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량도 대사도 많지 않지만 ‘윤보민’ 역할 서늘하고 차갑고 침착하게 소화
“이번 역할에서 전하고 싶었던 건 시청자가 드라마를 끝까지 보게 하는 것”
배우 이정은(사진)에게 넷플릭스 시리즈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는 의외의 선택으로 보인다. 2019년 영화 <기생충> 이후 그는 요즘 말로 도파민 담당이었다. 짧게 나오더라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거나 그게 아니면 독특한 캐릭터로 극 전체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이 되는 역할이었다. 2022년 영화 <오마주>, 2021년 <자산어보>, 2020년 <내가 죽던 날>에서, 드라마 <낮과 밤이 다른 그녀> <우리들의 블루스> <타인은 지옥이다> <동백꽃 필 무렵>에서도 그랬다.
그런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의 이정은은 마치 배경같다. 그가 맡은 ‘윤보민’은 날뛰는 사람들 뒤에서 바라보는 사람. 그리고 행동할 수 있다는 확신이 온전히 섰을 때에야 움직이는 사람.
그래서일까. 이정은은 말했다. “맞다. 윤보민은 관찰자다.”
윤보민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수없이 많은 살인 사건을 해결한 강력범죄 전문 형사. 정의감보다는 사건이 주는 재미를 파고든다. 그래서 윤보민에게 붙은 별명이 ‘술래’다. 술래 역할을 좋아하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렇게 20년을 달리던 윤보민은 조금이나마 일상을 찾기 위해 지방 파출소장으로 전출 간다. 하지만 그곳에서 그는 또다시 피 냄새를 맡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역할을 통해 내가 전하고 싶었던 건 시청자가 이 작품을 8회까지 보게 하는 것이었다. 윤보민의 시선은 시청자의 시선과 유사하다. 보고 있는 것이다.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하지만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분위기를 만들어 가기도 한다. 나는 전면에 나서는 역할도 해봤고, 윤보민 같은 역할도 해봤다. 둘 다 재밌다. 내가 원하는 건, 이 좋은 이야기를 시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이고, 그게 제일 중요하다.”
이정은은 이번 작품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고 했다. 흔히 볼 수 없는 대본이었고, 그 속에 있는 윤보민 역시 흔하게 볼 수 없는 캐릭터였다. 센 것을 주로 다루고 압축하고 축약하는 콘텐츠가 판을 치는 시대에 관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들에게 벌어진 사건뿐 아니라 그들의 감정을 파고 들어가는 이 작품이 매력적이었다고 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떠오르더라. 이런 드라마는 자주 만들어질 수 없어서 끌렸다. 그리고 내 나이 또래 형사 역할을 한다는 것도 좋았고. 윤보민은 형사로서 범인을 찾아간다. 그 모습이 연기와 비슷한 것 같았다. 방법은 다르지만 한 인물을 그려나가다는 의미에서 유사하다고 본 것이다. 내 나이대 여성 형사 캐릭터가 거의 없기도 하고.”
분량도 많지 않고 대사도 별로 없지만 이정은은 이정은이다. 이정은의 윤보민은 서늘할 정도로 차가우면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다. 예민하고 예리하며 날이 서 있다. <기생충>에서 보여준 문광의 광기나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은희의 생활력 같은 건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관련 기사와 댓글, 커뮤니티에 올라오는 각종 관련 게시물을 모두 읽어 보고 있다는 이정은에게 가장 듣기 좋은 평은 무엇이었냐고 묻자 “이정은 연기가 제일 좋았다는 얘기”라고 말하며 웃었다. 그러면서 “그런 얘기가 많지 않아서 기억을 하고 있다”며 다시 한번 웃었다. “노력한 걸 좋게 봐줬다니 좋지 않은가. 사실 내가 이렇게 온갖 반응을 다 찾아보는 건 이 작품이 정말 잘 되길 바라기 때문이다.”
최근 이정은의 작품 목록을 보면 유독 다채롭다는 걸 알게 된다. <오마주> 같은 소규모 독립·예술 영화에 나왔다가도 이번 작품처럼 글로벌 스트리밍 플랫폼의 오리지널 시리즈에 나오고, 로맨틱 코미디 요소가 강한 드라마인 <낮과 밤이 다른 그녀>를 선택했다가도 색다른 시각을 제시하는 메시지가 담긴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같은 시리즈를 고르기도 한다.
이정은은 “의도적으로 더 다양하게 하려고 한다”며 “언제나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나한테도 윤보민 같은 면이 있다. 일을 할 땐 몰입하느라 가족도 잘 챙기지 못하니까. 아무튼 계속 도전하고 싶어서 최근엔 운동을 열심히 한다. 근력이 있어야 연기도 잘할 수 있는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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