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시해 후 재벌개혁 완수하려는 국무총리 박동호 역 맡아 선 굵은 열연
“시리즈 처음, 쫄았지만 재밌더라···‘돌풍’은 정치 아닌 인간 욕망에 관한 얘기”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다. 만약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면 아마도 그 장면을 못 찍었을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 <돌풍>은 정치를 다룬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시리즈가 그리는 정치는 한국 정치다. ‘대통령을 죽이고 나라를 바로 세운다’는 기본 설정은 꽤나 극적인 데가 있지만, 정부·국회·재벌·검찰·운동권 등이 엮인 극 전체 이야기는 대한민국 정치 면면을 곧바로 떠올리게 한다. 게다가 주요 캐릭터 행보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치인 여럿을 모티브 삼았다고 할 정도로 닮아 있다. 그래서 일부 시청자는 <돌풍>을 불편하게 보기도 한다.
배우 설경구(57)가 연기한 ‘박동호’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다. 특히 박동호가 맞이한 최후에 관해서는 여러 말이 나온다. 절벽에서 추락하는 그 모습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경구는 이런 시각에 선을 그었다. “너무 나가지 않았으면 한다”는 게 그의 얘기였다.
“만약 내가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특정 인물을 마음에 뒀다면, 산으로 올라가는 걸음조차 떼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상상한 건 박동호 그 자체였지, 다른 누군가가 아니었다. 박동호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장면도 편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그 장면을 못 찍었을 것이다. 찍더라도 다른 식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크게 보면 <돌풍>은 국무총리 박동호와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 분)의 대결을 그린다. 박동호는 한때 정치적 동지였으나 타락해버린 대통령을 죽이고 권력을 쥔 뒤 재벌 권력에 철퇴를 가하려 한다. 정수진은 박동호가 대통령을 시해했다는 단서를 포착하고 그를 잡아들인 뒤 권력을 유지하려 한다. 총 12회로 구성된 이 시리즈는 2014년 <펀치>, 2013년 <황금의 제국>, 2012년 <추적자 THE CHASER> 등을 만든 박경수 작가의 작품답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쉬지 않고 질주한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한국 정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설경구는 <돌풍>을 정치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인간 욕망에 관한 이야기로 해석했다. 86세대를 향한 비판의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게 아니냐는 일부 주장에 대해선 “정치의 외피를 둘렀을 뿐 사회 어디에나 조직은 있기 마련이고 그 조직이 크든 작든 이런 대립은 종종 벌어지는 것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나는 SNS를 하지 않아 그 안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 정확히 모른다. 이 작품에서 한국 정치가 보인다면 그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이 사회 일원으로 살아가고, 우리가 겪은 일들이 우리 삶에 나도 모르게 스며들었을 테니까. 다만 <돌풍>이 남기는 게 정치가 아니라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이건 인간 욕망에 관한 얘기이니까.”
<돌풍>은 설경구의 사실상 첫 번째 시리즈물이기도 하다. 사실상이라는 말을 붙인 건 그가 1994년 <큰 언니>라는 아침 드라마에 출연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30년이 흘렀고, 당시와 현재 드라마 제작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던 걸 감안하면 이번 작품이 설경구의 첫 번째 시리즈물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는 “쫄았지만, 막상 해보니 할 만했다”고 말했다.
촬영 기간이 영화보다 길고 그 기간 내내 여유 부릴 새 없이 촬영을 해야 했던 건 분명 어려운 점이었다고 했다. 캐릭터의 특성상 박동호라는 인물이 주로 앉아서 상대와 대화를 하는 사람이라는 점도 쉽지 않았다고 했다. 같은 장소에서 상대 역만 바꿔가며 다른 장면을 반복해서 촬영하다 보니까 마치 쳇바퀴를 도는 것 같고 극이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는 얘기였다.
“그래도 다행인 건 12부작이었다라는 점이다. 보통 드라마는 A팀, B팀 나눠서 찍지 않는가. 그럼 배우들은 거의 못 쉰다고 하더라. <돌풍>은 한 팀이 다 촬영해서 그나마 여유가 좀 있는 편이었다. 박 작가가 대본을 빨리 내줘서 어려운 대사를 익힐 시간이 있었던 것도 다행이었다. 만약 대본이 급하게 나왔으면 박 작가 특유의 대사를 외우느라 힘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설경구가 첫 시리즈 출연작으로 박경수 작가의 드라마를 택한 건 그만큼 이 작품이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좋은 대본이 있다면 언제든지 시리즈에 출연할 생각이 있다고 여러 차례 얘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설경구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 속엔 시리즈에 대한 벽이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돌풍>이 그 벽을 완전히 허물어줬다는 것이다. 그 벽을 무너뜨린 게 박 작가 작품 특유의 재미였다.
“정말 재밌는 시나리오가 아니면 잘 못 읽는다. 그런데 이 작품은 1~5회를 한 번에 쭉 읽어 나갔다. 그 문장들이 쉽지 않은데도 잘 읽히더라. 사실 나는 그때까지 박경수 작가를 몰랐다. 대본을 읽고 작가님에 대해서 알게 됐다. 그 경력이 참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작가 본인은 1분도 지루한 게 싫다고 하시더라. 그 말에 큰 믿음이 갔다.”
설경구는 앞으로 <하이퍼 나이프>라는 시리즈를 또 내놓을 계획이다. 그는 “이젠 정말 대본만 좋다면 영화든 시리즈든 상관없이 출연할 계획”이라고 했다.
박동호는 신념으로 가득 차서 결국 폭발해버리는 인물이다. 그러면 설경구에게도 신념이 있을까. “신념은 없고, 신념이 뭔지도 모른다. 연기는 철학을 갖고 하는 게 아니라고 본다. 그저 작품이 훼손되지 않게 내 할 일을 열심히 하자, 최선을 다하자, 오늘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는 최소한 겹치지 않게 새로운 모습, 새로운 연기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최대한 노력한다. 외모부터 안 겹치려고 한다. 똑같이 수트를 입어도 다르게 보이고 싶다. 물론 안다. 시청자들이 그런 나를 보고 ‘또 똑같다’ ‘또 저거냐 지겹다’고 할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괴롭기도 하다. 정말 괴롭다. 하지만 그래도 최대한 열심히 겹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온라인에선 <삼식이 삼촌>으로 첫 번째 시리즈를 찍은 송강호와 <돌풍>을 한 설경구가 시리즈 부문 신인상을 놓고 맞붙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한다. 설경구는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도…”라고 농담을 던진 뒤 “이 나이에 신인이라는 말을 듣는 건 정말 복 받은 일 아닌가. 신인이라는 말은 참 좋은 말이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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