. 다만 인명을 살상한 죄를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 하여 잠시 옥에 가두었다가 이듬해 6월에 은애를 석방했다. … 과연 사람을 죽이고도 용서받을 수 있을까? ‘있다’는 것이 조선시대의 법 감정이다.”


“19세기 말 동학농민군은 ‘의로운 폭력’을 주장했다. 그리고 이학조는 바로 그 ‘의로운 폭력’을 행사하는 농민군의 이름으로 동료를 죽음으로 내몬 조용하에게 복수했다. 과연 의로운 폭력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 조용하의 아들 조윤태는 이학조를 난타하여 살해한 뒤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정의의 폭력을 휘두른 것이라 항변했다. 정부는 도리와 인정을 참작하여 사형 대신 ‘장 60’에 처하는 것으로 그의 항변을 받아들였다.”

 

닉네임 패스워드 도배방지 숫자 입력
내용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는 글, 욕설을 사용하는 등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글은 관리자에 의해 예고 없이 임의 삭제될 수 있으므로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광고
광고
포토뉴스
5월 넷째주 주간현대 1096호 헤드라인 뉴스
1/3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