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층이 우리 술을 다채롭고 고급스럽게 소비하고 있다. 한국 술은 근래 르네상스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종류 역시 익숙한 막걸리나 전통식 소주뿐 아니라 전통 기법을 따르면서도 재료와 스타일을 달리하며 다양하게 출시돼 주당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전통주 산업의 규모가 급격하게 늘어난 것만 봐도 우리 술의 인기는 확연히 드러난다. 전통주 시장 규모는 2010년 433억 원에서 2022년 1629억 원까지 커졌다. 중장년층이 즐기는 술에서 젊은 세대도 즐기는 술로 인식되며 수많은 양조장이 생겨나고, 각양각색의 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이제 우리 술은 한류 열풍에 힘입어 해외 소도시 소형 마트의 냉장고에서도 어엿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한국관광공사에서는 ‘술 익는 마을’을 10월의 여행 테마로 선정했다. 속초에서 해남까지, 수제 맥주에서 막걸리까지, 전국 방방곡곡 깊고 그윽한 우리 술의 맛과 멋이 있는 세계로 안내한다.
문경 오미자를 최신 양조기술로 재해석···황홀하고 신비로운 색과 맛 자랑
‘오미자 와인’은 입소문 타고 알려져 대한민국 대표 만찬주·건배주로 각광
가을엔 왠지 달큰한 맛 간절···해창주조장 고두밥 짓는 냄새에 가을이 익고···
명품 막걸리 세상에 내어놓은 이유는? 우리 술에도 그럴 값어치 있다고 판단
1. 문경 오미나라
가을에 찾아가면 좋은 유서 깊은 마을 양조장으로 대한민국 오미자 와이너리를 대표하는 문경 오미나라를 추천한다. 오미나라는 백두대간의 허리인 문경새재 초입에 위치한다. 예로부터 문경새재는 한양과 영남지방을 이어주는 영남대로 가운데 가장 높고 험한 고갯길로 통했으며, 해발 1000미터 고지에 달하는 주흘산과 조령산 사이에 자리해 사시사철 쾌적하고 서늘한 기온을 자랑한다.
경상북도 문경의 이러한 지리적 환경은 오미자를 재배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오미자는 일교차가 큰 해발 300~500미터 정도의 준고랭지 가운데 바람의 피해를 받지 않으면서 일조량이 풍부한 산간분지에서 잘 자란다. 문경은 우리나라 오미자의 생산량 중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45%를 차지한다. 강원도, 제주도 등지에서도 오미자를 재배하지만 오미자 주산지인 문경의 오미자 재배면적에는 미치지 못한다.
오미나라는 2008년 9월 세계 최초의 오미자 와이너리로 설립됐다. 2010년 12월 오미자 와인을 특허 등록했으며, 2011년 11월 정통 발효 공법과 오크통 숙성으로 제조한 오미자 스틸 와인 ‘오미로제’와 정통 샴페인 공법으로 제조한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결’을 선보였다. 이후 2016년 5월 사과 증류주 ‘문경바람’, 6월 오미자 증류주 ‘고운달’을 내놓았고, 2020년 6월 샤마트 공법(보급형 스파클링 와인 대량 생산 방법으로, 압력탱크에서 2차 발효시킨 뒤 압력이 손실되지 않도록 여과해 병입한다)으로 제조한 오미자 스파클링 와인 ‘오미로제 연’을 출시했다.
▲ 오미나라 김형호 부사장의 안내 아래 시음한 ‘오미로제 결’은 숙성기간만 3년 이상 걸리는 고급 스파클링 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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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자 스파클링 와인은 국내외 통틀어 유일하게 오미나라에서만 생산한다. 오미나라를 만든 이종기 대표는 지난 44년 동안 세계 명주를 공부하고 우리 술을 연구한 양조 및 증류 명인이다. 1980년 서울대 농화학과를 졸업한 뒤 OB맥주에 입사, 씨그램코리아 공장장과 디아지오코리아 부사장으로 25년을 근무했다. 이후 스코틀랜드에서 브루잉 앤 디스틸링(Brewing&Distilling, 양조 및 증류)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대한민국 최초로 위스키 마스터 블렌더 자격을 취득했다.
이종기 대표가 오미자 와인을 개발한 이유는 분명했다. 바로 세계 어느 곳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대한민국 최고급 명주를 만들겠다는 일념이었다. 우리나라의 주류 시장에는 우리나라와 무관한 온갖 술이 전 세계로부터 들어와 있었다. 이종기 대표는 우리 농산물을 원료로 국산 세계 명주를 만들기로 다짐했다. 그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이 오미자였다. 황홀하고 신비로운 색과 맛을 자랑하는 오미자를 최신 양조기술로 재해석했다.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오미자 와인은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리에 만찬주와 건배주로 쓰였다.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2013년 세계조정선수권대회, 2014년 ITU 전권회의, 2015년 세계군인체육대회, 2015년 세계물포럼, 2018년 평창 동계패럴림픽, 2022년 5월 바이든 미 대통령 방한 정상회의, 2023년 1월 다보스포럼 한국인의 밤 등 오미자 와인의 행보는 화려했다.
지름 약 1cm의 작은 열매 오미자(五味子)는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 다섯 가지 맛이 난다고 하여 이름 붙은 천혜의 과일이다. 소화 촉진, 피로 해소, 성 기능 개선에 좋을 뿐만 아니라 뇌졸중, 고혈압, 당뇨, 노화를 예방하는 데 뛰어나 선조 때부터 최상의 약재로 쓰였다. 오미나라는 오랜 노력으로 까다로운 오미자 발효에 성공해 대중이 오미자를 와인으로 즐길 수 있도록 주류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오미나라에 방문하면 와이너리 투어 및 테이스팅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와인 발효실, 증류실, 숙성실 등을 순차적으로 관람한 뒤 와인 시음으로 이어진다. 체험비는 인당 1만 원이며 40~50분 정도 소요된다. 나만의 기념주 만들기는 인당 3만 원이다.
▲ 나만의 기념주 만들기 체험 공간. 오크통에서 숙성된 사과 증류주를 병에 담아 캡과 캡실을 씌운 뒤 나만의 라벨을 붙여 소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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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나라는 와이너리 체험 프로그램을 내실 있게 진행하고 있는 점을 인정받아 2016년 7월 농림축산식품부 ‘찾아가는 양조장’으로 선정된 데 이어 2023년 11월 6차 산업 우수사례 경진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했다. 최근 오미나라는 침출 방식으로 담그는 매실주와 달리 매실을 발효시킨 뒤 증류한 ‘섬진강 바람’을 공개했다. 오미나라가 야심 차게 준비 중인 차기작의 원료는 바로 ‘쌀’이라고 하니 기대해 볼 일이다.
2007년 10월 개장한 문경자연생태박물관은 문경 지역의 생태학적 가치를 공유하는 자연 학습 및 체험 공간이다. 지상 2층 규모로 1층에는 문경의 자연환경을 시청각 자료로 접할 수 있는 영상관, 문경 지역의 돌리네(빗물에 녹은 석회암 표면이 원 모양을 만들며 가운데가 웅덩이처럼 움푹 들어가는 현상)습지를 주제로 한 특별전시실, 실내 모험 어린이 놀이시설 벅스어드벤처, 가상 4D 체험실 등이 있으며, 2층에는 생물박제표본과 함께 8개 주제로 문경의 자연사를 학습하고 관람할 수 있는 상설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문경새재 도립공원 옛길박물관은 문경의 이와 같은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고스란히 담고자 2010년 4월 개관한 박물관으로, 향토사 중심으로 운영하던 문경새재 박물관이 그 전신이다. 옛사람들이 여행 중 괴나리봇짐 속에 넣고 다녔을 유물을 비롯해 각종 고지도, 과거시험을 보러 가던 길로 유명한 문경새재 위에서 남긴 각종 여행기와 풍속화 등을 전시한다. 입장료는 역시 무료다.
▲ 새도 쉬었다 가는 고개라는 뜻을 담고 있는 문경새재는 사계절 수려한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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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는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문경 대표 명승지로,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의 고개 중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유명했다. 새도 쉬었다 가는 고개라는 뜻을 담고 있는 ‘새재(鳥嶺)’라는 이름이 이를 설명해준다. 현재 문경새재의 얼굴인 3개 관문(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은 임진왜란 직후 설치한 국방의 요새였다. 입구부터 제3관문 조령관까지의 편도 거리는 약 7km다. 이렇듯 고유의 맛과 멋을 뽐내며 깊은 쉼을 선사하는 문경에서 청명한 가을 하늘과 마주해 보는 것은 어떨까?
<글·사진/장보영(여행작가)>
2. 해남 해창주조장
해남 여행은 가을이 좋다. 들녘은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한반도 땅끝은 단풍으로 물든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말을 실감한다. 그럴수록 생각나는 해남의 가을 여행지 한 곳이 있다. 전통주 막걸리로 소문난 해창주조장이다. 막걸리에 제철이 따로 있는 건 아니지만 천고마비의 계절에는 왠지 모르게 그 달큰한 맛이 간절하다. 그러니 해창주조장의 고두밥 짓는 냄새는 가을이 익어가는 여정의 일부일 테다.
해창주조장은 1927년 일본인 시바타 히코헤이가 문을 열었다. 미곡 창고를 짓고 주조장을 운영했다. 삼산천을 따라 바다 건너 일본까지 뱃길이 열리던 시절이다. 광복 후에는 삼호초등학교 설립자 장남문 씨가, 그 이후에는 다시 황의권 씨가 맡아 약 30년 가까이 운영했다. 현재는 오병인 씨가 주조장의 명맥을 잇고 있다. 여행을 좋아해 국내 곳곳을 다니다 해창주조장을 알았고 막걸리 맛에 반했다. 서울까지 배달해 먹을 만큼 골수 단골이었다. 2007년 이전 주인 황의권 씨의 제안으로 인수했다.
오병인 씨가 맡으면서 해창주조장은 변신했다. 그는 주조의 대가를 찾아다니며 막걸리 제조법을 배웠다. 지금은 고가의 명품 막걸리로 유명하다. 해창막걸리는 시중 막걸리와 달리 9도, 12도 등이 대표 상품이다. 발효시간이 길고 추가적인 공정이 들어가 가격 또한 각각 8000원, 1만2000원에 이른다.
얼마 전 추석 명절에는 18도 막걸리가 인기였다. 해창 18도는 설과 추석 그리고 가정의 달(5월 전후), 연말(12월)에만 한정 판매한다. 양조장 출하가격이 11만 원(시중 약 13만5000원)이지만 선물용으로 인기다. 지난 2022년 출시했던 ‘해창아폴로’는 가격이 무려 110만 원이었다. 도예가가 빚은 막걸리병에 24K 금 한 돈으로 ‘해창’ 글씨를 새긴 상품이었다. 발효만 90일이 걸렸다.
전통주는 발효 단계(한 번만 담가 완성하는 단양주부터 첫 발효로 만든 밑술에 다음 단계로 덧술 과정을 추가하면서 그 횟수에 따라 이양주 삼양주 사양주 등으로 구분)가 많을수록 고급술로 평가하는데 해창 9도와 12도는 삼양주고 18도는 사양주다. 이에 관한 오 대표의 철학은 확고하다. 보통 와인은 1만~2만 원이면 저가인데 막걸리는 1만~2만 원이면 고가라 여긴다. 왜 우리 막걸리는 와인처럼 팔 수 없는 것일까? 그가 명품 막걸리를 세상에 내어놓은 이유다. 우리 술에도 그럴 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해창주조장의 막걸리는 그 맛을 빚는 재료 또한 남다르다. 해남에서 재배한 유기농 찹쌀에 멥쌀을 일부 섞어 만든다. 찹쌀과 멥쌀의 비율은 8:2. 특히 찹쌀은 오 대표가 오랜 연구 끝에 찾은 답이다. 본연의 은은한 단맛이 있어 인공 감미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감칠맛이 난다. 그 맛은 애주가들이 먼저 알아챘다. <식객>의 허영만 만화가,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 등이 해창막걸리의 팬이다. 특히 정용진 회장은 자신의 SNS에 ‘인생막걸리’라고 해시태그(#)를 달기도 했다.
해창주조장의 매력은 또 있다. 공간의 요소들이 주조장의 역사를 대변한다. 주조장 내에는 일본식 가옥의 외형을 간직한 살림집과 정원이 반긴다. 살림집 뒤편 정원은 방문객들이 자유롭게 둘러 볼 수 있다. 40여 종의 수목이 약 2500㎡의 정원을 가득 채우는데 작은 우주다. 가장 오랜 배롱나무는 수령이 무려 약 700년에 달한다. 만개하는 시절은 정원만으로도 일부러 찾을 이유가 된다. 여름 지나 가을에 다다라서는 단풍나무나 벚나무 등이 울긋불긋 가을빛을 내민다. 정원의 연못가에서 막걸릿잔을 기울이노라면 신선이 따로 없다. 물론 운전대를 잡았다면 참았다가 집으로 돌아가 맛볼 일이다.
▲ 해창주조장 방문객들은 해창막걸리에 한 번, 정원에 또 한 번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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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 마당의 롤스로이스 차량도 눈여겨볼 일이다. 오 대표의 자가용으로 서울 등을 오갈 때 종종 타는 차다. 명품 막걸리에 대한 오 대표의 고집과 집념을 드러내는 상징과도 같은 존재인데 그래서 해창 18도의 이름이 한때는 ‘해창 롤스로이스’였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지만, 라벨에는 허영만 만화가가 그린 롤스로이스 그림이 자부심처럼 남아 있다. 지난 9월에는 해창 10도 플러스를 새로이 출시했다. 막걸리를 잇는 증류주도 한창 연구 중이다. 해창막걸리는 일부 온라인몰이나 대형마트 외에 해창주조장 현장에서도 구매할 수 있다.
‘해남’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고산 윤선도다. 그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문신이다. 그러므로 해남 여행에서 한 번은 들러야 할 곳이 고산 윤선도 유적지다. 덕음산 남서쪽 기슭에 녹우당을 중심으로 고산사당, 어초은사당, 백련지 등이 자리하는데 풍수지리상으로 해남에서 손꼽는 명당이다. 녹우당 입구에는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문지기처럼 버티고 서 있고 뒤편으로는 400여 그루의 비자림이 울창하다. 비자림은 녹우당(綠雨堂) 당호의 기원이기도 하다. 바람이 흔들리는 비자림의 웅성거림이 마치 빗소리 같다 해 붙은 이름이다. 다만 녹우당이 보수 공사 중이라 내부를 볼 수 없다.
아쉬움은 고산윤선도유물전시관에서 달랜다. 지상의 전통한옥과 아트리움, 지하전시관으로 이뤄진 건물은 한국건축문화대상 대상(2011)을 받은 바 있다. 조선 시대 가장 유명한 초상화인 윤두서 자화상(국보) 등을 전시 중이다.
해남의 가을은 축제와 같이 즐겨도 좋겠다. 10월에는 우수영 관광지에서 명량대첩축제가 열렸다.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를 기리는 축제로 이례적으로 해남과 진도군이 공동 개최했다. 우수영 관광지는 명량대첩 기념공원과 명량대첩 해전사 기념전시관, 명량 해상 케이블카 등으로 이뤄져 있다. 가볍게 강강술래길을 걸으며 울돌목의 회오리치는 급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날의 격전이 떠오르는 듯하다. 명량대첩축제는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열렸다.
11월 1일부터 사흘간은 두륜산도립공원 등에서 해남 미남(味南) 축제가 열린다. 미남축제는 해남의 제철을 혀끝으로 느껴볼 수 있는 축제다. 해남 특산물 고구마를 맛볼 수 있는 고구마체험존 등이 눈길을 끈다. 축제장 주무대는 두륜산도립공원 잔디구장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두륜산 케이블카가 나온다.
▲ 두륜산 고계봉 전망대에서 본 완도 쪽 다도해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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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케이블카는 두륜산 고계봉 입구까지 편도 약 8분 정도가 소요된다. 고계봉은 등산로가 없다. 상부 정류장에서 고계봉까지 도보로 10분 정도 걸린다. 고계봉 전망대에서는 목포, 강진, 완도 등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짧은 수고가 민망할 정도로 황홀하다. 맑은 날에는 제주도 한라산이 보인다.
<글·사진/박상준(여행작가)>
<콘텐츠 제공/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