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SK하이닉스의 전성시대다.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는 범용 메모리 한파를 돌려세울 정도로 시장을 달구고 있다. 그중 HBM(고대역폭 메모리), eSSD(기업용 저장장치), DDR5 등 고성능 D램은 내년에도 수요가 확실히 늘어날 것이라는 점에서 SK하이닉스의 실적개선을 이끌 주무기로 꼽힌다.
SK하이닉스는 지난 10월 26일 올해 3분기 회사의 HBM 매출은 3조 원 규모라고 밝혔다. 전년 같은 기간 대비 330% 이상 급증한 것이다. 전체 D램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9%에서 30%로 늘었다. HBM 매출의 비약적인 성장은 범용 제품 매출 부진을 상쇄하며, 메모리 초호황기를 웃도는 역대급 실적을 올리는 데 절대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에서 승기를 잡으며, 대형 메모리 업체 중 가장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3분기 HBM 매출 비약적 성장···대형 메모리 업체 중 가장 두각 나타내고
3분기 eSSD 매출 전년동기 대비 430% 성장···HBM 매출 성장률 웃돌아
고성능 D램 시장도 1c 등 차세대 공정 기술 앞세워 메모리 최강자 노려
▲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은 업계에서 유일하게 QLC 낸드 기술을 적용한 60TB 제품을 대량 공급하고 있다.
|
SK하이닉스의 HBM 기술이 경쟁 업체들과 결정적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다름 아닌 D램 반도체를 쌓는 ‘패키징 기술’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독자 개발한 ‘매스 리플로우 몰디드 언더 필(MR-MUF)’ 기술은 반도체 칩을 쌓아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간 사이에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하고, 이를 굳히는 공정이다.
마치 오븐에 빵을 굽듯 열을 고르게 가하고 모든 칩을 한번에 접착하는 기술이다. 기존 HBM 기술은 칩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필름형 소재를 깔아줘야 했는데, 이 기술은 공정 효율성이 훨씬 뛰어나다.
SK하이닉스는 연이어 4세대 HBM인 HBM3부터는 더 업그레이드된 ‘어드밴스드 MR-MUF’를 통해 차별화된 기술력을 이어가고 있다.
D램 여러 개를 쌓는 방식의 HBM은 단수가 높아질수록 칩의 ‘휨 현상(Warpage)’과 발열 문제에 직면했다. SK하이닉스는 이 신기술을 통해 칩을 쌓을 때 가해지는 압력을 줄였고, 신규 보호재로 효과적인 열 방출에도 성공했다.
SK하이닉스는 이 같은 차별화된 기술로 5세대 HBM인 HBM3E 시장에서도 독주하고 있다.
내년 이후 출시되는 차세대 HBM4는 16단까지 층수가 높아지면서 업계 전반에 새로운 도전을 예고한 상태다. 경쟁 업체들은 차세대 HBM4에 새로운 접착 방식인 ‘하이브리드 본딩’ 기술을 개발하고 있지만, SK하이닉스는 공정 노하우가 쌓인 MR-MUF도 하이브리드 본딩과 함께 적용할 방침이어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주목된다.
김규현 SK하이닉스 D램 마케팅 담당(부사장)은 “HBM4 제품은 안정성과 양산성이 확보된 초미세 D램 기술과 어드밴스드 MR-MUF 기술을 적용해 예정대로 2025년 하반기 고객 출하를 목표로 삼고 있다”며 “적기 공급뿐 아니라 투자 효율성도 확보해 시장 리더십과 이익 안정성을 지속적으로 지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SSD도 AI 수혜
‘독이 든 성배.‘ SK하이닉스가 2020년 10월 솔리다임(옛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를 인수했을 때 업계에선 기대보다 우려가 컸다. 조기에 ‘빅3’ 체제가 갖춰진 D램과 달리 낸드 시장은 여러 업체가 난립한 치열한 경쟁 시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솔리다임 인수 직후 찾아온 메모리 한파는 낸드 후발주자인 SK하이닉스에 더욱더 혹독했다. 하지만 불과 수년 만에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AI 반도체에만 집중되던 빅테크(기술 대기업)의 투자가 주변 장치로 확대되면서, SK하이닉스가 가진 낸드 기술과 솔리다임이 가진 eSSD(기업용 데이터 저장장치) 기술력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SK하이닉스에 따르면 3분기 eSSD 매출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430% 이상 성장하며 낸드 사업 매출 성장을 이끌었다. 이는 같은 기간 HBM 매출 성장률(330%)을 웃도는 수준이다.
솔리다임은 갈수록 시장 수요가 가파르게 늘고 있는 고용량 eSSD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있다. 특히 SK하이닉스가 ‘쿼드러플레벨셀(QLC)’ 낸드 제품을 선제적으로 출시하며 고용량 SSD 시대를 열었다. SK하이닉스와 솔리다임은 업계에서 유일하게 60TB(테라바이트) 제품을 대량 공급 중이며, 내년 상반기 목표로 122TB 제품의 인증 절차를 진행 중이다.
QLC 낸드는 말 그대도 데이터 기본 저장단위인 셀에 4비트(bit)까지 저장할 수 있는 기술이다. 같은 크기의 셀에 기존(1~3비트)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담아둘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기술적인 난관이 높다. 비트 수가 늘어날수록 용량은 커질 수 있지만, 읽고 쓰기와 같은 성능과 안정성, 데이터 저장 수명 등이 낮아질 수 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컨트롤러와 이를 제어하는 펌웨어와 같은 소프트웨어 기술 등 SSD가 안정적으로 동작할 수 있도록 하는 메모리 솔루션 기술이 중요하다.
SK하이닉스는 솔리다임이 SSD 솔루션 분야에서 확보한 강점을 통해 eSSD 시장에서 판매 호조를 보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내년 3월 인텔과 인수 계약을 마무리 짓고, 본격적인 솔리다임 간 사업 시너지 확보에 나설 전망이다.
김석 SK하이닉스 낸드 마케팅 담당(부사장)은 “초고용량 eSSD 제품 라인업을 확대해 포트폴리오를 더욱 고도화할 예정”이라며 “지속적으로 수익성을 창출할 수 있는 수익성 우선 전략과 투자 최적화 방침을 유지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솔리다임의 올해 흑자 전환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SK하이닉스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솔리다임(SK하이닉스 낸드 프로덕트 솔루션 및 종속회사)의 올해 1분기 손순익은 -1495억 원에서 2분기 786억 원으로 전분기 대비 흑자 전환했다. eSSD 판매 호조가 지속되고 있어 솔리다임 인수 4년 만에 M&A에 대한 재평가도 기대된다.
D램시장 좌우할 ‘1c’ 초집중
SK하이닉스가 HBM을 내세워 역대급 실적을 이어가는 가운데, 고성능 D램 시장에서도 차세대 공정 기술을 앞세워 메모리 업계 최강자가 될 준비를 쌓아가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특히 SK하이닉스의 고성능 D램을 좌우할 차세대 기술은 바로 ‘10나노급 6세대 1c’ 미세공정이다.
SK하이닉스는 이 공정을 통한 D램을 최근 업계 최초로 개발했다. 1c 공정은 고성능 데이터센터용 반도체를 만드는 데 주로 쓰인다. 무엇보다 HBM에 못지 않은 캐시카우(현금 창출원)가 될 수 있다는 기대가 높다.
SK하이닉스는 올 연말까지 1c 공정 D램의 양산 준비에 나서고 내년부터는 본격 양산에 들어간다.
삼성전자도 연내 양산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두 회사는 HBM 생산에도 1c 공정을 활용할 예정이어서 1c 공정은 고성능 메모리 시장의 주도권을 잡을 핵심 경쟁 분야다.
업계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현재 10나노급 6세대 1c 공정을 적용한 ‘16Gb(기가비트) DDR5’ 고성능 D램의 양산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부터 시장에 제품을 본격적으로 공급할 계획이다.
1c 공정은 10나노대 초반의 극미세화된 D램 메모리 공정 기술을 말한다. D램에서 10나노급 공정은 가장 미세화된 기술로 평가되는 만큼 10나노급 중에서도 회로 선폭에 따라 ‘1x, 1y, 1z, 1a, 1b, 1c’ 등 6개 세대로 나뉜다.
이 가운데 1c는 최신 기술로 선폭이 가장 미세해, 이전 세대 공정인 1b와 비교하면 반도체 동작 속도가 11% 더 빠르고, 전력 효율도 9% 이상 개선된다.
SK하이닉스는 지난 8월 1c 공정을 적용한 16Gb DDR5 D램을 최초 개발했다.
이후 제품 인증을 위한 샘플을 일부 공개했고, 성능과 원가 경쟁력을 갖춰 내년 DDR5의 수요 확대에 적극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DDR5는 일반 D램보다 가격이 높은데 1c 공정을 적용하게 되면 수익성은 더 커질 수 있다.
SK하이닉스는 극자외선(EUV) 공정에 신소재를 개발해 적용하는 등 공정 효율을 극대화해 원가 절감도 끌어냈다. 1c 공정의 제품 수율(양품비율)도 이미 안정화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10월 24일 3분기 실적발표 콘퍼런스콜(전화회의)에서 “이미 양산 안정성과 높은 제품 특성을 입증한 (기존) 1b 공정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개발해 향후 양산 적용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것”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도 1c 공정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두 회사의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1c 공정의 DDR5 D램의 초도 양산라인을 연말까지 구축하고, 양산을 본격화할 계획이다.
1c 공정은 D램 성능을 높일 핵심 기술인 데다 적용 범위도 넓어 내년 고성능 D램 시장의 우위를 차지하는 결정타가 될 조짐이 보인다.
SK하이닉스는 DDR5뿐 아니라 HBM에도 1c 공정을 적극 활용할 예정이다. SK하이닉스는 2026년 양산 예정인 HBM 7세대 제품 ‘HBM4E’에도 1c 공정을 사용할 방침이다.
삼성전자는 이보다 한 세대 앞선 6세대 ‘HBM4’에 이 기술을 먼저 쓸 예정인데, HBM 시장으로까지 ‘1c 경쟁’ 전선이 넓어지는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1c 기술은 고성능 서버의 기준이 될 것”이라며 “향후 메모리 업계에서 활용 폭이 더 커질 전망이어서 수율 확보와 기술 안정을 누가 먼저 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