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HBM(고대역폭 메모리 칩) 시장을 주도하고 있는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분야 ‘1등 리더십’을 이어가기 위해 전략을 가다듬고 있다. 과감한 패키징 기술 투자와 연구개발로 HBM 1등 초석을 다지기에 나선 것.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반도체 전문기업 SK하이닉스 생산 현장을 찾아 인공지능(AI) 반도체 현안을 직접 챙겼다. AI를 그룹 핵심 화두로 내건 최 회장은 이 자리에서 “HBM에 안주하지 말고 미래 경쟁력 강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HBM 이후를 이끌 차세대 반도체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지속적인 투자 계획을 시사한 것이다.
SK하이닉스는 내년에도 AI 시장 확대에 따른 메모리 수요가 높을 것으로 보고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이다. 하지만 경쟁사의 추격도 만만치 않다. 며칠 전 삼성전자 5세대 HBM3E 8단 제품이 엔비디아 납품을 위한 품질 테스트를 통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HBM 성공신화’를 이어갈 수 있을까?
2013년 세계 최초 초고속 D램 HBM 개발한 이후 차세대 기술 선도
현존 최고 성능 5세대 HBM3E 가장 먼저 공급하며 HBM 시장 주도
양산 준비 중인 321단 낸드 견본품 공개···글로벌 시장에 1등 기술력 각인
AI 화두로 내건 최 회장, 하이닉스 생산현장 찾아 AI 반도체 현안 챙기기
▲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8월 5일 SK하이닉스 본사인 이천캠퍼스를 찾아 고대역폭메모리(HBM)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AI 메모리 분야 사업현황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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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BM(고대역폭 메모리 칩) 1위 반도체 전문기업 SK하이닉스가 차세대 패킹 기술로 ‘HBM 1등’ 굳히기에 들어갔다.
초고속 D램 HBM은 AI 시스템을 구현하는 메모리의 기술 한계를 돌파하게 만든 주역으로, 지금의 AI 시대를 가능하게 해준 대표적인 AI 반도체 중 하나다. 생성형 AI와 함께 벼락같이 등장한 ‘히트상품’으로 보이지만, 사실 HBM은 10년 넘는 기간 동안 수많은 기술 전문가들이 협업으로 완성한 반도체 기술 혁명의 산물이다.
SK하이닉스는 11년 전인 2013년 세계 최초로 HBM을 개발한 이후 차세대 기술 개발을 선도했고, 올해 3월에는 현존 최고 성능의 5세대 HBM3E를 가장 먼저 양산해 공급하며 HBM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SK하이닉스가 AI 메모리 분야 1등 리더십을 구축한 비결은 무엇일까.
1등 공신은 MR-MUF 기술
이규제 SK하이닉스 부사장은 자사 뉴스룸에 공개된 인터뷰를 통해 HBM 성공의 1등 공신으로 MR-MUF 기술을 한 번 더 고도화한 ‘어드밴스드 MR-MUF’를 첫손에 꼽았다.
MR-MUF는 반도체 칩을 쌓아올린 뒤 칩과 칩 사이 회로를 보호하기 위해 공간 사이에 액체 형태의 보호재를 주입하고 굳히는 공정이다. 칩을 하나씩 쌓을 때마다 필름형 소재를 깔아주는 방식 대비 공정이 효율적이고, 열 방출에도 효과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SK하이닉스는 2013년 세계 최초로 개발한 1세대 HBM 제품에 TSV 기술을 적용했다. TSV는 여러 개의 D램 칩에 수천 개의 구멍을 뚫고 이를 수직 관통 전극으로 연결해 HBM의 초고속 성능을 구현해 주는 핵심 기술이다.
TSV는 이미 20여 년 전부터 기존 메모리의 성능 한계를 극복해 줄 차세대 기술로 주목받았지만, 곧바로 상업화된 기술로 부상하지는 못했다. 인프라 구축의 어려움과 투자비 회수 불확실성 등 난제로 누구도 선뜻 개발에 나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부사장은 당시 상황에 대해 “커다란 호수 주변에서 누가 먼저 물에 뛰어들지 서로 눈치를 보며 기다리는 아이들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SK하이닉스도 처음에는 망설이는 회사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우리는 미래 시장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고성능과 고용량을 동시에 구현할 수 있는 TSV 기술과 적층을 포함한 WLP 기술을 동시에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2000년대 초반부터 적극적인 연구에 들어갔다.”
WLP 기술은 웨이퍼를 칩 단위로 잘라 칩을 패키징하는 기존의 컨벤셔널 패키지에서 한 단계 발전한 방식으로, 웨이퍼 상에서 패키징을 마무리해 완제품을 만드는 기술을 말한다.
2010년대로 접어들며, 고성능 GPU(그래픽 연산장치) 컴퓨팅 시장의 성장과 함께 이를 지원할 수 있는 고대역폭 니어 메모리(Near-memory, 연산장치에 가깝게 밀착된 메모리로, 더 빠른 데이터 처리가 가능하다)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시장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SK하이닉스는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TSV와 WLP 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제품 개발에 착수했다. 그리고 마침내 기존 최고속 그래픽 D램 제품인 GDDR5보다 4배 이상 빠르며, 전력 소모량은 40% 낮고, 칩 적층을 통해 제품 면적을 획기적으로 줄인 최초의 HBM을 탄생시켰다.
SK하이닉스가 처음으로 HBM 시대를 열기는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장이 열리고 주도권을 잡게 된 시점은 3세대 제품인 HBM2E 개발에 성공한 2019년부터다. 이를 기점으로 SK하이닉스는 확실한 업계 우위를 점했다는 평가를 받게 됐다. SK하이닉스는 2023년에 4세대 12단 HBM3와 5세대 HBM3E 개발에 연이어 성공하며 HBM 1등 리더십을 지키고 있다.
이 부사장은 “여기에 만족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된다”면서 “앞으로도 HBM 리더십을 지켜가려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커스텀 제품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차세대 패키징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 SK하이닉스 PKG제품개발 담당 이규제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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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 규격에 따라 제품 두께는 유지하면서도 성능과 용량을 높이기 위한 칩 고단 적층의 방편으로 최근 차세대 패키징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SK하이닉스도 방열 성능이 우수한 기존 어드밴스드 MR-MUF를 지속적으로 고도화하는 한편, 새로운 기술을 확보해 나갈 계획이다.”
미국의 기술회사 엔비디아는 최근 차세대 AI 반도체 ‘블랙웰(엔비디아의 GPU 아키텍처의 이름)'이 설계 결함 문제로 양산이 지연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면서, 엔비디아에 HBM을 공급하는 SK하이닉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이 부사장은 이 부분을 의식한 듯 “위 아래 칩 간의 간격이 좁아져 생기는 발열 문제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이지만, 점점 더 다양해지는 고객의 성능 요구를 충족시킬 솔루션을 개발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AI 메모리 미래 비전 제시
또한 SK하이닉스는 지난 8월 6~8일(현지 시각)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에서 열린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행사인 ‘FMS 2024’에 참가해 최신 AI 메모리 기술과 제품을 선보이고 이 분야 미래 비전을 제시해 주목을 받았다.
‘FMS’는 지난해까지 낸드 기업들이 주로 참여하는 세계 최대 낸드 플래시 행사로 진행됐으나,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주최 측이 D램을 포함한 메모리, 스토리지 전 영역으로 분야를 확대했다.
SK하이닉스는 “FMS 영역 확대에 발맞춰 올해는 제품 전시뿐 아니라 기조연설을 통한 회사 비전 발표 등 많은 준비를 했다”며 “AI 메모리 솔루션 미래를 선도하는 당사 경쟁력을 업계 전반에 알리는 기회로 이번 행사를 적극 활용했다”고 설명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FMS에서 세계 최고층 321단 낸드를 최초로 공개하는 등 이 행사를 통한 글로벌 소통에 공을 들여왔다.
먼저 SK하이닉스 권언오 부사장(HBM PI 담당)과 김천성 부사장(WW SSD PMO)이 ‘AI 시대, 메모리와 스토리지 솔루션 리더십과 비전’을 주제로 기조연설을 진행했다. 이들은 AI 구현에 최적화된 SK하이닉스의 D램, 낸드 제품 포트폴리오와 AI 메모리 솔루션을 소개했다.
이번 행사에서는 3분기 양산 계획인 HBM3E 12단, 2025년 상반기 양산을 목표로 준비 중인 321단 낸드 견본품 등 차세대 AI 메모리 제품도 선보였다.
SK하이닉스 김주선 사장(AI 인프라 담당)은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D램, 낸드 단품보다는 여러 제품을 결합해 성능을 높인 메모리 솔루션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며 “FMS 행사를 통해 이 분야를 선도하는 SK하이닉스의 1등 경쟁력과 기술력을 글로벌 시장에 각인시켰다”고 말했다.
최태원 “HBM 이후 치열하게 고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올해로 두 번째 SK하이닉스 생산 현장을 찾아 ‘AI 반도체 현안’을 직접 챙겼다.
SK그룹은 최 회장이 SK하이닉스 본사인 이천캠퍼스를 찾아 SK하이닉스 곽노정 대표 등 주요 경영진과 함께 HBM 생산 라인을 둘러보고, AI 메모리 분야 사업 현황을 점검했다고 8월 5일 밝혔다.
이번에 최 회장이 살펴본 HBM 생산 라인은 최첨단 후공정 설비가 구축된 생산 시설로, SK하이닉스는 이곳에서 지난 3월부터 업계 최고 성능의 AI용 메모리인 5세대 HBM(HBM3E) 8단 제품을 양산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AI 메모리 리더십을 공고히 하기 위해 차세대 HBM 상용화 준비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SK하이닉스는 HBM3E 12단 제품을 올해 3분기 양산해 4분기부터 고객에게 공급할 계획이며, 6세대 HBM(HBM4)은 내년 하반기 양산을 목표로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최 회장은 HBM 생산 라인을 점검한 뒤 곽노정 대표, 송현종 사장, 김주선 사장 등 SK하이닉스 경영진과 함께 AI 시대 D램, 낸드 기술·제품 리더십과 포스트 HBM을 이끌어 나갈 미래 사업 경쟁력 강화 방안에 대해 장시간 논의를 진행했다.
최 회장은 최근 글로벌 주식 시장 변동성으로 제기되는 AI 거품론에 대해 “AI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위기에서 기회를 포착한 기업만이 살아남아 기술을 선도할 수 있다”며 “어려울 때일수록 흔들림 없이 기술 경쟁력 확보에 매진하고 차세대 제품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자”고 당부했다.
최 회장은 또한 “최근 해외 빅테크들이 SK하이닉스의 HBM 기술 리더십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이는 3만2000명 SK하이닉스 구성원의 끊임없는 도전과 노력의 성과인 동시에 우리 스스로에 대한 믿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묵묵히 그 믿음을 더욱 두텁게 가져가자”며 구성원들을 격려했다.
이어 “내년에 6세대 HBM(HBM4) 조기 상용화하여 대한민국의 AI 반도체 리더십을 지켜며 국가 경제에 기여해 나가자”고 강조했다.
최 회장은 1월 4일 SK하이닉스 이천캠퍼스 현장 경영에 나선 이후, 글로벌 빅테크 CEO들과의 연쇄 회동 등을 통해 AI 반도체 리더십 강화 및 글로벌 협력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직접 뛰고 있다.
최 회장은 지난 4월 미국 앤비디아 본사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를 만나 글로벌 AI 동맹 구축 방안을, 6월에는 대만을 찾아 웨이저자 TSMC 회장과 양사 간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이어 지난 6월 말부터 약 2주간 미국에 머물며 오픈AI, 마이크로소프트(MS), 아마존, 인텔 등 미국 주요 빅테크 CEO와 연이어 회동하며, SK와 AI 및 반도체 파트너십을 공고히 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또한 최 회장은 지난 7월 대한상의 제주포럼에서 국내 주요 AI 분야 리더들과 만나 AI 시대의 미래 전략을 논의하는 등 국가 차원의 AI 리더십 강화를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앞서 지난 6월 그룹 경영전략회의에서 최 회장은 그룹 차원의 AI 성장 전략을 주문한 바 있다.
SK 관계자는 “최 회장은 SK의 AI 밸류체인 구축을 위해 국내외를 넘나들며 전략 방향 등을 직접 챙기고 있다”며, “SK는 HBM, 퍼스널 AI 어시스턴트 등 현재 주력하고 있는 AI 분야에 더해 AI 데이터센터 구축 등 AI 토털 솔루션(Total Solution)을 제공하는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역량을 집중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