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자국 내 반도체 기업의 유치를 위해 향후 5년간 총 527억 달러(70조 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지만, 집행 지연으로 자금 향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인공지능(AI) 열풍이 반도체 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상황에서, 보조금 지급이 축소되거나 미국 기업을 중심으로 편성될 가능성까지 거론되며 전 세계 반도체 패권 경쟁의 중대 변수로 부상할 전망이다. 미국 정부가 반도체 회사인 인텔에 100억 달러(약 13조3550억 원) 넘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향을 협의 중이라고 <마켓 워치>와 <CNBC> 등이 2월 17일 보도했다. 두 매체는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미국 상무부가 대출과 직접 보조금을 합쳐 이 같은 규모의 자금을 인텔에 제공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5년간 보조금 527억 달러 지급키로 했지만 자꾸 지연···자금 향방 오리무중
미 상무부 인텔 보조금 100억 달러 지원 협의···수혜 목 매던 삼성 “어쩌나”
‘칩스법’ 뜨면서 반도체 업계 자국 중심 공급망 구축 나서며 총성 없는 전쟁
중국 생산·매출 비중 높은 한국 메모리 업체들 글로벌 공급망 재편 숙고 중
미 반도체 보조금 삼성전자보다 인텔·TSMC 먼저?···“팹리스 확보 서둘러야”
▲ 경계현 삼성전자 사장이 공개한 미국 테일러 공장 건설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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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7일 업계에 따르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시장에 재진출한 미국 인텔이 2월 21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연 ‘IFS(인텔 파운드리 서비스) 다이렉트 커넥트 2024’ 행사에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참석했다는 것.
러몬도 장관은 반도체 보조금 관련 내용을 담은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 이른바 ‘칩스법’ 소관 부처인 상무부의 수장이자, 법 통과 이후 세부 지원계획을 마련하고 실행해온 인물이다.
러몬도 장관은 이날 행사에서 패트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뿐 아니라 샘 올트먼 오픈AI CEO,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MS) CEO 등 미국 주요 기업 CEO들과 만났다.
▲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2022년 6월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 내셔널하버 소재 게이로드 호텔·컨벤션센터에서 한·미 투자협력포럼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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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계에서는 러몬도 장관이 이날 행사에 참석한 것을 두고 “의미심장하다”고 풀이했다.
러몬도 장관은 앞서 “두 달 내에 칩스법 보조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발언을 놓고 미국에 거액의 투자를 집행했으나 약속된 보조금을 못 받고 있던 삼성전자에 호재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러몬도 장관은 <로이터통신> 2월 5일자 인터뷰에서 “반도체 기업들과 복잡하고 어려운 협상을 진행 중”이라며 “향후 6~8주 안에 몇 가지 발표를 보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최대 두 달 안에 칩스법 지원금이 제공될 수 있다는 ‘사인’을 준 셈.
이에 앞서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복수의 반도체 업계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3월 안에 칩스법 보조금 공고가 나올 것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이어 주무부처인 상무부 장관이 이를 재확인한 것이다.
미국 행정부는 칩스법이 2022년 8월 발효됐고, 지난해 2월부터 반도체 기업 170여 곳으로부터 보조금 신청을 받았지만, 아직 영국의 방위산업체 BAE시스템스와 미국 시스템 반도체 업체 마이크로칩테크놀로지 등 2곳에만 소규모 보조금이 지급되는 데 그쳤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월 13일(현지 시각) 미국 백악관에서 추가 안보지원 예산안의 하원 통과를 촉구하는 긴급연설을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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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의 수장에게 요청할 정도로 적극적인 투자 유치에 나섰던 것과는 온도 차가 감지된다.
보조금 지급이 미뤄지자 일각에서는 보조금 예산이 한정된 만큼 수혜 대상 기업을 신중하게 고르고 있다는 분석도 들리지만, 집행이 지연되면서 자국 기업에 우선 보조금을 배정할 수 있다는 관측도 커지고 있다.
실제로 <블룸버그통신> <CNBC> 등 외신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대출과 직접 보조금 등을 포함한 자금을 인텔에 지급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들 매체에 따르면 미국 상무부는 대출과 직접 보조금 등을 포함한 자금을 인텔에 지급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는 것. 반도체 법 시행 이후 최대 금액에 해당하는 규모다.
미국 반도체 산업 진흥을 목적으로 하는 ‘칩스법’에 따라 자금 지출을 감독하는 미국 상무부는 앞서 2건의 보조금 제공 계획을 발표한 바 있지만 이번 건에 대해선 논평을 하지 않았다. 인텔도 논평을 거부했다.
앞서 인텔 등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외국 기업들은 자국에 위기가 발생했을 때 미국 공장을 계속 가동될 수 없다”며 보조금을 자국 기업을 중심으로 지급해야 한다는 입장을 노골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각에선 인텔의 반도체 공장 신설이 계획대로 빠르게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월 초 인텔이 칩 시장 둔화와 연방 자금조달 지연으로 오하이오 부지 완공을 2026년까지 연기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기약 없는 보조금···삼성 어쩌나
미국 현지에서는 오는 11월 초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바이든 행정부가 그동안 미뤄온 반도체 지원법 관련 보조금을 몇 주 안에 지급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이번 러몬도 장관의 인텔 행사 참가도 보조금 지급의 최대 수혜는 결국 미국이라는 관측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는 우려가 들린다.
삼성전자의 경우도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173억 달러를 들여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하고 있지만, 보조금 지급 여부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테일러 공장에서는 고성능컴퓨팅(HPC), AI 분야의 첨단 반도체를 생산할 예정으로, 대만 파운드리 1위 TSMC 추격을 위한 삼성전자의 핵심 생산거점이 될 것으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보조금 지급이 자꾸 미뤄지면서 당초 2024년 말로 계획했던 테일러 공장의 가동 시점도 뒤로 밀릴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다. 이에 삼성전자의 테일러 공장 후속 투자도 지연되는 등 글로벌 생산기지 운영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반도체 산업의 리더들은 ‘미국’이 돌아왔다고 인식하고 있다. 미래 반도체 산업은 미국에서 진행될 것이다.”(조 바이든 대통령)
바이든 행정부의 재정 정책인 ‘바이드노믹스(Bidenomics)’의 핵심은 반도체 산업이다. 미국 반도체 시설 투자 등에 총 527억 달러(약 70조 원)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은 미국 내 반도체 산업 육성과 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마련됐다.
반도체 생산의 지정학적 취약성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내 비싼 생산 비용을 피해 대만·한국·중국 등 아시아로 이동했던 반도체 제조·생산 시설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것이 핵심이다. 반도체 설계 등 일부 분야에서 빠르게 성장 중인 중국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크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반도체 지원법에 따라 팹 당 최대 30억 달러까지 각 프로젝트 총 비용의 15%를 지원 받을 수 있다. 보조금부터 대출, 대출보증, 세금공제 혜택이 포함돼 모두 390억 달러에 달한다.
백악관에 따르면 미국은 반도체 지원법 시행 후 1년 만에 해당 산업군에서 총 1660억 달러(218조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했다. 기업들이 지원을 받기 위해 460개 이상의 투자 의향서를 제출했고, 실제로 170여 곳이 보조금을 신청했다.
특히 AI 산업의 빠른 성장과 맞물려 첨단 반도체 시장에도 급격한 판도 변화로 이어지고 있다. 엔비디아·퀄컴·인텔 등 미국 기업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성장세를 구가하는 상황이다.
반도체 지원법은 반도체 산업의 무한경쟁 체제로의 전환을 일으키고 있다. 칩스법이 나온 이래 대만·일본·유럽 등 세계 각국은 반도체 지원법을 마련해 자국 중심의 공급망 구축에 나서며 총성 없는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이에 맞서 중국도 장비 국산화 전략으로 반도체 공급망 자립을 시도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 기업들의 고민도 더욱 커지고 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의 노골적인 견제를 계기로 미국·대만·일본 등 반도체 주요 국가 간 동맹이 공고해지고 있는 가운데, 중국 생산과 매출 비중이 높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우리 메모리 업체들은 미국에 대한 투자 확대 등 글로벌 공급망 재편을 숙고하는 상황이다.
보조금 삼성보다 인텔 먼저?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지급이 가시화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 기업들이 미국 내 반도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할지 주목된다.
2월 17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제2 공장을 짓고 있다. 삼성전자의 역대 최대 미국 투자 규모인 170억 달러(약 22조 원)가 투입된다. 올해 말 가동을 목표로 공사를 진행 중이다.
당초 삼성전자는 올해 안에 테일러 공장의 양산을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최근 양산 시기를 내년으로 미뤘다.
삼성전자가 테일러 공장의 양산을 연기한 배경으로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급 지연이 꼽히고 있다. 적지 않은 금액이 투입되는 데다 미국의 높은 건설 비용으로 보조금 지급이 미뤄지면 삼성전자의 부담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패키징 공장 건설 부지를 확정한 뒤 보조금 신청에 나설 전망이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150억 달러 규모의 첨단 패키징 공장 건립을 검토 중이다. 지난 1월부터 운영을 시작한 낸드 연구개발(R&D) 조직, 자회사 솔리다임과의 시너지도 올릴 계획이다.
대형 팹리스 확보 관건
이런 가운데, 최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인텔의 파운드리 포럼 행사에 참여하기로 하면서 인텔이 한국 기업보다 먼저 보조금을 먼저 지급받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강력한 파운드리 경쟁사로 떠오른 인텔은 435억 달러를 투입해 애리조나주와 오하이오주 등에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TSMC도 한국 기업보다 일찍 보조금을 받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TSMC는 400억 달러를 들여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2곳을 건설 중이다.
두 회사는 미국에서 삼성전자보다 큰 규모의 투자를 진행 중인 만큼, 유리한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이에 따라 업계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보조금 지급에 앞서 당장 미국 내 대형 팹리스(반도체 설계 전문기업) 유치 전략에 공을 들일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엔비디아와 퀄컴 등 대부분의 글로벌 팹리스가 미국에 몰려 있는 만큼 삼성전자는 초미세 공정에서 이들 고객사의 수주를 확대해 미국 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정부는 보조금 지원에서 ‘자국의 경제와 안보 기여도’를 따질 것을 감안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 내 고객사 수를 늘려 한국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높이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런 가운데 미국 정부가 자국 반도체 회사 인텔에 100억 달러(약 13조3550억 원) 넘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방향으로 협의 중이라는 보도가 나와 주목을 끌고 있다.
<마켓워치> <CNBC> 등의 매체는 2월 17일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미국 상무부가 대출과 직접 보조금을 합쳐 이 같은 규모의 자금을 인텔에 제공할 생각”이라고 전했다.
SK하이닉스의 경우, 패키징 공장과 R&D 조직을 통해 현지 고객사와의 협력을 얼마나 이끌어낼지가 향후 보조금 지급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과 SK는 인텔과 정면 대결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라며 “미국 내 투자가 늦어지면 미래를 담보하지 못하는 만큼 한국 기업들은 지금부터 투자 늘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의 수혜를 받기 위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은 한국 정부와도 발을 맞춰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TSMC의 경우 대만 정부와 합을 맞춰 해외 투자에 대한 행정적 지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강인선 외교부 2차관은 호세 페르난데스 미국 국무부 경제성장·에너지·환경 담당 차관을 만나 한국 기업들이 보조금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이처럼 기업들이 정부와 함께 미국을 설득할 수 있는 물밑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들의 단독 전략으로 보조금 문제를 해결하기에 한계가 있는 만큼 다른 국가처럼 자국 정부의 협력을 이끌어내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