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 만들었던 ‘6월 민주항쟁’, 30주년 맞아

임대현 기자 | 기사입력 2017/06/02 [10:24]

대통령 직선제 만들었던 ‘6월 민주항쟁’, 30주년 맞아

임대현 기자 | 입력 : 2017/06/02 [10:24]

지난 1987년 6월은 안타까운 죽음과 함께 역사적인 민주항쟁이 일어났다. 6월 민주항쟁은 30주년을 맞이했다.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는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었다그가 최루탄에 맞은 모습을 담은 사진은 아직도 중요한 기록으로 남았다. 6월 민주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이끌어낸 중요한 계기가 됐다역사적인 그날의 기록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편집자 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대학생들 시위 번져

연세대에서 시위를 벌이던 이한열 열사가 최루탄에 맞아

 

진압 불가능한 시위로 번진 6월 항쟁직선제 내놓은 전두환

30주년 맞이해 다양한 행사 계획영화로 제작되는 6월 항쟁

 

 

▲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주간현대=임대현 기자]
 
6월 민주항쟁이 30주년을 맞이했다. 매년 610일은 민주항쟁기념일이다. 19876월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민주화운동 30주년을 맞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올해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6월 민주항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역시 이한열 열사다. 그는 경찰이 쏜 최루탄에 후두부를 맞고 쓰러져 병원에서 숨졌다. 6월 민주항쟁의 불씨를 키워 나아가 대통령 직선제를 이루는데 큰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최근 이한열기념사업회는 1987년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고 쓰러져 숨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담긴 사진 2점이 공개됐다. 당시 내셔널지오그래픽 사진기자로 한국을 찾은 네이션 벤은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이한열기념사업회에 이 사진을 제공했다. 사진에는 최루탄을 맞기 전 이한열 열사의 모습이 담겨있다.

 

거리로 나간 학생들

이한열 열사가 시위에 나오기 전까지 많은 사건이 있었다. 아마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것은 일명 탁억사건이라 불리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당시 군부정권은 운동권 선배 박종운의 행방을 캐묻기 위해 박종철 열사를 연행했다. 경찰들은 그에게 물고문을 가한 끝에 박종철이 사망하자 사실을 은폐할 목적으로 갖은 공작을 펼쳤다.

 

당시 경찰은 !’ 하고 치니까 하고 죽더라는 변명을 내놓았다. 경찰의 발표는 심문 과정에서 실토하라면서 책상을 내려쳤는데 심장마비로 억 하고 죽었다는 것이었고, 이를 당시 언론에서 기사로 다루며 탁억사건이 됐다.

 

그런데 박종철 열사가 사망한 후 부검을 실시해본 결과 시체는 수많은 피멍과 물고문, 전기고문의 흔적들이 역력했고 당시 부검의가 고문에 의한 사망임을 정식으로 확인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민들은 분노의 표시로 경적을 울리는 경적 시위를 하기도 했다. 결국 고문 경찰들을 처벌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전두환 전 대통령은 4.13 호헌조치를 발표하여 개헌 논의는 곧 있을 서울 올림픽 끝나고 하자는 말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논의를 묵살했다. 이에 국민들의 민심은 격앙됐다.

 

이때는 1980년에 대대적으로 체포되었던 신민당 출신의 정치인들이 5년만인 1985년에 다시 대거 사면되고 이들이 다시 신한민주당을 구성해 총선에서 제1야당의 자리를 차지한 이후의 시점이었다. 1985년부터 야당은 대통령 간선제 안에 대해 헌법 개정 1000만 서명 운동을 추진하는 등 개헌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여당에서도 이를 무시할 수 없어 대통령 간선제안에 대한 교섭을 진행하던 시점이었다.

 

하지만 전두환이 호헌조치를 통해 개헌 논의를 묵살하자, 국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김승훈 마티아 신부가 5.18 민주화운동 7주기 추모미사에서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축소·은폐되었고 고문경찰은 모두 5명이었다는 것을 폭로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더욱 상승했다.

 

여론은 폭발했고, 이에 재야단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527일 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결성되어 그간 분열되어 있던 민주 세력이 하나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국본은 610일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날에 맞춰서 박종철 열사의 고문치사 은폐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울을 비롯한 전국 22개 도시에서 열기로 했다.

 

이때 각 대학에서도 시위의 열기가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5월 말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뭉쳐 종로로 나왔다. 이날 시위에는 이전과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크게 늘었다. 6월 초, 국본은 서울 시내에 약 20만 장의 전단을 뿌려 집회 사실을 홍보하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9. 전국 각 대학 학생들은 10일 집회 하루 전, 각 대학 교정에서 사전집회를 연다. 연세대학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1000여 명이 노천극장에 모여 사전 집회를 진행했다. 그런데 사전집회가 끝나고 교문 앞으로 이동하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교외로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했는데, 규정을 무시하고 직사로 사격한 최루탄이 연세대생 이한열 열사의 후두부에 직격한 것이다.

 

이한열 열사는 쓰러졌고, 같은 학교 도서관학과 이종창씨가 겨우 부축해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호송됐다. 그리고 피 흘리며 쓰러진 이한열 열사를 이종창씨 힘을 다해 부축하는 장면을 당시 로이터 통신 기자가 담아냈고, 이 사진이 뉴욕 타임스’ 1면과 중앙일보에 보도되면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당시 중앙일보는 적당한 사진을 찾지 못해 로이터 통신에 사진의뢰를 했다고 알려졌다. 중앙일보는 사진을 받았지만, 위험성이 큰 사진이었을 것이다. 이후에 해당 사진은 ‘AP통신선정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보도를 접한 연세대 학생들은 학교 전체가 뒤집혔다. 연세대 학생들은 예비역 출신부터 운동권에 반감을 가지던 학생들까지 모두가 뭉쳐 세브란스병원 중환자실을 지키러 나섰다. 당시엔 이런 식의 과도한 공권력 사용으로 인해 사망한 자들의 시신을 경찰이 탈취해 강제로 부검한 뒤 사망원인을 조작하여 책임을 회피하는 사례가 많았기 때문이다.

 

시위대 키운 정부

사실 당시 정부는 610일 집회를 봉쇄하기 위해 다양한 준비를 했다. 12시에 선언문 발표가 예정된 서울성공회성당을 수 일전부터 봉쇄했으며, 당일 차량 경적시위에 동참할 것을 우려해 서울 시내버스와 택시의 경적을 제거했다. 또한 수도권 전철은 시내구간을 무정차 통과했으며, 단축수업, 조기 퇴근 등 수많은 조치가 나왔다.

 

경찰이 봉쇄된 곳도 미리 또는 담을 타넘어 진입한 사람들에 의해 12시에 사전 집회를 개최했으나, 경찰의 원천봉쇄로 국본의 간부들이 체포됐고 집회도 확산되진 못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집회는 오히려 이러한 조치 때문에 커졌다고 할 수 있다.

 

6월 민주항쟁의 후일담 중에는 조기퇴근으로 회사를 일찍 끝마친 직장인들이 지하철 무정차로 인해 집을 못간 것이 오히려 시위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는 한 시간을 압당기는 서머타임이 적용돼 날도 밝아 시위대에 합류하기 더 좋은 환경이었다는 말도 있다.

 

시위의 본격적인 시장은 610일 오후 6시에 서울 시내 곳곳에서 집회가 일어난다. 국본의 방침대로 저녁 6시에 차량 경적을 신호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경찰이 시위대들을 보이는 대로 체포하는 가운데 일부 시위대가 명동성당으로 피신하면서 소위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시작됐다.

 

명동성당 농성 당시 성당 옆 계성여고 등에서 도시락과 물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농성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에서는 감사성찬례(성공회 미사)때 피아노를 연주할 전례 봉사자가 필요하다는 명분으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관계자가 경찰의 감시를 피해 교회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611일에는 서울 명동성당에서는 대학생 등 600여 명이 경찰과 대치하며 시위를 계속했고, 남대문시장 등 명동 외곽 지대에서조차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명동성당에 들어간 시위농성자들은 사흘 째 시위농성을 벌였고, 서울 도심에서도 산발적인 시위가 터졌다. 그러자 당국은 명동성당 시위 사건에 단호하게 대처한다는 방침을 세우는 한편 사태 해결을 위해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613일은 시위가 계속되는 가운데, 정부와 여당은 당정회의를 잇달아 열어서 계속되고 있는 시위사태에 대처방안을 논의했다. 한편, 명동성당은 별다른 충돌 없이 결혼식과 미사가 예정대로 열리는 등 평화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팽팽한 긴장은 계속됐다.

 

이때는 평화적인 모습이 계속되었으나 점거학생들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연행, 구속된 사람들이 전원 석방될 때까지 농성을 계속하겠다고 밝혔고, 서울지역 200여 명의 사제 신부들이 이번 사태와 관련해 대책회의를 열고 학생들을 지지하고 보호하겠다는 전날의 성명을 재확인했다.

 

명동성당을 점거하고 있던 농성자들은 615일 해산했다. 그들은 오후 130분 농성을 해산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였고, 오후 2시 성당 입구에서 해산식을 가졌다. 그러나 서울을 비롯한 지방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계속됐고, 특히 서울의 경우 명동을 비롯한 시내 일부 대학에서 명동사태를 지지하는 시위가 산발적으로 계속됐다.

 

이한열 열사의 중상으로 경찰이 무차별로 쏘아대는 최루탄에 반대하는 최루탄 추방대회가 618일 전국 각 도시에서 열렸다. 이때의 시위 참가자 규모는 150만 명으로 추산됐으며 이에 당황한 전두환 정권은 계엄령 선포까지 검토할 정도에 이르렀다.

 

실제로 군의 투입을 거의 결정한 단계였다는데 이날 저녁 청와대 안가에서는 심야 대책회의가 열렸다. 그리고 전두환은 이기백 국방부장관, 각군 참모총장, 고명승 보안사령관에게 20일 새벽 4시를 기해 부산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자는 전제 아래 출동준비를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당시 경찰총수였던 권복경 전 치안본부장은 동아일보와 단독으로 한 인터뷰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다.

 

이때 전두환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군대가 모두 점령지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전차병 출신의 증언에 의하면 이미 출동 준비를 마치고 서울 진입 명령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으며 수방사 소속 병사들 역시 출동준비를 이미 끝마친 상태였다고 한다. 정부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에게 19일 밤 10시 대국민담화를 발표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군부대를 투입하여 무력진압으로 소요사태를 종결할 것이라고 통보하였고 기자들은 이 내용을 본사에 정보보고를 하였다. 또다시 5.18과 같은 대규모 살상이 벌어질 뻔한 큰일이었다.

 

이는 경찰력이 시위 통제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권복경 치안본부장이 어떻게든 경찰력으로 책임지겠다고 말하긴 했지만, 당시 경찰력의 한계는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서울의 급증하는 시위대를 막기 위해 지방의 경찰력을 계속해서 소환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오히려 지방의 경찰력 공백만 불러오는 실정이었다.

 

결국 국민들의 거센 저항에 전두환 정권은 타협을 택했다. 먼저 민정당은 621일 비상 의원총회를 열어 대통령 직선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했고, 다음날인 22일에 전두환은 위기상황 타개를 위해 김영삼 전 대통령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이틀에 걸쳐 협상을 조율한 끝에 24일 전두환과 김영삼의 영수회의가 성사됐지만, 김영삼이 요구한 직선제, 선택적 국민투표, 구속자 석방 등을 전두환이 거부해서 회담이 결렬됐다.

 

625일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드디어 629, 노태우의 직선제 수용 선언으로 야권의 요구를 받아들여졌다. 6월 항쟁의 마지막은 79일 서울에서 열린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으로 끝났는데, 이때 100만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운구 행렬 이후 서울시청 광장에 남은 백만여 명은 연좌집회를 열었고 전두환 퇴진’, ‘청와대 진격을 외치며 위해 항쟁을 계속하자고 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서울시청에 조기를 외치며 조기를 달 것을 요구해 이는 곧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장례위원회도, 국민운동본부 지도부도, 서대협도 100만 인파가 모인 것을 예측하지 못한 까닭에 군중들은 광화문 4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으나 경찰의 다연발 최루탄 난사로 군중들이 흩어져 6월 항쟁은 막을 내렸다.

 

직선제의 시작

6월 민주항쟁의 결과물로 대한민국 역사상 아홉 번째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직선제를 담고 있는 이 헌법은 19871027일 국민투표를 통해 확정되면서 제6공화국으로 개헌했다.

 

6월 민주항쟁은 사실상 수십 년에 걸친 군부독재를 국민의 힘으로 청산시킨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독재를 연장하려고 했던 전두환 정권을 사실상 굴복시켰으며 민주화를 달성한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지금도 1987년 체제라는 말을 쓸 정도로 정치적, 헌법적으로는 분명 현재까지도 한국은 제6공화국에 의해 굴러가고 있다.

 

1987년의 민주화는 경제적인 여건에 관계없이 국민들의 정치적 열망으로 민주화를 요구했다는 의의가 있다. 1987년의 다양한 호황을 등에 업고 한국 경제가 순항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위신과 외교적 요소,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이나 미국의 동의 여부 등의 요소들에 의해 민주화가 이루어졌다.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제도가 뿌리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또한, 각계각층의 민주적인 시민운동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6월 항쟁은 노동자, 학생, 시민, 빈민, 농민 등이 사회 전반에 걸쳐 전 지역적으로 전개한 투쟁이었고 항쟁의 전 과정은 바로 이렇게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각성하고 조직적 힘을 발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노조를 통해 조직화되어 나타난 7월과 8, 9월의 노동자 대투쟁은 향후 노동자의 사회적 위상을 급격하게 드높이는 결과를 가져왔고 사회적으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 됐다.

 

30주년 맞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올해 30주년을 맞이한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다양한 행사를 개최한다. 사업회는 67~8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6월 항쟁, 촛불혁명, 한국 민주주의-30년의 넘나듦과 나아감을 주제로 학술토론회를 연다. 6·10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해 열리는 이번 학술토론회를 통해 6월항쟁의 의미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이끌어 낸 촛불혁명을 분석하고 한국 민주주의 미래상과 과제를 제시한다는 계획이다.

 

사업회는 치열한 투쟁에서 평화적 축제로의 민주항쟁의 진화는 촛불혁명이 단지 6월 항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준다“6월 항쟁 30년을 맞이해 촛불혁명으로 다시 현실로 생환한 6월 항쟁과 새로운 민주주주의 장을 연 촛불혁명, 3년을 넘나드는 민주주의 실천을 살펴볼 것이라고 밝혔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맞아 시민의식종합조사도 실시한다. 또한, 30주년 기념사업 일환으로 6·10민주항쟁 관련 인사의 역사적 증언을 통해 6·10민주항쟁의 의미를 제고하고 민주화운동 연구의 기초자료를 마련하기 위한 구술사업도 추진한다.

 

한편, 영화계에서는 6월 민주항쟁을 다룬 영화 <1987>(가제)이 제작되고 있다. 배우로는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등이 출연한다. 6월 민주항쟁이 영화로 다뤄지는 것은 최초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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