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화학 업계가 수익 저하와 수출 감소로 장기 불황에 허덕이고 있다. 중국의 기술 발달과 설비 증설로 공급 과잉이 몰아치면서 한국 석유화학 업계의 부담은 더 커지는 모양새다. 이에 석유화학업계는 사업구조 전반을 개편하고, 투자 속도를 조절한다는 방침이다.
국내 석유화학 빅4사인 LG화학·금호석유화학·한화솔루션·롯데케미칼의 올 상반기 기준 재고자산 합계 금액은 7조1513억 원이다. 이는 지난해 말보다 16.5% 상승한 것이다. 재고자산은 판매를 위해 보유하거나 생산 중인 자산이나 원재료를 말한다. 결과적으로 재고자산이 늘었다는 것은 그만큼 업황이 어렵거나 시장 변화 예측에 실패해 재고가 늘었다는 의미다.
석유화학 빅4 2분기 실적 부진···이유는 글로벌 경기 침체 따른 수요 감소
사업구조 근간은 나프타 분해 설비(NCC)···중국發 리스크 타격 더 큰 상황
LG화학·롯데케미칼 NCC 부문 통합 등 업계에선 NCC 둘러싼 빅딜설 파다
실적 반등 위해 고부가제품 늘리는 것 필수···업계 포트폴리오 다변화 방침
▲ 중국의 기술 발달과 설비 증설로 공급 과잉이 몰아치면서 한국 석유화학 업계의 부담은 더 커지고 있다. 사진은 LG화학 전남 여수 NCC(나프타분해시설) 공장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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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화학 빅4의 영업실적 추이도 좋지 않긴 마찬가지다.
LG화학은 올 2분기 매출 12조2997억 원, 영업이익 4059억 원을 보이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14.2%, 34.3% 감소했다. 이 가운데 석유화학 부문을 보면 매출 4조9658억 원, 영업이익 323억 원에 그쳤다.
롯데케미칼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60.8% 감소한 영업손실 1112억 원에 머물렀다. 이는 3개 분기 연속 적자다. 한화솔루션도 2분기 영업손실 1078억 원을 올리며 케미칼 부문에서 3개 분기 연속 적자를 보이고 있다. 그나마 금호석유화학이 2분기 연결기준 매출 1조8525억 원, 영업이익 1191억 원을 기록하며 실적 반등에 성공했다. 전년 동기대비 각각 17.4%, 10.7% 증가한 수준이다.
이처럼 석유화학 빅4가 실적 부진을 보이는 이유는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감소가 주 원인이다. 특히 이들 기업은 나프타 분해 설비(NCC)를 근간으로 하는 사업 구조여서 중국발(發) 리스크의 타격이 더 큰 상황이다.
원래 NCC 사업은 한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구조였지만 2010년대 들어 중국 자급률이 한결 높아졌다. 중국은 석유화학 설비를 증설하고, 기술력을 끌어올리며 자국 내에서 자급자족하며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점유율과 가격경쟁력은 한 단계 하락했다.
여기에 중동까지 석유화학 사업에 가세하며 글로벌 공급과잉이 심화됐고, 좀처럼 수요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한국석유화학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업체들의 NCC 평균 가동률은 74% 수준에 그친다. 2021년에는 93.1%에 달했는데, 불과 2년 만에 70%대까지 떨어졌다.
이에 따라 업계는 재고자산을 줄이기 위해 가동률을 낮추고, 설비 매각이나 투자 축소 등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전유진 IM투자증권 연구원은 “글로벌 크래커 증설 물량 감소와 중국 경기 부양 효과, 유가 안정 등에 근거해 NCC 업황은 바닥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는 모습을 기대했다”며 “이런 상황에서 중국의 7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 수출, 소매판매 등 주요 지표들이 둔화되거나 하회하는 점은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끊이지 않는 빅딜설
석유화학 업계가 장기 불황을 맞으며 기초 시설인 나프타 분해 시설(NCC)을 놓고 여러 시나리오가 거론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국내 석유화학업계 NCC를 둘러싼 빅딜설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LG화학과 롯데케미칼이 NCC 부문을 통합하거나, 합작사 설립을 검토한다는 방안이 대표적이다. 두 회사는 지난 4월 공시를 통해 설비 통폐합이나 합작사 설립을 검토하지 않고 있다고 부인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LG화학이 NCC 일부 시설을 물적 분할로 떼낼 수 있다고 관측한다. LG화학은 사업 가치 제고 방안을 고심하고 있지만, 아직 확정된 내용은 없다는 입장이다.
롯데케미칼은 말레이시아 생산 법인인 롯데케미칼(LC) 타이탄 매각을 열어둔 상태로 기초화학 비중을 크게 낮추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한화솔루션과 DL케마킬이 합작해 만든 여천NCC는 장기 공급계약 만료를 앞두고 매각설까지 제기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장기 공급계약은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자동 연장되기 때문에 매각설은 현실성이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석유화학 산업은 대규모 장치 산업이자 파이프 산업으로 구조조정이 쉽지 않다. 원유에서 출발해 다양한 석유 화학 제품 생산 과정이 파이프로 연결돼 있다. NCC만 따로 떼어내 매각하는 것은 힘든 구조다.
그룹별 수직 계열화를 통한 밸류체인 구축도 난관이다. 원료 공급부터 완성품 활용까지 복잡하게 얽힌 기업 사이 이해관계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다. 1년간 시나리오만 나올 뿐, 실현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초화학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규모의 경제를 이루어야 한다는 분석이 빅딜설의 재료가 되고 있다. 중국의 저가 공세를 이기기 위해서는 대형 NCC 기업 출연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된다.
고부가가치 상품 비중 확대를 내세운 기업으로선 NCC 사업을 현 상태로 유지하기 어렵다는 현실론도 있다. 결국 여러 빅딜설은 불황의 방증이라는 말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수요 감소와 공급 과잉이 겹치며 불황이 오자 시장에서 여러 시나리오를 거론하는 것 같다”며 “실제 산업 차원의 구조조정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실적 반전 위한 해결책은
석유화학 업계의 고질적인 적자 원인으로 NCC(나프타 분해시설)이 지목되는 가운데 결국 의미 있는 실적 반등을 위해서는 ‘고부가 제품(스페셜티)’을 늘리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진단이다. 국내 석유화학 업체들은 새로운 캐시카우(현금창출원)가 될 만한 스페셜티를 적극 발굴해 포트폴리오를 다변화할 방침이다.
국내 석유화학업체들은 기존 범용 사업을 이미 한계사업으로 판단하고, 포트폴리오에서 비중을 줄이는 대신 고부가 제품 비중을 늘리기 위한 전략을 속속 내놓고 있다.
먼저 LG화학은 올 상반기 SM(스티렌모노머)를 생산했던 전남 여수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지난해 6월에는 대산 SM공장을 철거했다. LG화학은 특히 국내 최대 NCC 생산 설비를 보유한 업체로 사업 전망이 불투명한 범용 제품 비중을 과감히 줄이는 것이 관건이었다.
LG화학은 대신 고부가가치 제품으로 사업 중심축을 옮기며 포트폴리오를 다시 재건하고 있다.
일례로 주목하는 제품은 폴리올레핀엘라스토머(POE), 이소프로필알코올(C3-IPA), 생분해 플라스틱(PBAT) 등이다. 이미 올해 이들 제품을 각각 10만 톤, 6만 톤, 5만 톤씩 늘리는 설비 증설을 끝냈고, 향후에도 사업 비중을 계속 늘릴 방침이다.
롯데케미칼도 만성 적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회사인 롯데정밀화학을 중심으로 스페셜티 사업을 적극 추진 중이다.
대표적인 제품은 ‘헤셀로스’다. 헤셀로스는 에틸렌옥사이드(EO)와 펄프를 주 원료로 하는 셀룰로스 유도체로 수용성 페인트와 생활용품, 화장품 등 산업 전 분야에서 점성과 보습성을 부여하는 첨가제로 쓰인다.
지난 2018년 하반기에 증설을 끝냈고, 지난해 12월에는 롯데케미칼 여수 개발 부지에 헤셀로스 전용 생산공장도 건설했다. 이 공장 완공으로 약 1만 톤의 헤셀로스 제품 원료 조달부터 생산을 한 곳에서 진행한다.
금호석유화학도 일찌감치 스페셜티 비중을 높이는 사업 전략을 단행해 석유화학 업계 전반의 불황 속에서도 실적이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중국 업체들과 비교해 기술력으로 인정받는 합성고무가 실적 개선의 ‘핵심’으로 평가받는다.
합성고무는 전반적인 산업 분야에서 활용 범위가 다양한데, 이 중에서도 타이어 부문에서 괄목할 성과를 올리고 있다. 올 2분기 타이어용 합성고무 영업이익은 466억 원으로 전 분기 대비 85.7% 증가했다.
타이어 등 전방산업이 호황을 보이고 있어, 금호석유화학의 고급화 전략이 시장 수요와 맞아떨어지며 호실적을 올렸다는 분석이다.
지난 8월 대표이사가 교체된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도 재도약을 준비 중이다. 예년보다 한 달 빨리 이뤄진 인사로 남정운 신임 대표이사가 선임된 가운데, 고부가·스페셜티 제품 확대를 통해 부진한 실적 개선에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한화솔루션은 스페셜티 제품으로 전선 고부가가치 소재인 가교폴리에틸렌(XLPE) 생산을 늘리고 있다. 케이블 절연 용도로 쓰이는 XLPE(가교폴리에틸렌)는 한화솔루션이 국내 최초로 400킬로볼트(kV)급 제품 생산에 성공해 국내외 주요 케이블 업체들을 대상으로 판매망을 확대하고 있다.
기존 석유화학 사업이 부진을 겪고 있지만 케이블 소재 사업의 매출만큼은 지난해 61% 이상 증가했다. 현재 한화솔루션은 이 분야에서 세계 3위 생산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글로벌 케이블 메이커들을 상대로 시장 점유율을 더 높이겠다는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